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이스-메리 리키 부부가 1961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 화석을 살펴보고 있다.
by 김지지
루이스 리키(1903~1972)는 동아프리카 케냐의 카베테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영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흑인 원주민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그곳 키쿠유족 언어를 익히고 때로는 흑요석 석기들을 발견하곤 했다. 흑요석은 마그마가 급격히 식으면서 굳어져 이루어진 화산암으로 회색 또는 검은색을 띠고 유리 광택이 있다. 비석·도장·그릇·단열재 따위의 재료로 쓰인다.
리키는 1919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했다. 그가 고고학 탐사대를 이끌고 다시 케냐로 돌아온 것은 23살이던 1926년 여름이었다. 인류의 진화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다윈의 주장을 입증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탐사대는 인류의 조상 화석을 발견하지 못하고 5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물방울 모양의 주먹도끼들만 발견하고 철수했다. 루이스가 아내이자 평생의 공동 연구자가 될 메리 니콜을 만난 것은 1933년이었다. 자신의 책에 수록될 삽화를 의뢰한 것이 만남의 시작이었다. 당시 루이스는 결혼한 몸으로 아이가 하나 있고 부인은 임신 중이었다. 그런데도 10살 아래의 메리와 결혼, 동료 고고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루이스는 메리 니콜에서 메리 리키(1913~1996)로 이름이 바뀐 아내와 함께 1935년 탄자니아(1964년까지 명칭은 탕가니카)의 올두바이 협곡을 찾아갔다. 이후 부부는 탄자니아와 케냐 등의 오지에서 고락을 같이하며 발굴에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아프리카가 인류의 탄생지라는 것을 밝히는 데 운명을 건 부부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48년이었다. 케냐 빅토리아 호수의 루싱가 섬에서 인간과 원숭이 양쪽 모두의 조상인 2,500만 년 전 유인원의 머리뼈와 턱뼈 화석을 발견한 것이다. 화석에는 ‘프로콘술 아프리카누스’라는 학명이 붙여졌다.
리키 부부는 1959년 7월 17일에도 올두바이 협곡의 화석층에서 두개골 화석 하나를 발견했다. 리키는 ‘잔잔트로푸스 보이세이’로 명명하고는 ‘호도까는 사람’으로 불렀다. 잔잔트로푸스는 ‘동아프리카 사람’이란 뜻이다. 고인류학계는 이후 발견된 증거를 근거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분류하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로 고쳐 명명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남방의 원숭이’라는 뜻으로 고인류학계는 인류 진화 사상 최초의 완전한 단계를 이룬 집단으로 인정한다. 오늘날에는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로 재분류되어 불리고 있다. 루이스 부부가 발견한 진잔트로푸스 화석은 1924년 남아공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즉 ‘타웅 아이’와 함께 아프리카가 인류의 탄생지라는 가설을 확인시켜 주었다. 당시만 해도 아주 오래된 화석은 방사성 연대 측정에 필요한 방사성 원소가 충분하지 않아 화석에서 직접 연대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따라서 화석 바로 위쪽이나 아래쪽 퇴적물의 표본을 채취해 화석의 연대를 뭉뚱그려 알아내는 방법을 썼다. 칼륨·아르곤 연대 측정법이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암석과 토양에서 자연적으로 발견되는 원소들의 방사성 붕괴를 활용함으로써 퇴적물의 연대를 산출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알아낸 진잔트로푸스 두개골의 연대는 180만 년 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발견으로 부부는 인류고고학 분야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진잔트로푸스 발견으로 인류고고학 분야의 유명인사 돼
부부는 1962년 올두바이 협곡에서 또 다시 머리뼈 일부, 아래턱뼈, 손뼈, 몇 개의 이빨을 발견했다. 역시 180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화석을 두고 루이스는 ‘호모 하빌리스’, 즉 ‘손을 쓴 사람’이라는 학명을 부여했다. 루이스는 호모 하빌리스야말로 인간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계통에 속하며 그 때까지 가장 오래된 화석으로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진정한 인간의 혈통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호모 하빌리스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동아프리카에서 동시대에 살았지만 호모 하빌리스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에 가까운 좀 더 진화된 인류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당시 학계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나중에 인정을 받았다. 루이스의 주장 대로 오늘날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보이세이’는 인간의 직계 조상이라기보다는 멸종한 인간의 사촌뻘로 여겨지고 있다. 호모 하빌리스의 발견은 각국의 고생물학자들에게 동아프리카 화석층을 샅샅이 훓어서 자신들도 화석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열망에 불을 붙여주었다.
