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대만의 금문도(金門島)… 중국의 30년 포격으로 2000여명이 죽었는데도 섬을 사수한 것은 죽음을 불사한 대만군의 저항과 국민의 의연함 때문이지요

↑ 소금문으로 불리는 금문도 앞 열서도(烈嶼島·레위섬)에서 바라본 중국 샤먼 모습.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철기둥이 해안에 세워져 있다.

 

by 김지지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 의장이 2022년 8월 초 대만을 방문했다가 떠나자 중국의 무인기 19대가 총 12차례에 걸쳐 금문도(金門島·진먼다오)를 위협했다고 대만 언론이 보도했다. 금문도는 대만의 영토이지만 위치상 대만 본섬과는 거리가 멀고 중국 본토와는 지척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서해5도와 자주 비교된다. 금문도에서 지난 70여 년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본다.

 

■1949년 장개석의 대만 천도(遷都)와 금문도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 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국공내전(國共內戰)의 최후 승자는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었다.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이 1949년 3월 23일 수도인 북경에 무혈 입성한 것은 사실상 승세가 공산당으로 기울고 국공내전도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전 세계에 알려준 신호탄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여세를 몰아 장개석 총통이 권력을 쥐고 있는 중화민국의 수도 남경(4월)에 진입하고 항주·상해·서안(5월) 등을 점령했다. 8월에는 호남·호북·복건성을, 10월에는 광동성 등 화남 지역 등을 장악했다. 모택동은 대륙의 주요 지역 대부분이 손아귀에 들어오자 10월 1일 북경의 천안문 누각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모택동으로서는 홍비(紅匪)로 몰려 22년 동안 중국 전역을 떠돌며 2만 5000리 장정 등 생사를 넘나든 투쟁 끝에 이뤄낸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장개석은 대만(타이완)으로 후퇴할 준비를 하면서도 대만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만과 마주보고 있는 복건성의 하문도(廈門島·샤먼다오)와 금문도(金門島·진먼다오), 그리고 금문도 북쪽의 마조도(馬祖島·마쭈다오) 등의 섬들은 어떻게든 지키려 했다. 언제든 대륙 반격의 교두보로 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특히 하문도와 금문도는 청나라에 저항한 명나라 장수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清復明)’ 운동의 거점으로 삼았을 만큼 전략적 요충지였다. 두 섬은 워낙에 가까워 ‘형제섬’으로 불리며 서로 교류가 많았다.

장개석은 1949년 8월 중화민국군 수만명을 금문도와 하문도 등에 주둔시키며 “죽음을 불사하고 두 섬을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하문도가 10월 17일 인민해방군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중화민국군이 사수할 곳은 금문도와 마조도 등 몇몇 섬뿐이었다. 금문도는 대만 본토에서는 190㎞나 떨어져 있지만 복건성 남단 하문(샤먼)에서는 수㎞에 불과했다. 면적은 울릉도 2배 정도이고 길이는 동서 20㎞, 남북 길이 5~10㎞였다. 마조도는 복건성 연강현에 속한 36개 섬으로 구성된 열도로 남북 54㎞로 길게 뻗어있다.

한편 장개석은 사천성 성도(成都·청두)에서 1949년 12월 7일 대만의 대북(台北·타이베이)으로 천도를 발표하고 12월 10일 성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베이로 날아갔다. 중국에서는 이를두고 ‘국부천대(國府遷臺)’ 즉 ‘중화민국(國) 정부(府)를 대만(臺)으로 옮겼다(遷)’고 표현한다. 장개석은 금문도와 마주도를 본토 수복을 위한 최전방 군사기지로 삼았다. 참고로 대만의 행정지명상 금문도는 복건성 금문현, 마주도는 복건성 연강현에 속한다. 복건성은 중국 34개성 가운데 하나인데 대만에서 복건성을 계속 행정지명으로 쓰는 이유는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복건성은 중국에서 분단된 유일한 성이며, 양안(兩岸) 관계의 최전선으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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