노태우 민정당 대표, 직선제를 골자로 한 6·29선언 발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제5공화국 헌법으로 그해 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6월 10일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간선제를 규정한 제5공화국 헌법으로 그해 말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고, 6월 10일 여당인 민정당의 노태우 […]
만해 한용운은 불교개혁을 부르짖은 승려였고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지닌 독립운동가였으며 빼어난 서정시를 남긴 시인이었다. 한용운이 고향에서 10여 년간 한학을 익힌 뒤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 […]
1921년, 멀리 시베리아 동쪽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수백명의 한인 무장 독립부대원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자유시 사변’ 혹은 ‘흑하 참변’이라 불리는 참사였다. 러시아혁명을 안착시키려는 […]
1914년 6월 28일, 인류에 대재앙을 불러온 두 발의 총소리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 울려퍼졌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이곳에서 열린 육군 열병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중 […]
한국이 월드컵 본선 무대를 처음 밟은 것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다. 이 대회부터 본선 참가국이 16개국으로 늘어난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지역별 예선을 거치지 않은 무임 […]
1972년 6월 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이 미 […]
“여기는 갈매기. 기분 최고” 1963년 6월 16일, 여성 최초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슈코바(26)가 우주에서의 감동을 흥분된 목소리로 이렇게 전했다. 갈매기는 그녀의 호출 부호였다. 테레슈코바가 1인승 […]
1976년 6월 16일 오전, 남아공 소웨토의 흑인 학생들이 수 백명씩 무리지어 어디론가 몰려갔다. 손에는 ‘지배자의 언어를 거부한다’고 적힌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고 흑인 찬가를 부르는 […]
↑ 니조성(二条城)의 니노마루(二の丸) 궁 by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막부(幕府)가 막을 내린 교토의 니조성(二條城) “폐하! 이 정권을 모두 천황께 바치옵나이다.” 역사 드라마를 […]
좌우 어느 발로도 가능한 자유자재의 킥, 바나나를 연상케하는 환상적인 스핀킥, 자로 잰 듯 동료선수의 발끝에 닿는 절묘한 패스,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 그의 이름은 에드손 […]
6·25가 발발하자 한 사형수가 예정보다 앞당겨 총살형에 처해졌다. 간첩 이적행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수임이었다. 이화여전 9년 후배 전숙희에 따르면 “사랑밖에 몰랐던, 그리고 너무 순진했던” […]
1982년 초 아르헨티나 경제는 위기상황이었다. 3월의 인플레는 46%를 기록했고 실질소득은 1970년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1916년부터 1976년까지 60년 동안 대통령이 22번이나 바뀌고 1976년부터는 아예 쿠데타 세력들이 […]
1777년 6월 14일, 미국이 독립 1년 만에 국기를 처음 제정했다. 13개주 대표가 모인 대륙회의에서였다. ‘붉은 색과 흰 색으로 된 13개의 줄무늬와 청색 바탕의 13개 […]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1966년 6월 13일, 이른바 ‘미란다 원칙’ 고지를 의무화하도록 한 판결이 미 법정에서 처음 내려졌다. 미 연방 대법원이 경찰로부터 묵비권과 […]
“스윙은 분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의(定義)를 거부하는 이 간단한 설명으로 베니 굿맨은 왜 자신이 ‘스윙의 황제’로 불리는지를 명쾌하게 일깨워주었다. 황제는 군림할 뿐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
단종(1441.7~1457.10)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어머니(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산후병으로 숨지고, 11살이던 1452년 5월 왕위에 올라서도 삼촌에게 3년 만에 죽임을 당하는 등 조선 역사상 가장 불행한 […]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미국 바로 그 자체”라고 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사나이 중의 사나이”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한다. 1928년 존 포드 감독의 […]
4·19 의거 후 2개월 만에 100만의 인파가 다시 서울거리를 가득 메웠다. 얼굴에는 분노 대신 반가움이, 두 손에는 돌멩이 대신 국기가 잡혀있는 것이 그때와 다른 […]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협상의 최대 걸림돌은 포로송환문제였다. 유엔군 측의 자유송환론과 공산군 측의 강제송환론이 팽팽히 맞섰기 때문이다.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공산군 양측의 포로송환문제가 2년만에 타결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