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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스코필드(석호필)… 3·1운동과 제암리 만행을 세계에 알린 ‘34번째 민족대표’

↑ 기념우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왼쪽)와 조지 루이스 쇼

 

우정사업본부가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2023년 8월 14일 ‘대한독립에 헌신한 외국인’을 주제로 한 기념우표 62만 4000장을 발행할 예정이다. 이 기념우표에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한국명 석호필)와 조지 루이스 쇼(1880~1943)의 초상이 담겼다. 두 사람 중 스코필드의 삶을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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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한국과 인연 맺어

1916년 이른 봄, 캐나다 토론토대의 온타리오 수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에게 멀리 조선에서 날아온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 올리버 에비슨이 보낸 편지에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 강의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스코필드는 요청을 받아들여 1916년 10월 아내와 함께 조선에 도착, 세브란스 의전 교수로 부임했다.

영국 워릭셔주 럭비시에서 태어난 스코필드에게 조선은 완전히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1897년 여름 어느 날 아버지가 교수로 근무하는 영국 클리프대에 유학 중인 여병현이라는 조선인을 수차례 만나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필드는 1905년 영국에서 고교를 졸업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바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장에서 일을 했다. 돈을 모아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좀처럼 돈이 모이지 않자 영국에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대학에 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1907년 2월 영국령인 캐나다의 토론토로 이주했다.

농장에서 반년 남짓 일한 결과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돈이 모여 토론토대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장학금을 받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공부하던 1909년 여름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팔과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래도 공부를 계속해 1910년 대학을 졸업하고 온타리오주 세균학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11년에는 토론토대에서 수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1914년 모교의 세균학 강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에비슨 박사의 편지를 받고 조선행을 결정한 것이다.

세브란스의전 시절의 스코필드(왼쪽)와 미국인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큔

 

스코필드는 조선에 도착한 후 19년 만에 여병현을 다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이상재 등 조선의 민족 지도자들과 광범위하게 교제했다. 한국에서는 스코필드와 발음이 비슷한 ‘석호필(石虎弼)’로 불렸다. 스코필드는 돌 ‘석(石)’이 자신의 철석같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고 범 ‘호(虎)’가 자신이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임을 보여주며 도울 ‘필(弼)’이 영어로 알약을 나타내는 ‘pill’과 발음이 같아 의학과 연관이 있다며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좋아했다. 세브란스에서 위생학과 세균학을 가르치는 스코필드의 한국 생활은 전반적으로 순조로웠으나 아내가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 만삭의 몸으로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는 홀로 남아 강의와 선교를 병행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5일, 그를 찾아온 독립운동가 이갑성의 부탁을 받고 3·1 운동 관련 임무를 맡게 되었다. 국제 사정을 알려주는 역할이었다. 스코필드는 우드로 월슨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만세 소리가 서울의 하늘에 메아리치자 시위 현장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3·1만세운동 후에는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해 일본인이 서울에서 발행하는 영자신문 ‘서울 프레스’에 수차례 게재했다. 당시 ‘서울 프레스’는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일본의 정책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어용신문이었지만 일본인 사장은 일본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3·1 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

스코필드가 1919년 4월 15일 일어난 경기도 화성군 제암리의 비극 소식을 들은 것은 4월 17일이었다. 스코필드는 이튿날 제암리를 찾아가 일본 경찰 몰래 현장의 사진을 찍고 주민들의 증언을 기록했다. 일제가 제암리와 이웃한 수촌리에서 4월 5일 자행한 마을 방화 만행은 보고서로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비밀리에 미국으로 보내져 미국 장로회 기관지에 실렸다. 그가 찍은 사진은 상해 임시정부에 전해져 임시정부 기관지에 실리고 만행 피해자 사진은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달되었다. 이후에도 3·1 운동으로 투옥된 유관순 등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총독부 관료들에게는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항의했다. 그가 3·1 운동의 34번째 민족 대표로 불리는 것은 이런 노력 때문이다.

