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⑬] 패티김·길옥윤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재혼… 음악적으로는 환상의 콤비였으나 현실에서는 삶의 방식 다른 게 결별 이유

↑ 함께 공연하는 패티김과 길옥윤

 

by 김지지

 

패티김은 서구적 외모와 시원한 목소리, 깔끔한 무대 매너와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1960~1980년대를 풍미하며 우리 가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카리스마 넘치는 대형 가수였다. 길옥윤은 타고난 감수성으로 3000여 곡을 작곡, 국내 가요의 차원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낭만적 작곡가이자 뛰어난 색소폰 연주자였다.

두 사람은 1966년 결혼하고 딸을 낳은 후 1973년 이혼했다. 그후 다른 상대를 만나 재혼하고 각각 딸을 낳았다. 길옥윤은 1995년 골수암으로 사망하고 패티김은 2012년 은퇴선언 후 더 이상 무대에 서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의 짧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이혼과 재혼 여정을 살펴본다.

 

■ 패티김, 우리 가요사의 한 페이지 장식한 서구형 가수

 

유년시절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

패티김(1938~ )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숙명여전 출신의 신여성이었고 아버지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함경도 출신의 엘리트였다. 패티김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금광을 운영해 집안은 부유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해방 후 신문을 창간하고 사회학술단체를 운영하느라 살림이 어려워졌다.

패티김은 유년시절부터 노래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1955년 입학한 서울 중앙여고 시절에도 교내 행사를 주름잡을 정도로 노래에 재능이 있었다. 학교 내 국악반에서 활동하고 방과 후에는 국립국악원을 다니며 국악콩쿠르에서 1등상을 수상할 정도로 국악에서도 실력이 뛰어났다. 이때 습득한 국악은 나중에 가창력있는 가수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국악에 빠지면 기생 된다”고 말려 국악을 포기했다.

고교시절의 패티김

 

1958년 중앙여고를 졸업했으나 가세가 더욱 기울어 다른 형제들 모두 다닌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준비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서울 명동 거리에서 만난, 패티김이 노래 잘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오빠 친구가 패티김을 베니김에게 소개해주었다. 베니김은 치과 의사 출신의 트럼펫 연주자로 기획사 ‘화양’을 이끌며 미8군 무대에서 활약하는 ‘미8군 무대의 대부’였다. 베니김은 1958년 말, 자신의 아내이자 가수인 이해연과 패티김을 듀엣으로 묶어 미8군 무대의 ‘베니김쇼’에 올렸다. 첫 무대부터 미군들이 내지르는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가 1959년 3월 김혜자라는 본명 대신 ‘린다김’이라는 예명으로 솔로 데뷔해 주로 미국의 팝송인 ‘틸’과 ‘파드레’를 불렀다. 당시 패티김의 키는 다른 여자 가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168㎝였다. 게다가 인형처럼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른 다른 가수와 달리 마이크를 들고 무대를 누비고 다녀 금방 눈에 띄었다. 곧 “키가 크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나왔다”는 소문이 미8군 무대 주위에 퍼졌다.

 

1958년, 미8군 무대 데뷔

패티김은 1960년 조선호텔 외국인 전용클럽의 전속가수로 활동하다가 그해 12월 일본으로 진출했다. 대부분 엔카 가수인 일본에서 팝송을 부르니 자연스럽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패티김이 일본에서 ‘요시야 준(吉屋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길옥윤을 알게 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길옥윤은 이미 일본에서 유명 재즈 뮤지션이었다. 두 사람은 일본 방송에 함께 출연했다. 패티김은 1962년 “미국의 유명 가수 패티 페이지만큼 유명해지라”는 지인의 권유로 이름을 린다김에서 패티김으로 바꿨다.

어느날 한 미국인이 찾아와 미국 진출을 제안했다. 마침 일본에서의 공연이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작곡가 박춘석(1930~2010)이 편곡한 ‘틸’ ‘파드레’ ‘썸머타임’ 등 팝송 번안가요를 독집음반으로 취입하고 박춘석 작곡 ‘초우’는 녹음을 했다.

