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스윙의 황제’ 베니 굿맨 사망

“스윙은 분석을 용납하지 않는다.” 정의(定義)를 거부하는 이 간단한 설명으로 베니 굿맨은 왜 자신이 ‘스윙의 황제’로 불리는지를 명쾌하게 일깨워주었다. 황제는 군림할 뿐 설명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일까. 1909년 시카고의 가난한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굿맨은 어려서부터 흑인 클럽을 기웃거리며 재즈와 블루스를 듣고 자랐다. 독학으로 닦은 클라리넷 연주는 젊어서 이미 대가의 경지를 넘보고 있었다. 저속한 가락의 음악에서부터 모차르트의 천상의 소리까지 자유자재로 클라리넷의 음색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이미 20대 초에 만개했다.

1934년 그의 나이 25세 때 첫 밴드를 결성하고 빌리 로즈의 뮤직홀에서 데뷔한 뒤 정기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한 굿맨의 이름이 확실하게 젊은이들 속을 파고 든 것은 해설이 곁든 그의 연주가 ‘춤을 춰요’라는 캘리포니아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 방송전파를 타면서였다. 특히 대공황기의 고단함이 한 풀 꺾일 무렵인 1935년 8월 로스엔젤레스 팔로마 볼륨에 모인 젊은 관객들의 열광을 계기로 굿맨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유명 뮤지션이 됐다. 이후 10년간 펼쳐질 ‘스윙의 시대’가 마침내 막을 올린 것이다.

재즈에 매력을 느낀 일부 백인 뮤지션들이 백인의 입맛을 가미해 대중화하려고 한 노력의 결실이 스윙이었고, 그 선두에는 굿맨이 있었다. 1935년 굿맨은 새로운 파격을 시도했다. 그의 연주단에 흑인 피아니스트 테디 윌슨을 기용하고 흑인 비브라폰 주자 라이오넬 햄프턴과 기타리스트 찰리 크리스천을 발탁해 흑백혼합단을 구성한 것이다. 격심한 인종차별 풍토가 엄연했던 그 시절에 흑백이 한데 어울려 공연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했지만 굿맨에게 소리만 마음에 들면 반인반수(半人半獸)라도 상관이 없었다. 1938년 1월의 카네기홀 콘서트는 굿맨 음악의 정점이었다. 카네기홀에서 저속의 대명사로 불린 흑인음악 재즈를 연주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굿맨은 클래식에만 문을 열어주던 그 완고한 카네기홀의 문을 열어젖혔다. 1986년 6월13일 향년 77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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