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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고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자”
장폴 사르트르(1905~1980)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연인이자 친구였고, 동지이자 스승이었으며 경쟁자이자 공모자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프랑스 소르본대 시절이던 1929년 7월에 이뤄졌다.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하던 두 사람은 그해 나란히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시험에 합격, 지적인 상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먼저 프러포즈를 한 쪽은 사르트르였다. 1929년 두 사람은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으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는 2년간의 결혼계약을 맺었다. 키가 158㎝밖에 되지 않는 사르트르에 비하면 보부아르는 호리호리한 금발로 사르트르보다 머리 하나가 컸다. 더구나 사르트르는 4살 때 독감에 걸려 오른쪽 눈을 사용하지 못하는 외눈박이였고 외모도 볼품이 없었다. 그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뛰어난 머리와 지식이었다. 그래도 “나보다 완전하고 나와 닮은꼴”을 찾던 보부아르에게는 사르트르가 이상형이었다.

사르트르는 처음 보부아르를 만났을 때 “여러 여자와 자고 싶다”는 욕망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자신의 신조는 “여행, 일부다처, 투명성”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의 사랑을 허용하는 대신 모든 사실을 숨김없이 털어놓자는 파격적인 계약결혼을 제안했을 때 두 사람은 “우리는 본질적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살아가면서 경험하게 되는 우발적인 사랑의 감정을 거부하지 않는 것 역시 좋은 생각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며 계약결혼을 정의했다. 그러나 계약결혼의 자유분방함으로 두 사람의 애정 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하게 얽혔고 이 때문에 보부아르가 받은 상처가 컸다.
보부아르를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의 맞바람을 알고도 사르트르가 보인 냉담과 무관심
사르트르는 어려서부터 여자를 좋아한 마초(남성 우월주의자)였다. 툭하면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 평소 “사랑은 여성 최대의 덫”이라는 주장을 펴온 보부아르였지만 그녀 역시 나름의 연애 철학을 내세워 맞바람을 피웠다. 사르트르의 여자 중 보부아르의 제자가 많았다는 점에서 보부아르는 결과적으로 뚜쟁이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사르트르는 계약결혼의 조건대로 새로 사귄 여성들을 무덤덤하게 대화와 편지로 보부아르에게 알려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보부아르는 상처를 입었지만 정말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그녀의 맞바람이나 애정 행각을 알고도 사르트르가 보인 냉담과 무관심이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상대 여성 중 한 명을 자신의 첫 장편소설인 ‘초대받은 여자’(1949년)에 등장시켜 소설 속에서 죽여버리기까지 했다.
보부아르에게 심한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한 이는 미국 소설가 넬슨 올그런이었다. 올그런 앞에만 서면 보부아르는 작아졌고 사랑의 본능에 호소하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보부아르는 1947년 미국 방문 중에 이혼남이자 좌파 지식인이던 올그런을 만나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물론 사르트르도 그 무렵 프랑스를 방문 중인 한 미국 여성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보부아르는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올그런과의 육체적 결합을 방해하는 대서양을 탓하며 수시로 연정의 편지를 보냈다. 올그런의 답장도 뜨거웠다. 편지로만 보면 보부아르는 여성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전투적 여성이라기보다 이제 막 사랑에 눈뜬 농염한 여인네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17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1964년 올그런의 요청으로 관계를 끊었다.
사르트르는 죽는 날까지 여자 문제로 보부아르를 괴롭혔다. 사르트르가 1965년 그의 애인 중 한 명을 비밀리에 딸로 입양해 자신의 저작권을 포함한 모든 것과 자신의 원고를 사후에 출간할 권리를 모조리 애인에게 건네준 것이다. 그런데도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그림자로부터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보부아르에게는 자신의 말대로 “순수한 의식이며 자유 그 자체”인 사르트르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창작의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1945년 10월 사르트르가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현대’지를 창간할 때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길거리 투쟁에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원고를 가장 먼저 읽고 검토하는 사이였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쓴 ‘작별 의식’(1981년)만이 보부아르가 쓴 책들 가운데 출간되기 전 사르트르가 읽어보지 못한 유일한 책이었다.