패티김의 젊은 시절

 

패티김이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63년 3월이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이런저런 라운지에서 노래를 불렀으나 좀처럼 메인쇼 무대에 오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틈틈이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에 조연으로 출연하거나 미국의 유명 TV쇼인 ‘자니 카슨 투나잇 쇼’(8회 출연)를 비롯 다양한 TV쇼에 출연했다.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결국 라스베이거스 생활 1년 8개월만에 뉴욕으로 옮겨 2년간 무작정 오디션을 보러 다녔으나 기회는 여전히 찾아오지 않았다. 수중에 돈은 떨어지고 마음은 지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와 1966년 2월 귀국했다. 길옥윤 역시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듣고 한달 전 일본에서 귀국해 있었다.

 

■ 길옥윤, 낭만적 작곡가이자 뛰어난 색소폰 연주자

 

색소폰 실력 인정받아 일본 NHK 방송무대에서도 활동

길옥윤(1927~1995)은 평북 영변에서 태어났다. 5살 때 큰집 양자로 들어간 후 혼자라는 외로움에다 부모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증오심이 겹쳐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었고 평생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를 멀리했다.

길옥윤은 평양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치과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조부와 부친 모두 의사인 집안에서 길옥윤이 3대째 가업을 이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으나 길옥윤은 의학은 멀리하고 음악에 몰두했다. 1946년 대학생 그룹 ‘핫팟’을 결성, 베니김의 미8군쇼단에 입단해 연주생활을 시작했다. 어찌어찌 치과대를 졸업한 후 음대로 편입하려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길옥윤 색소폰 연주 음반

 

그러자 음악을 하기 위해 1950년 1월 일본으로 밀항했다. 초기에는 다른 악단의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3년 정도 지나 ‘길옥윤과 크루 캐츠’란 악단을 결성했다. 이름은 본명인 최치정 대신 ‘요시야 준(吉屋潤)’이라는 예명으로 바꾸었다. 길옥윤은 일본인에게도 문턱이 높다는 NHK와 TBS-TV 방송무대에 설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자 도일 10년만인 1960년 재일교포 예능인으로 구성된 캄보밴드를 인솔해 국내에서 연주회를 열었다. 1962년 부친이 타계했을 때도 일시 귀국해 음악회를 열고 자신이 작곡한 ‘내 사랑아’를 미8군 가수 현미에게 선물했다. 당시 현미는 무명의 색소폰 주자 이봉조와 연애 중이었다. 현미가 음반으로 취입한 이 노래는 길옥윤의 국내 첫 작곡 데뷔곡이었다.

 

■ 귀국(1966년) 후 함께 공연하다가 서로에게 호감 느껴

 

길옥윤, 자신의 심정 담은 ‘4월이 가면’ 노래로 프러포즈

1966년 2월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패티김은 얼굴없는 가수로 이미 국내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1962년, 박춘석이 편곡한 ‘틸’ ‘파드레’ 등 팝송 번안가요를 앨범으로 내고, 박춘석 작곡 ‘초우’를 녹음하고 간 것이 라디오에서 계속 흘러나와 대중의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길옥윤과 패티김이 연이어 귀국하자 방송마다 두 스타를 함께 묶는 특집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인터뷰를 할 때도 두 사람을 같이 불렀다. 패티김이 새롭게 발표하는 노래는 계속 히트를 치고 공연은 매진되기 일쑤였다. 색소폰을 부는 길옥윤의 모습도 매력적이어서 두 사람은 함께 공연을 할 때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길옥윤은 당시 일본에 동거녀가 있었으나 당찬 모습의 패티김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러나 패티김은 1966년 4월이 지나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날이 다가오자 길옥윤은 애가 탔다. 그때의 심정을 담은 노래 ‘4월이 가면’을 작곡해 4월 어느날, 늦은밤에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들려주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 사랑한다면 가지를 말어 /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 헤어보면은 애절도 해라’(후략) 패티김은 길옥윤이 내성적이라 표현을 못 하니까 노래로 프러포즈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4월이 가면’은 4월 말 발매된 패티김의 음반에 수록되었다. 음반에는 박춘석이 편곡한 기존의 번안곡 12곡에 길옥윤과 박춘석이 작곡한 6곡이 수록되었다. 그중에서도 빵 터진 노래는 ‘4월이 가면’이었다. 패티김은 길옥윤이 연주와 작곡을 하고 자신이 노래하면 최고의 커플이 될 것으로 생각해 출국을 포기하고 길옥윤의 정식 프러포즈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길옥윤이 패티김 눈치만 보자 패티김은 위문공연 차 동승한 버스 안에서 길옥윤에게 “결혼하자”고 먼저 제안했다. 두 사람은 6월 7일 약혼했다. 패티김은 8월부터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 ‘패티와 이 밤을’ 진행하고 10월에는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주연을 맡아 동명의 주제가를 히트시켰다.

