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일제의 제암리 학살 만행

↑ 독립기념관에 있는 제암리 학살 사진

 

3월 26일 화성 지역 첫 대규모 만세운동 일어나

서울에서 점화한 3·1 만세운동이 경기도 화성에서 본격 발화한 것은 1919년 3월 말이었고 화성 지역에서 첫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송산면이었다. 200여 명의 송산면 주민들은 3월 26일 면사무소로 몰려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과 면서기들을 면사무소 앞마당으로 끌어내 만세를 부르게 했다. 송산면 사강리 장날인 3월 28일에는 7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총칼로 저지하는 일본 순사를 돌과 몽둥이로 살해했다.

화성군의 항쟁은 향남면 발안 장날인 3월 31일에도 계속되어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벌이며 발안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본 순사가 시위대를 향해 위협 사격을 가하자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곧 시위 현장에 도착한 일본군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시위를 주도한 이정근 등 3명이 살해되었다. 흥분한 시위대는 일본인 가옥과 상점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질렀다. 일제는 발안 장날 시위 후 헌병·경찰 혼성부대를 진압부대로 편성했다.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4월 1일과 2일 밤 쌍봉산 등 80개 산 위에서 야간 봉홧불 시위를 벌였다. 불안해진 일본인들은 부녀자 43명을 30리 밖의 삼계리로 피신시켰다.

4월 3일에는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이 연합한 화성군 최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장암면 수촌리 주민이 주도한 이 만세운동에는 4일 전 발안 장날 때 만세운동을 주도한 향남면의 제암리와 팔탄면의 고주리 주민도 다수 참가했다. 이날 시위는 천도교 전도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이 이끌었다. 2,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장안·우정면사무소로 몰려가 방화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다. 김교철 등은 일본인 순사를 살해하는 데 앞장섰다. 이후 일제의 토벌 작전이 더욱 거칠어졌으나 수촌리·제암리·고주리 주민을 중심으로 한 800여 명의 군중은 4월 5일 발안 장날 때 또다시 일본 경찰을 향해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때 일본군이 휘두른 총칼에 또다시 여러 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4월 제암리 학살 사건 직후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만행 현장 사진

 

교회에 가둔 후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23명 학살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군은 화성군 일대를 돌며 시위 군중을 체포했다. 4월 5일 한밤중에는 시위의 진원지로 파악한 수촌리를 급습했다. 초가집마다 불을 지르고 집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무차별로 체포했다. 그날 일본군이 저지른 방화로 수촌리 마을 전체 42채 가운데 38채와 만세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수촌리 교회가 불에 탔다. 일본군은 4월 11일 또다시 수촌리로 가서 나머지 4채마저 불태우고 김교철을 검거했다. 일본군은 장안면과 우정면의 25개 마을에서도 200여 명의 주민을 체포했다. 일본 헌병 측 자료에 따르면 4월 2일부터 14일까지 8개면 29개 마을에서 소실된 가옥이 348채, 사망자 46명, 부상자 26명, 검거 인원 442명에 이른다. 그래도 일제는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4월 13일 보병부대를 증파했다. 그들이 볼 때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례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한 제암리와 고주리의 주모자들은 아직 체포하지 못해 불안 요소로 남아 있었다.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지휘하는 보병 11명, 일본인 순사 1명, 한국인 순사보가 제암리 마을에 도착한 것은 4월 15일 오후였다. 일본군은 “지난 발안 장터 만세 사건 때 시위대를 심하게 다룬 것을 사과하려고 하니 16~58세의 기독교·천도교 남자는 모두 제암리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곧 20여 명의 성인 남자들이 교회로 모이자 교회 밖에 있던 일본군이 교회 안으로 총을 난사했다. 교회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은 물론 이 광경을 보고 남편을 살려 달라며 애원하는 2명의 여성도 칼로 찔러 살해했다. 다행히 1명은 교회 밖으로 탈출해 산으로 피신했다.

교회는 석유를 끼얹어 불태웠고 인근 초가집들은 바람을 타고 옮겨 온 불로 대부분 불에 탔다. 그날 희생된 주민은 23명이었다. 천도교인이 11명, 기독교인이 10명, 종교 미상이 2명이었다. 마을 전체 33채 가운데 외딴집 2채만 남고 31채는 모두 불에 타 초토화되었다. 일본군은 곧 이웃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도 살해했다. 목격자들은 이 만행으로 사람과 가축·곡식 등이 타는 냄새가 10㎞까지 퍼져 나갔다고 증언했다.

 

스코필드, 일제의 잔학 행위 보고서를 작성해 요로에 전달

국내에서 활동하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먼저 접한 일제의 만행은 4월 5일의 수촌리 방화였다. 교회를 포함해 마을 전체가 불타고 교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장로회 선교사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원한경)가 미국 영사 레이먼드 커티스, AP통신 서울특파원 기자 앨버트 테일러와 함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달려간 것은 제암리 학살 이튿날인 4월 16일이었다. 그런데 일행은 수촌리로 가던 중 바로 전날 제암리 마을에서 학살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살아남은 제암리 주민들에게서 잔혹했던 사건에 관한 생생한 증언을 듣고 현장을 둘러보며 분노했다. 일행은 서울로 올라와 수촌리 방화와 제암리 학살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 활동하는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4월 18일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해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그것을 토대로 일제의 잔학 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요로에 전달했다. 당시의 참혹상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잿더미로 변한 마을 현장 사진들은 대부분 스코필드가 일본 경찰 몰래 촬영한 것이다. 4월 19일에는 영국의 대리영사 W.M. 로이즈와 미국 감리교 소속 아서 노블 선교사가 현지를 방문해 실상을 조사했다. 이들 선교사들의 보고서는 미국·캐나다·영국 등의 교회로 전달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졌다.

남편과 자식을 잃은 제암리 교회 희생자 유가족들이 불에 타버린 교회 앞뜰에서 넋을 잃고 있다.

 

아서 노블 선교사의 부인인 마티 노블은 “제암리 교회 학살 말고도 화성군 일대 16개 마을, 5개 교회에서 비슷한 만행이 자행되었다”고 일기(1919.4.19)에 기록했다. 자신이 작성한 ‘수원 지역 구조 활동 보고서’에서는 326채의 집이 불탔고 1,6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39명이 살해된 것으로 기록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진상을 파악하고 국내외에 만행 사실을 전파하자 일제도 마냥 부인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는 4월 18일자 일기에 “서울 남방에서 일본군이 약 30명을 교회에 가두고 학살·방화했다”며 학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대로 하고 처분하면 간단하지만 학살과 방화를 자인하는 꼴이 되어 제국의 입장에 심대한 불이익이 된다. 이 때문에 간부회의에서 조선인들이 저항해 살육한 것으로 하되 학살과 방화 등은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며 사건 은폐가 있었음을 시인했다. 일제는 이 같은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군사재판에 회부된 아리타 중위에게 1919년 8월 21일 무죄를 선고했다. 행위는 유죄이지만 임무 수행상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의 행위를 처벌할 규정이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오늘날 ‘제암리 학살 3·1 운동 순국 기념관’이 밝히는 공식 희생자 수는 제암리 23명, 고주리 6명이다. 다만 당시 일본군 보고서에는 희생자가 약간씩 다르게 나온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는 일본 육군대신에게 사망자 32명, 부상자 약간 명, 방화 가옥 28채라고 보고하고,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하라 다카시 총리에게 기독교와 천도교도 25명을 사살하고 28채가 불에 탔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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