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존 케이지 작곡 ‘4분 33초’ 초연… 그때까지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음악’

↑ 존 케이지

 

우연하게 빚어지는 소음도 얼마든지 음악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1952년 8월 29일, 미국 뉴욕주 우드스톡의 매버릭 콘서트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가 무대에 놓인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그는 피아노는 치지 않고 피아노 뚜껑을 세 차례 열고 닫기만 하다가 정확히 4분 33초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아노 건반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으니 당연히 피아노 소리는 없었다. 다만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와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 청중의 웅성거림과 일부 관객의 짜증 섞인 목소리만이 들렸다. 튜더는 왜 피아노를 치지 않고 그냥 일어선 것일까?

해답은 존 케이지(1912~1992)가 작곡한 ‘4분 33초’라는 제목의 악보에 있었다. 3악장으로 구성된 악보에는 악장마다 ‘TACET(침묵)’이라는 표시가 있었고, 악장을 구분하기 위해 33초, 2분 40초, 1분 20초 마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닫으라는 지시사항만 적혀 있었다. 따라서 피아니스트는 악보에 적힌 대로 연주를 한 것이고, 관객은 악보의 내용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짜증을 낸 것이다. 존 케이지는 누구이고 왜 이런 음악을 작곡한 것일까?

존 케이지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어려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다. 대학을 중퇴하고 무작정 유럽으로 건너가 1년 6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카프리, 스페인 마드리드, 독일 베를린과 북아프리카 등지를 무전으로 돌아다닌 후 1931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에게 새로운 음악세계를 알려준 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1874~1951)였다. 쇤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유럽 음악을 지배하고 있던 조성음악을 버리고 무조(無調)주의의 12음계 음악을 창시한 사람으로,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오스트리아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케이지는 미국의 UCLA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쇤베르크에게서 2년 동안 대위법, 화성법, 분석법 등을 배웠다. 쇤베르크는 케이지가 수강료를 낼 수 없는 딱한 처지라는 사실을 알고 무료로 가르쳤다. 케이지가 평생의 동지이지 동성 연인이 될 현대무용의 거장 머스 커닝햄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케이지는 이후 오랫동안 커닝햄과 작곡가와 무용가로 공동작업을 했다. 1970년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는 동성애자로 커닝햄과 함께 살았다.

 

“완전한 무음(無音)이란 있을 수 없다”

케이지는 1939년 전통적인 범주를 벗어난 새로운 음악을 작곡했다. 1940년에는 피아노 현 사이에 너트, 볼트, 고무, 털실 등을 끼워 음색과 음정을 왜곡하고 굴절시키면서 타악기 효과까지 내는, 조작된 피아노를 개발했다. 1943년 2월에는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첫 번째 뉴욕 공연을 열었다. 평론가들은 꽃병, 워낭, 진동자 등으로 구성된 케이지의 절충주의적 악기 조합에 큰 관심을 보였다.

케이지가 1952년 작곡한 ‘4분 33초’를 통해 알리고자 했던 메시지는,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할 때 나는 소리만이 음악이 아니라 우연하게 빚어지는 자연스러운 소음도 얼마든지 음악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었다. 따라서 ‘4분 33초’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오랜 고정관념을 시험하고 도발한 것이며, 그때까지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음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데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 일부 음악평론가들은 ‘4분 33초’가 처음 연주된 순간을 20세기 음악사에 세워진 새 이정표로 간주하기도 한다.

“완전한 무음(無音)이란 있을 수 없다”는 케이지의 믿음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완벽한 방음시설을 갖춘 녹음실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과 머릿속 이명(耳鳴)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기묘한 ‘침묵의 소리’를 듣고부터 완전한 ‘무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케이지는 음악을 연주한다는 의식적 행위가 없더라도 이미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리에 노출되어 있고, 그 소리들의 우연한 조합이 생성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음악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케이지는 음악을 ‘소리의 조직’으로 정의한 뒤 기존의 음악과 소음을 동일한 음악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서양음악이 옥타브라는 제한된 음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따라서 케이지는, 청중은 작곡가나 연주자에 의해 만들어진 완성품으로서의 음악이 아니라 ‘무음’의 음악을 통해 때와 장소에 맞는 환경적 음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근대 유럽의 음악관을 정면으로 부정

이런 음악관을 발판으로 케이지는 피아노의 현 사이에 너트, 볼트 등의 금속과 채소, 파이 등을 끼워넣어 피아노의 음을 기괴한 소리로 변조했다. 한 항아리에서 다른 항아리로 물을 쏟아부으며 휘파람을 부는 음악을 작곡하기도 하고 플라스틱이나 심지어 새털, 장난감, 인형 등을 활용해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음의 자연발생 상태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는 케이지의 생각은 인간이 음을 지배하고 음을 구축함으로써 음악작품을 꾸려온 근대 유럽의 음악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케이지는 ‘4분 33초’의 후속곡으로 ‘0분 00초’를 1962년에 발표했다. ‘0분 00초’의 무대에 설치된 여러 대의 스피커에서는 비명 소리, 침 삼키는 소리, 찰칵거리는 소리 등이 증폭되어 나왔다.

세상 사람들은 케이지의 예측할 수 없는 창작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장르를 넘나들고 전통적 벽을 허물며 현대 예술의 모습을 바꿔간 케이지의 음악은 다른 분야의 전위예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시(詩)에서는 앨런 긴즈버그, 비디오 아트에서는 백남준, 무용에서는 머스 커닝햄 등 다양한 전위예술가들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전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선구자로 나섰다.

특히 백남준은 “나의 국제적 성공의 70~80%는 케이지 덕분”이라고 말할 정도로 케이지와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백남준과 케이지의 운명적 만남은 1958년 8월에 이뤄졌다. 당시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는 매년 여름 휴가철이 되면 젊은 작곡가들을 위한 국제 신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는데, 1958년 여름 존 케이지와 데이비드 튜더가 연주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백남준이 연주회장을 찾아간 것이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발을 구르거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 야유하고 고함치는 사람들로 어수선했으나 백남준은 그 소란 중에도 케이지의 음악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백남준은 케이지의 사고가 서양음악의 전통과 서양음악사를 뒤집는 것이며 그것이 동양의 선불교적 배경에서 창안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케이지의 음악적 모험 정신을 자신의 예술적 좌표로 삼았다. 1990년에는 자신의 비디오 예술을 상징하는 9대의 텔레비전 모니터, 케이지를 상징하는 피아노부품, 레코드 등으로 만들어진 ‘존 케이지’를 제작해 그를 추앙하고 기렸다. 케이지가 1992년 눈을 감았을 때는 추도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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