 

■ 짧은 결혼생활과 별거 그리고 7년만의 이혼

 

문제는 길옥윤의 음주벽과 성격차

두 사람은 1966년 12월 10일 워커힐호텔에서 수많은 하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성대하게 올렸다. 주례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이, 사회는 ‘후라이보이’로 유명한 곽규석이 맡았다. 김종필은 “날 때부터 우는 아기 대신 노래하는 아기를 낳으라”고 당부해 장내를 메운 하객들을 웃겨주었다. 당시 길옥윤은 39살, 패티김은 11살 적은 28살이었다.

결혼사진(왼쪽)과 하객에게 선물한 결혼기념음반 사은품. 패티김이 부른 ‘사월이 가면’과 ‘사랑의 세레나데’가 수록되어 있다

 

부부 콤비의 활약은 결혼 후 더욱 왕성했다. 무엇보다 패티김의 가창력, 패티김이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옥윤만큼 더 잘 아는 이는 없었다. ‘서울의 찬가’, ‘못잊어’ 등 주옥같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발표곡 대부분 길옥윤이 작곡했다. 둘이 합작한 노래는 100여곡이고 크게 히트한 것만 30~40곡이었다. 이로써 색소폰 연주자로 유명했던 길옥윤은 패티김이라는 가수를 만나 ‘작곡가 길옥윤’으로 재탄생했다. 두 사람은 1968년 첫딸 정아를 낳았다.

패티김과 길옥윤 사이에 태어난 딸(정아)의 돌 때 사진

 

노래든 결혼생활이든 모든 것이 순탄해보였다. 문제는 길옥윤의 음주벽이었다. 결혼 전에도 술에 쩔어 살았지만 결혼 후에도 술자리가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실상 알콜 중독이었다. 패티김에 따르면, 결혼 후 길옥윤이 맑은 정신으로 집에 들어온 날이 거의 없었다. 포커를 치다가 며칠씩 안들어올 때도 있었다.

패티김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음악적으로는 환상의 콤비였지만 현실 부부로서는 아니었다. 그는 만취해 늘 업혀 들어오곤 했다. 별명이 ‘길삿갓’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권하면 먹고 마시고 잠자고 했다. 서로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그런 후회가 있었다. 그는 결혼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 간의 서로 다른 성격도 갈등을 부채질했다. 길옥윤은 낙만적이고 방랑하는 성격에 술을 좋아한 반면 패티김은 의지가 굳고 침착했으며 계획성이 강했다. 길옥윤이 술을 좋아하는 낙천가이자 하루하루 즐기는 스타일이었다면 패티김은 1년이든 10년이든 계획한 대로 벗어나지 않고 사는 스타일이었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도 유명한 패티김에 대해 길옥윤은 자신의 자서전, ‘이젠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1995년)’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밤에 갑자기 정전이 되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도 패티김은 침착하게 옷은 물론 양말에 목도리, 심지어 패물까지 모두 찾아 걸치고 나설 수 있는 여성”이라고. 패티김은 이런 길옥윤이 너무 화가 나지만 쉽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아이가 있는데다 자존심과 체면 때문이었다.