‘제2의 성’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역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해 자칫 사르트르의 아류로 평가받을 수도 있었으나 사르트르의 그 어떤 저작물보다 더 위대한 불후의 명저를 남기면서 비로소 독립된 존재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그것은 1949년 6월에 출판된 에세이집 ‘제2의 성’이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적·사회적 영향에서 생겨난 결과’로 요약되는 ‘제2의 성’은 신체 조건, 역사, 신화 등 다양한 이론적 관점에서 여성을 고찰한 1권, 유년기부터 성년에 이르기까지 여자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억압되는가를 살핀 2권으로 구성되었다.
정신분석, 유물론, 창녀·레즈비언, 노년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성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백과사전식으로 다룬 이 책의 기본 명제는 “여성은 남성을 주체로 한 문명에 의해서 ‘타자’이자 2차적인 존재로 취급되고 있는 존재”라는 주장이었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 ‘성경의 이념도 남성의 여성 장악에 적지 않게 기여’ 등 당시의 전통적 규범으로는 감히 입에 올리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다 보니 여성에겐 자아를 일깨우는 각성제 역할을 했으나 종교계와 남성들에겐 묵과할 수 없는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알베르 카뮈는 “프랑스의 수컷을 조롱했다”고 비난을 퍼부었고, 교황청은 금서 목록에 올렸으며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포르노”라고 혹평했다. 좌파들마저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며 몰아붙였다.
남성들의 이런 비판과 혹평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출간 1주 만에 2만 부를 구입해 열렬한 호응으로 화답했다. 1953년에 나온 영역본이 200만 부 이상 팔리는 등 전 세계적으로도 열풍을 일으켜 1960년대에 몰아친 제2차 여성해방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이후에도 자전적 4부작 ‘얌전한 처녀의 회상’(1958년), ‘나이의 힘’(1960년), ‘사물의 힘’(1963년), ‘총결산’(1972년) 등을 통해 자신의 삶은 물론 프랑스 현대 지성사의 한 시대를 기록했다.

1970년대부터는 여성해방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낙태와 피임 자유화, 노동 현장에서의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 가정 폭력 근절 등을 위해 앞장섰다. 1998년 ‘타임’지는 20세기에 인간의 삶과 정신을 바꿔놓은 10대 논픽션 중 한 권으로 ‘제2의 성’을 선정, 위대한 여성 보부아르에게 경의를 표했다. 프랑스도 2006년 7월 파리의 센 강에 세워진 37번째 다리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보부아르의 이름을 붙여 업적을 기리고 있다.

사르트르, 기존 질서를 생래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반항적 지식인’
사르트르는 1943년 6월 실존주의 철학서 ‘존재와 무’를 출판했다. 당시는 2차대전 중이라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지는 못했으나 종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실존주의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불과 몇 년 만에 전염병처럼 전 세계로 번져갔기 때문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실존주의와 사르트르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쟁 전부터 세계는 정치적 광기와 억압을 겪어왔고 전쟁 중에는 잔혹한 파괴와 대량 학살을 체험했다.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실존주의가 홀연히 나타나 황폐한 삶에 불을 지핀 것이다. 실존주의는 당시 사람들에게 철학적 계시이자 은총이었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의 교주로 인식되고 또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추앙받은 것은 1945년 10월에 일어난 일련의 두 가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5년 10월에 창간된 ‘레탕모데른(현대)’지의 등장은 ‘사르트르 신화’의 시작이었다. 사르트르가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레몽 아롱, 모리스 메를로퐁티, 시몬 드 보부아르 등 당대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현대’지는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현대’지 창간이 프랑스 지성사에 특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 것은 사르트르가 ‘창간호에 부치는 글’에서 “작가는 자기 시대에 책임을 져야 하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데 있었다. 이를테면 “참여문학이 시대적 사명”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것은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변화였다. 사르트르는 전쟁 전까지 사회 현실보다는 개인의 문학적·철학적 작업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이런 사르트르가 현실 참여로 선회한 것은 2차대전 때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 석방 후에는 소극적으로나마 레지스탕스로 나치에 저항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1945년 10월 29일 저녁 파리의 상트로 강당에서 열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는 사르트르의 강연회도 사르트르의 붐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 상트로 강당에는 파리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수십 명이 부상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그날의 강연이 있기 전부터 가톨릭은 실존주의에 대해 “인간의 상스러움을 강조하고 추함을 과시하는 철학”이라고 공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색 철학, 사치 철학, 부르주아 철학”이라고 비난했다.
