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알렉산더 플레밍, ‘기적의 약’ 페니실린 발견

↑ 알렉산더 플레밍

 

20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약 가운데 으뜸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이 여름휴가를 마치고 자신이 근무하는 영국의 세인트 메리병원 연구실로 돌아온 것은 1928년 9월 3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실험실 책상 위에 쌓아둔 포도상구균 배양 접시에 휴가를 떠날 때는 없던 푸른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푸른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말라 죽어 있었던 것이다. 훗날 밝혀지지만 푸른곰팡이는 곰팡이의 알레르기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던 아래층 실험실에서 바람을 타고 위층 플레밍의 연구실로 날아온 것이다.

플레밍은 이 불가사의한 곰팡이의 정체 규명에 나섰다. 곰팡이를 배양해 새로운 액체 배지(식물이나 세균, 배양 세포 따위를 기르는 데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액체나 고체)에 옮기고 1주일이 지나 배양액을 희석한 뒤 배양액에 포도상구균을 넣었다. 그러자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되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곰팡이에서 나오는 어떤 물질이 살아 있는 세균을 파괴하는 강력한 항균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플레밍은 그 곰팡이가 페니실륨 속(屬)에 속한다는 것에 착안해 곰팡이가 생산하는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계속된 연구와 실험을 통해 페니실륨 속에 속하는 곰팡이 중 페니실륨 노타툼을 비롯한 몇 종류만이 페니실린을 생산하고 나머지는 페니실린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페니실린이 폐렴, 매독, 임질, 디프테리아, 성홍열을 일으키는 세균에도 항균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백혈구와 세포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수백 배로 희석해도 효능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20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약 가운데 으뜸이자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는 페니실린의 존재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페니실린의 존재를 밝혀낸 것은 행운의 연속

이 위대한 업적의 주인공인 플레밍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영국의 런던으로 이주해 고교를 졸업하고 런던의 세인트 메리병원 의과대에 입학했다. 1906년 졸업 후에는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의사 겸 연구자로 근무하다가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부르고뉴 근처 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는 병원에서 감염으로 죽어가는 군인들을 지켜보면서 치료제가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소독법이 민간병원에서는 상당히 효과적이지만 전장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플레밍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상처를 무균 식염수로 씻어내면 감염을 최소화하고 감염증과 싸우는 백혈구를 대량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연구 덕에 많은 장병이 목숨과 팔다리를 구했다.

플레밍은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을 위한 항균 물질을 찾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중 1921년 어느 날 그의 콧물 한 방울이 황색 세균으로 가득찬 배양접시에 떨어졌는데 콧물이 떨어진 부분만 세균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콧물 속 무엇인가가 항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플레밍은 그 분비물 중의 활성 물질이 공기를 매개로 침입하는 세균을 막아주는 인체의 자연 방어 기능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고 콧물에 함유되어 있는 그 물질을 ‘라이소자임’이라고 명명했다. 그리스어로 녹인다는 의미의 ‘라이소’와 효소를 의미하는 ‘엔자임’의 어미를 딴 것이다. 그후 플레밍은 콧물은 물론 눈물, 침, 고름, 달걀 흰자 등에도 라이소자임이 들어 있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은 인간에게 무해한 박테리아는 죽이면서도 질병을 야기하는 박테리아는 죽이지 못했다. 더구나 플레밍은 병리학자나 생화학자가 아니었기에 라이소자임을 추출하거나 작용 메커니즘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로부터 6년 뒤 페니실린의 존재를 밝혀냈으니 행운의 연속이었다. 이 때문에 플레밍의 연구 성과를 두고 “행운과 우연의 모자이크”라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으나 플레밍은 “나는 페니실린을 발명하지 않았다. 자연이 만들었고 난 단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단 하나 내가 남보다 나았던 까닭은 그런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균학자로 대상을 추적한 데 있다”라고 여유 있게 응수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 농도와 시간에 따른 항균력을 측정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항균력이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졌다. 이것은 페니실린의 상업화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불순물이 없는 페니실린을 좀처럼 정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0년 후

플레밍은 1929년 2월 런던의학 연구모임에서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1929년 5월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 관심을 보인 연구자는 없었다. 곰팡이 배양액이 항균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구자들이 궁금했던 것은 세균을 죽이기 위해 몸에 다른 세균을 넣어도 되는 건지, 그게 효과가 있는 건지 여부였다.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플레밍의 연구에 환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플레밍 역시 계속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플레밍의 발견은 한동안 잊혔다.

페니실린이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였다. 호주 출신의 옥스퍼드대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와 독일 태생의 유대계 생물학자 언스트 체인이 1940년 3월 불순하긴 하지만 극소량의 페니실린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플로리와 체인은 1940년 5월 감염된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성공하자 1940년 8월 첫 논문을 발표하고 1941년 2월 첫 임상 실험에서 효능을 증명해 보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과 함께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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