1967년 5월1일 베트남에 파견된 비둘기 부대 장병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길옥윤·패티김 부부

 

이혼 발표 기자회견 후 ‘이혼식’ 신조어 생겨

이런 와중에 길옥윤이 연이어 사업에 실패하자 두 사람은 1970년 9월 별거에 들어갔다. 길옥윤은 재즈를 배운다며 1971년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별거 중이던 1972년 길옥윤이 미국에서 패티김에게 전화를 걸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 한곡을 들려주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 냉정한 사람이지만 /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 둥근달을 쳐다보며는 /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 지난날을 후회할 거야 / 산을 넘고 멀리 멀리 헤어 졌건만 /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패티김은 노래 제목을 ‘이별’로 정해 1972년 취입했다. 노래가 발표되자 부부의 이별을 암시한 것이라며 사람들이 수군댔다. 전국의 연인들은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덕분에 노래는 그해 가요계를 휩쓴 최고 히트곡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73년 9월 5일 조선호텔에서 이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이혼발표인데도 사회자(곽규석)까지 있었다. 그후 이혼식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이혼 후 패티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패티김이 착한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나쁜 여자이고 길옥윤은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길옥윤을 발로 차고 외국 남자하고 연애하다 헤어졌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나 패티김은 이혼 사유를 밝히지 않고 그냥 성격차라고만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헛소문이 잦아들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자존심도 지키고 싶었고 길옥윤의 자존심도 지켜주고 싶었다. 다행히 길옥윤이 “모든 원인은 나한테 있다”고 패티를 두둔했다.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한동안은 음악작업을 함께 했다. 1974년 6월 제4회 도쿄 국제가요제에 ‘사랑은 영원히’로 함께 출전해 3위에 입상했다. 이 무대를 끝으로 길옥윤은 일본에 남았고 패티김은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 박춘석과는 이혼 후 다시 콤비로 합쳐

 

“어린애가 장난감을 뺏긴 기분, 자기 애인을 뺏긴 기분이었을 것”

길옥윤과 패티김 콤비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다. 그러다보니 패티김에게 첫 곡(초우)을 주며 도움을 주었던 박춘석과는 멀어졌다. 패티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박춘석의 심정을 이렇게 추정했다. “어린애가 장난감을 뺏긴 기분, 자기 애인을 뺏긴 기분이었을 겁니다. 예술하는 사람은 자기 하는 일에 대한 욕심이 많고 질투가 많죠. 나중에 알고 보니 길옥윤씨는 다른 작곡가가 내게 보내온 곡을 다 돌려보냈죠. 박춘석 선생님도 제게 곡을 주고 싶었지만 아마 줄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길옥윤씨는 내게 자신의 곡만 부르게 했으니까요. 실제 그걸로도 넘쳐났지요.” 박춘석과의 사이에 전혀 이성적인 감정은 없었냐는 질문에는 “한창 젊은 남자가 싱싱한 여자를 보고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하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하지만 저는 못 느꼈어요.”라고.

패티김과 박춘석

 

패티김은 길옥윤과 이혼한 뒤 박춘석과 다시 콤비로 합쳤다. 패티김은 그 순간을 또 이렇게 설명했다. “박춘석 선생님은 속으로 ‘내가 패티를 다시 갖게 됐구나’ 하며 반가워했을 겁니다. 자신의 클래식한 곡을 나만큼 소화해주는 가수는 없었으니까요. ‘못 잊어’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가시나무새’ 등이 모두 70년대 중반 이후에 나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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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혼… 그리고 다시 전성기

 

두 사람, 재혼 후 더욱 활발하게 활동

패티김이 비난과 오해 속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녀의 열렬한 팬이라는 외국인이 접근했다. 미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동갑내기 아르만도 게디니였다. 그가 패티김을 알게된 것은 사업차 한국을 드나들면서였다. 게디니는 호남형에 유머러스한 남자였다. 패티김이 학을 뗀 술은 아예 입에 대지 않았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어느날 게디니가 노란장미 100송이를 보내왔다. 이후에도 50일간 매일 장미꽃을 100송이씩 보내왔다.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자 게디니가 “당신이 아이를 낳아주면 아이 몸무게 만한 보석을 선물하겠다”며 청혼했다. 패티김이 청혼을 받아들여 두 사람은 1976년 2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패티김이 그해 12월 딸(카밀라)을 낳자 게디니는 청혼할 때 약속했던 대로 7.5캐럿 사파이어를 선물했다. 다시 안정을 찾은 패티김은 1978년 국내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패티김 가족. 왼쪽부터 카밀라, 패티김, 정아, 게디니