루이스의 업적은 화석 발견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인류의 기원을 밝혀내기 위해 유인원 연구에도 눈을 돌렸다. 1960년 탄자니아의 곰베에서 침팬지 연구를 시작한 제인 구달, 그리고 몇 년 간격으로 르완다와 자이레에서 고릴라를 연구하기 시작한 다이앤 포시, 보르네오에서 오랑우탄을 연구한 비루테 골디카스가 그의 3총사 여성 제자들이었다.
메리 리키는 남편이 사망(1972)한 뒤에도 동아프리카의 오지를 뒤졌다. 1978년에는 탄자니아 올두바이 남쪽 50㎞ 지점의 라에톨리 평원에서 직립원인의 가장 오래된 발자국 화석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360만 년 전 것으로 확인된 발자국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 호모 에렉투스(직립 원인)가 존재했음을 실증한 것으로 인류 진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성인 여자와 남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한 방향으로 가는 이 생생한 발자국은 오늘날 ‘라에톨리 발자국’으로 불리고 있다.
‘라에톨리 발자국’은 두발 걷기의 강력한 증거
360만 년 전 라에톨리의 발자국을 찍고 걸어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로 추정되는 주인공에게는 사실 인간다운 점이 거의 없었다. 몸은 털로 덮여 있었고 말도 못 했으며 무엇보다 두뇌가 작았다. 그런데도 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것은 오늘날 인간의 발처럼 엄지발가락이 길게 발 앞을 향해 뻗어있다는 사실이었다. 침팬지나 고릴라는 엄지발가락이 가장 길지도 않고, 앞을 향해 있지도 않다. 엄지발가락이 굵고 길어진 것은 걸을 때 엄지발가락으로 힘을 받아 땅을 뒤로 밀치기 때문이다. 두발 걷기의 강력한 증거였다. 라에톨리의 발자국 화석에서 발가락 부분의 깊이와 뒤꿈치 부분의 깊이 비율이 오늘날 인류가 진흙에 남기는 발자국의 깊이 비율과 거의 같다는 것도 2010년에 밝혀졌다. 이 깊이 비율은 발자국 주인공이 뒤꿈치로 땅을 디딘 뒤 발 안쪽을 살짝 대고 다시 발가락(특히 엄지) 부분에 힘을 집중시키며 땅을 밀친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인류의 걸음걸이가 최소 360만 년 전부터 이 방식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이로써 라에톨리 발자국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새긴 발자국 다음으로 유명한 발자국이 되었다.
리키 가족은 아들 리처드 리키와 며느리 미브 리키까지 화석 발굴에 뛰어든 것으로 유명하다.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난 아들 리처드는 옛날 뼈 화석만 만지는 집안 분위기가 싫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사냥 안내원으로 생활했다. 그러나 어릴 적 부모의 어깨 너머로 배운 고고학 지식과 사냥 안내원을 하며 터득한 지리 감각을 발판 삼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인류학자가 되었다. 리처드 리키는 1970년 발굴팀의 동료이던 미브 리키와 결혼하고 케냐 북부의 루돌프 호수(지금의 투르카나 호수) 지역을 발굴했다. 1972년 이들 부부는 호모 하빌리스와 시기는 비슷하지만 생김새가 전혀 다른 인간의 두개골 화석을 발견했다. 그들은 호모 하빌리스와 달리 얼굴이 평평하고 두개골이 큰 이 화석에 발굴지의 이름을 따서 ‘호모 루돌펜시스’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화석은 턱뼈나 이빨도 없는 달랑 두개골 하나만이어서 독립된 인류 조상 종(種)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리처드는 이후에도 230명 400여 개의 인류 화석을 발견하는 괄목한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리처드의 아내 미브 리키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화석을 발견하고 케냐국립박물관 고생물학과장을 지냈다. 미브 리키와 그의 딸 루이즈 리키 모녀는 발굴 활동을 계속하다가 2007년과 2009년 잇따라 두개골과 턱뼈 등을 발굴했다. 모양은 호모 루돌펜시스와 똑같았다. 이후 학계는, 인류 진화는 한 종이 멸종하고 다른 종이 나타나는 단선적인 경로가 아니라 여러 종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복선적인 형태였음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