1919년 4월 제암리 학살 사건 직후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만행 현장 사진

 

스코필드는 1919년 9월 하순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지구 파견 기독교 선교사 회의’에 참석해 800명의 해외 선교사들을 상대로 3·1 운동의 진상을 상세히 보고했다. 일제가 이런 스코필드를 가만둘 리 없었다. 총독부는 “스코필드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며 세브란스 의전에 압력을 가했다. 그럴 때마다 에비슨 박사는 “계약 기간이 4년이므로 계약이 끝날 때 가서 생각해보자”며 적당히 둘러댔다. 결국 1920년 4월 신학기가 되었을 때 스코필드의 4년 근무 계약은 더 이상 연장되지 않았다. 4월 하순의 어느 날 밤에는 스코필드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까지 일어나 지인들을 경악시켰다. 스코필드는 사실상의 강제 출국에 앞서 옥고를 겪고 있는 이상재, 이갑성, 오세창 등 독립지사들을 일일이 면회하고 격려했다.

조선을 떠나기 전 스코필드는 큼직한 용지에 타자기로 촘촘히 친 298장짜리 3·1 운동 목격기를 가다듬었다. 캐나다로 돌아가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일본의 검열을 피해 원고 뭉치를 무사히 캐나다로 가져가는 일이었다. 결국 며칠 밤을 새워 사본을 하나 만들어 훗날을 위해 세브란스병원 지하실 바닥에 묻어두고 진본은 가져갔다.

 

해외에서 3·1 운동의 만행을 알게 된 것은 스코필드 덕분

1920년 4월 1일 한국을 떠날 때 다행히 검열을 통과해 일본을 거쳐 7월 무사히 캐나다에 도착했다. 캐나다에서 스코필드가 먼저 하고자 했던 일은 한국의 실정과 3·1 운동의 전모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일본의 비인도적 처사를 만방에 폭로하는 일이었다. 먼저 캐나다와 미국의 신문·잡지 등에 한국에서 찍어온 사진과 함께 한국의 실상을 알렸다. 스코필드는 ‘끌 수 없는 불꽃’ 원고를 영국 런던의 한 출판사에 보내 출판을 타진했으나 출판사는 내용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일본의 비인도적 포악상을 폭로하는 것이라 출판이 어렵다는 답을 보내왔다. 미국에 체류하는 이승만의 소개를 받아 찾아간 뉴욕의 출판사는 출판은 할 수 있으나 출판 비용은 스코필드가 부담하라고 했다. 그러나 스코필드에게는 그럴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어 결국 포기했다.

출판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스코필드는 원고 내용을 단편적으로 잡지에 발표했다. 각종 강연을 통해서도 내용을 소개했다. 스코필드의 노력으로 해외의 많은 사람이 비로소 한국의 사정과 3·1 운동을 알게 되었다. 스코필드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교수로 복직했으나 한국에 가고 싶어 월급의 3분의 1을 매달 모았다. 그렇게 6년 동안 모은 여비로 1926년 6월 23일 추방 6년 만에 서울을 방문했다가 2개월 만에 돌아가고는 30년 이상 한국에 올 기회가 없었다. 1935년 온타리오 수의과대의 수의병리학 정교수가 되고 67세이던 1955년 은퇴했다.

만년의 스코필드

 

그가 이승만 정부의 초대로 다시 한국을 방문한 것은 1958년 8월 14일이었다. 영구 귀국을 결심한 그는 서울대 수의대학 강단에 서는 한편 이승만의 독재정치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이 스코필드에게 압력을 가했다. 강의를 중단시키고 그와 친한 사람들은 위협했으며 4평짜리 숙소까지 비우라고 통고했다. 하지만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나자 그해 12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이자 대한민국 수립 후 3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스코필드와 영어 성경공부를 했던 경기고 학생들. 앞줄 가운데가 스코필드. 뒷줄 왼쪽 두 번째가 김근태 전 의원, 그 오른쪽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스코필드는 1961년의 5·16쿠데타는 지지했다.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5·16은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한국 사회에서 필요불가결한 혁명”이라며 “혁명은 한국의 번영을 위한 ‘마지막 희망이자 기회’”라고 강조했다. 간간이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다가 한국에 있을 때 기력이 급속도로 악화해 1970년 4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60년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유족들이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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