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황금왕’ 최창학, 조선 최대 금맥 발견… 인생 대역전 꿈 이뤄

조선을 대표하는 3대 금광 반열에 올라

최창학(1890~1959)은 금광을 찾아 인생 대역전의 꿈을 이룬 황금왕이었다. “벼락부자 벼락부자 하지만 근래 조선 사람으로 최창학처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별건곤 1932년 11월호)이라고 평할 정도로 그 시대 황금광의 대명사였다.

최창학은 평북 구성군의 빈촌에서 태어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유년기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어 그에 대한 기록은 유년기를 건너뛰고 20살에 시작된다. 최창학은 20대 초반부터 금맥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29살이던 1919년 고향집 근처 구성군 관서면 조약동에서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였다. 당시 조약동 광산은 사금 한 톨 나지 않는 폐광이었다. 그러나 최창학에게는 10년의 실패가 가져다준 안목이 있었다.

그래도 황금은 좀처럼 최창학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5년을 보내다가 1923년 마침내 조약동에서 조선 최대의 금맥을 발견했다. 곧 삼성금광으로 명명된 그곳은 1년 만에 조선 굴지의 금광으로 성장했다. 4~5년 후에는 미국인 소유의 운산금광(평북 운산)과 프랑스인 소유의 대유동금광(평북 창성)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3대 금광의 반열에 올랐다. 이 가운데 운산금광은 ‘동양의 엘도라도’라 불리며 수십 년 동안 엄청난 양의 노다지를 토해내고도 여전히 동양 최대의 산금량을 자랑했다.

최창학을 조선 굴지의 대자산가로 만들어준 것은 채굴한 금이 아니라 금광이었다. 금을 캐내 얻는 수익보다 금광을 팔아 얻는 수익이 더 컸기 때문이다. 최창학은 양질의 광구만 직접 경영하고 그 외의 광구는 덕대라고 불리는 분광업자에게 임대해 간접 경영했다. 기계, 집, 땅 할 것 없이 조약동의 모든 것은 최창학의 소유였다. 누구든 황금을 캐고 싶으면 착수금을 내고 허가를 받아야 했다.

최창학이 떼돈을 벌어 주체하지 못하고 있던 1924년 7월 24일 무장독립단이 삼성금광을 습격했다. 그 무렵은 정체가 불분명한 무장독립단이 압록강을 건너와 평안북도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던 시기였다. 독립군은 부잣집을 습격해 군자금을 빼앗거나 독립군이 될 만한 청년들을 소집해 국경선 너머로 돌아갔다. 최창학은 자신을 표적으로 한 독립군의 습격을 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백만장자였으나 죽을 때는 빈털털이

최창학은 1929년 8월 미쓰이 광업에 130만 원(현재 금액 1,300억 원)의 현금을 받고 삼성금광을 팔았다. 이미 그가 갖고 있는 수백만 원까지 더해져 백만장자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금광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는 않았다. 삼성금광을 매도한 후에도 평북 구성은 물론 삭주, 의주 일대에 수십 개소의 금광을 소유한 조선 굴지의 금광왕으로 여전히 군림했다.

그렇다고 그가 조선 최대 재벌은 아니었다. 세도가 민영휘와 동아일보를 설립한 김성수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창학의 이름이 부자의 아이콘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가문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교양도 없는 사내가 수년 만에 백만장자의 대명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창학은 그 후에도 평북 일대의 광구 수십 개소를 묶어 600만 원에 양도하는 빅딜을 성사시켰다.

최창학은 이후 서울로 이주해 충정로에 죽첨장을 짓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일본군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고 거금을 기부했다. 이 때문에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재산의 3분의 2는 남북의 분단으로 이미 북한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최창학이 자신의 운명을 의탁한 이는 김구와 그가 이끄는 한독당이었다. 김구가 해방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는 계산에 따른 결과였다. 김구에게는 자신의 대저택 죽첨정을 헌납하고 한독당에는 엄청난 정치자금을 기부해 만일에 대비했다. 김구는 죽첨정을 경교장으로 개명하고 정치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그러나 1948년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1949년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당하자 최창학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였다. 결국 일체의 특혜성 사업에서 배제되고 집요한 세무조사에 시달렸다. 1950년대에는 탈세 등의 혐의로 검찰청과 법정을 오갔다. 재산 대부분도 모래알같이 사라졌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1959년 10월 12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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