 

패티김은 국내 대중가수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것 말고도 최초가 많다. 마이크를 손에 들고 무대에서 부른 한국 최초 가수였고 1960년 일본 NHK 방송무대에 섰던 한국가수 1호였다. 1966년 우리나라 최초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의 첫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가수였으며 1967년 TBC에서 자기 이름을 내걸고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최초 가수였다. 1989년 한국가수 최초로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가진 것도 패티김이었다.

길옥윤은 일본에 머물며 침체와 우울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다 1976년 다시 의욕을 되찾아 신인발굴에 나섰다. 그때 발굴한 가수가 무명의 혜은이였다. 길옥윤은 1976년 작곡한 ‘당신은 모르실거야’로 혜은이를 정상에 올려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길옥윤으로서는 음악인생의 제3악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길옥윤과 혜은이 콤비는 1977년 발표한 ‘당신만을 사랑해’로 MBC 주최 제1회 서울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그해 10대가수가요제 최고인기가수상, 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상 등 중요한 상도 모두 휩쓸었다.

혜은이는 1978년 제1회 태평양가요제에서 ‘영원히 당신만을’으로 금상을 수상해 스타의 위치를 굳혔다. 이후 ‘제3한강교’(1979년)를 비롯 ‘진짜진짜 좋아해’, ‘새벽비’, ‘뛰뛰빵빵’, ‘감수광’ 등 히트 행진을 이어갔다. 길옥윤은 이런 음악적 성공에 힘입어 다시 국내로 돌아와 음악활동을 펼쳤다. 혜은이와 염문설이 돌았으나 길옥윤은 극구 부인하다가 1980년 24세 연하의 여성과 결혼해 딸을 얻었다.

혜은이 음반

 

■길옥윤의 죽음과 패티김의 은퇴

 

죽기 1년 전, SBS ‘길옥윤 이별 콘서트’ 특별 생방송에 패티김도 출연

길옥윤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자 198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이 되어 작가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폐회식 음악을 작곡하는 등 음악활동에 전념했다. 사업에도 뛰어들었으나 또다시 실패해 1988년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러는 중에도 1992년 남태평양 마샬공화국의 국가를 작곡했다.

그러다가 1994년 5월 골수암으로 일본의 집앞 계단에서 쓰러져 병상에 누웠다. 이 소식을 들은 패티김은 “길옥윤이 일본에서 초라하게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했다. 그 덕에 길옥윤이 귀국하자 패티김은 또다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길옥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며 1994년 6월 19일 SBS에서 ‘길옥윤 이별 콘서트’ 특별 생방송을 하도록 손을 썼다. 길옥윤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진행된 콘서트 무대에는 파경 이후 공석에서 길옥윤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던 패티김도 출연해 ‘4월이 가면’ ‘사랑은 영원히’ 등 5곡을 열창했다.

패티김이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오른 길옥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출처 방송캡쳐)

 

길옥윤은 골수암으로 쓰러진 후 지난날을 기록한 원고를 가지고 1995년 2월 자서전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가 없다’를 출간했다. 그러나 결국 1995년 3월 17일 한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병상에서 작곡한 ‘인형의 노래’ 등 신곡 8곡과 ‘4월이 가면’, ‘이별’ 등 옛 노래 2곡은 그가 죽고 한 달 뒤인 1995년 4월 패티김이 부른 유작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길옥윤이 죽기 전 병상에서 입버릇처럼 “나의 곡을 가장 잘 부를수 있는 사람은 패티김”이라는 말을 한 것을 전해듣고 패티김이 받아들인 것이다. 패티김은 2012년 2월 15일 기자회견에서 “6월부터 1년간 국내외에서 진행될 고별 공연을 끝으로 가수를 은퇴하겠다”며 은퇴선언을 했다. 이후 그의 공연을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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