사르트르는 강연에서 “실존주의란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해 주는 독트린”, “실존주의는 인간을 행동으로 판단하고, 희망은 오직 행동에 있고, 실천 행위만이 인간에게 삶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이른바 ‘실존주의의 역공’이라 불리는 강연은 이튿날 모든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고 실존주의 철학이 유행처럼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르트르는 이듬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저서에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실존주의를 분명하게 정의했다. 이처럼 1945년은 사르트르가 재탄생하고 ‘사르트르 시대’를 연 첫 해였다.
“전체주의자, 오류의 철학자”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아
사르트르는 마르크시스트 친구가 많고 1948년에는 ‘혁명적 민주주의연합’이라는 좌익정당을 창당하는 데 가담하기는 했으나 공산당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할 무렵부터 급격하게 친 공산당으로 기울었다. 함께 ‘현대’지를 창간한 메를로퐁티와도 결별했다. 메를로퐁티는 한때 ‘진보적 폭력’이란 이론을 만들어 공산당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사르트르가 자신의 자리를 “메를로퐁티의 오른쪽, 카뮈의 왼쪽”이라고 술회케 했던 골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퐁티는 6·25 전쟁 후 소련에 실망하며 공산당을 떠났다.
사르트르는 메를로퐁티와 달리 “미국의 꼭두각시에 의한 북침설”을 내세우며 “6·25 전쟁은 미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회운동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좌파 지식인이 뭉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나의 세계관이 바뀌었다. 반공주의자는 개(犬)다. 나는 죽을 때까지 부르주아에 대해 증오를 품을 것이다”라고 강변했다.

그 무렵은 소련의 강제수용소 존재가 대부분 알려져, 적지 않은 지성인이 공산당을 떠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도 사르트르는 소련을 방문(1954년)하고 중공을 여행(1955년)하는 등 소련과의 관계를 밀착시켰다. 소련에서 돌아와서도 “소련에는 완전한 비판의 자유가 있다” “소련 시민들이 여행하지 않는 것은 훌륭한 나라를 떠날 욕구가 없기 때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당과의 밀월은 1956년 소련의 헝가리 봉기 탄압 사건과 함께 막을 내렸다. 헝가리 사태는 사르트르를 뒤늦게 마르크시즘의 환각에서 깨어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공산당계 지성인이 공산당을 떠나도록 했다.
사르트르의 친공·친소 활동은 그가 체질적으로 반골인 데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 때문에 철학자, 소설가, 희곡작가, 문학비평가, 사회운동가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집합명사로서의 그의 천재성은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데 사용되었다. 그 덕에 역사의 흐름에 시시콜콜히 간섭하고 참여하는 ‘실천적 지식인’ 혹은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이는 뒤집어 말하면 기존의 질서를 생래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반항적 지식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공산당과 결별한 후에도 기존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고 작은 체구에서 찢어지는 듯한 그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제리 독립전쟁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고, 1968년의 5월 학생운동 때는 학생들을 선동·격려했으며, 베트남전쟁 때는 반미를 외쳤다.
1964년에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하고 말년에는 길거리 현장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비록 “철학자로서는 메를로퐁티, 역사를 내다보는 안목에 있어서는 레몽 아롱, 작가로서는 카뮈보다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20세기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당대 평가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1980년 사후에는 “전체주의자, 오류의 철학자”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죽어서도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함께 묻혀 부부보다 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