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로버트 피어리 인류 최초로 북극점 도달… 탐사 대원이 먼저 도착했어도 최초는 언제나 탐사대장의 몫

↑ 로버트 피어리

 

23년간의 시도 끝에 북극점 도달이라는 오랜 꿈 이뤄

16세기 이래 서양 각국의 탐험가들이 무수히 도전했지만 수백 명이 목숨만 잃고 누구도 밟지 못한 북극점을 인류 최초로 밟은 탐험가가 있다. 미 해군 중령 로버트 피어리(1856~1920)다. 그는 23년간 8번째 시도 끝에 1909년 4월 6일 마침내 북극점 도달이라는 인류의 오랜 꿈을 이뤄냈다.

피어리는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지리학과 측량학을 공부하고 미 해군 측량대에서 운하건설 측량을 하며 20대를 보냈다. 평생의 탐험 동지이자 조수가 될 매슈 헨슨(흑인)을 만난 것은 1881~1884년 니카라과 운하 탐사 때였다. 피어리는 1886년 헨슨과 함께 그린란드에서 161㎞의 대륙을 횡단했다. 이후 자신감이 생겨 북극점 도달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다. 1891년 또다시 그린란드로 건너가 93일간 2000㎞를 주파하고 그린란드가 섬이라는 것을 밝혀내 일약 미국 제1의 북극 탐험가로 부상했다. 1902년에는 북위 84도 17분 지점까지 갔다가 동상에 걸려 8개의 발가락을 잃는 시련을 겪었어도 북극점을 향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평생의 탐험 동지 매슈 헨슨

 

북극점을 향한 피어리를 위해 1903년 기업가들이 모여 ‘뉴욕 피어리 북극 클럽’을 결성하고 원정 자금을 지원했다. 클럽은 피어리가 탐험용 선박 ‘루스벨트호’를 구입할 때도 도움을 주었다. 피어리는 1905년 루스벨트호를 타고 뉴욕을 떠나 1906년 북극점 탐험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북극점에서 315㎞ 떨어진 북위 87도 6분에서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 인간이 북극점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기록을 인정받아 탐험 분야에 수여하는 미국 최고의 메달인 허버드 메달을 받았다.

50대의 나이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피어리가 또다시 루스벨트호를 타고 뉴욕항을 떠난 것은 1908년 7월 6일이었다. 탐사대는 그린란드 해안에서 겨울을 보내고 1909년 3월 1일 캐나다 북동쪽 엘즈미어섬 컬럼비아곶을 출발했다. 탐사대는 매슈 헨슨과 5명의 대원 그리고 17명의 에스키모로 꾸려졌다. 19대의 썰매와 133마리의 허스키개가 탐사를 위해 동원되었다. 피어리는 한 달 동안 전진한 끝에 북극점에서 245㎞ 떨어진 북위 87도 47분 지점에서, 자신과 헨슨 그리고 4명의 에스키모로 구성된 공격대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원대는 모두 베이스캠프로 돌려보냈다.

루스벨트호

 

문제는 북극이 남극과 달리 육지가 아니고 찬 바다에 떠 있는 큰 얼음이라는 점이었다. 즉 얼음길 자체가 항상 이동하기 때문에 진로를 정할 때 조류의 방향과 속도를 정확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엉뚱한 곳에 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리 탐사대가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한 것은 1909년 4월 6일 오전 10시였다. 피어리는 4월 23일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으나 당시만 해도 통신수단이 없어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5개월이 걸렸다. 북극점 도달 사실이 뉴욕에 알려진 건 피어리가 캐나다 래브라도의 인디언 하버에 도착한 9월 5일이었다.

 

‘북극 최초 발견자 논쟁’에 휘말렸으나 최초는 언제나 탐사대장 몫

미국 언론이 이 사실을 9월 7일자에 대서특필했으나 기사를 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5일 전인 9월 2일자 뉴욕헤럴드 신문에, 프레더릭 쿡(1865~1940)이 1년 전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쿡은 피어리가 1891년 그린란드를 탐험할 때 군의관 자격으로 합류했던 피어리의 오랜 동료였다. 1906년에는 북미 대륙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봉(6,194m)을 등정해 각광을 받았다. 쿡은 1908년 2월 11명의 에스키모, 11대의 썰매, 103마리의 개와 함께 북극점 탐험에 나서 1908년 4월 21일 2명의 에스키모와 함께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도달 사실이 세상에 늦게 알려진 것은 북극점 도달 후 북극 지역의 한 동굴에서 겨울을 보내다 1909년 4월 15일에야 베이스캠프로 돌아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1909년 10월 1일 뉴욕에 도착한 피어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환영이 아니라 ‘북극 최초 발견자 논쟁’이었다. 언론도 둘로 갈려 논쟁을 부채질했다. 뉴욕헤럴드는 쿡을 지지했고 뉴욕타임스는 국립지리학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피어리를 후원했다. 일반 가정에서까지 치열한 설전과 비난들이 오가는 가운데 미국지리학회는 과학적 조사 끝에 1911년 쿡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쿡의 1906년 매킨리 등정도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쿡과의 싸움이 끝나자 이번에는 피어리의 북극점 도달 진위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비판론자들은 당시 피어리가 정확한 위치 측정 기구를 갖고 있지 않았고 북극점 도달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과거 프리드쇼프 난센과 피어리 자신도 하루에 15㎞밖에 전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루 평균 70㎞나 전진했느냐는 지적이었다. 미국지리학회는 다시 면밀한 조사 끝에 당시 위도 계산이 가능했던 최북단 지점은 북위 89도 47분(정북극점으로부터 5㎞ 지점)이며 피어리가 도달한 곳은 바로 그 지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더라도 당시 기술로는 계속 움직이는 북극섬에서 북위 90도인 정북극점을 정확히 찾기란 사실상 쉽지 않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피어리의 북극점 최초 도달은 또 다른 도전도 받았다. 매슈 헨슨이 피어리보다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헨슨의 주장에 따르면 북위 89도 47분 지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헨슨 자신이었고 발가락이 없어 썰매에 의존해야 했던 피어리는 45분 뒤 그 지점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헨슨 말년에 인정을 받아 헨슨은 1948년 미국지리학회로부터 상을 받고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백악관 초대를 받았다. 사후에는 1988년 알링턴 국립묘지 피어리의 묘 옆으로 이장되었고 1996년에는 미국의 해양탐사선에 ‘헨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2000년 미국 지리학회로부터 허버드 메달이 수여되었다. 그렇더라도 피어리를 북극점 최초 도달자의 지위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은 늘 그랬듯 최초는 언제나 탐사대의 대장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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