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22)] 김지미와 네 남자 이야기-후편… 홍성기(영화감독), 최무룡(영화배우), 나훈아(가수), 이종구(의사)와 살아보고 내린 결론은 “남자는 다 똑같이 어린애”
2022년 12월 29일 · zznz

↑ 간통죄로 고소당해 교도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김지미와 최무룡이 웃고있다. ‘악마의 미소’라는 비판을 받았다. (1962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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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두 번째 남자 : 영화배우 최무룡
김지미와 홍성기의 결혼생활이 유지되고 있던 1960년대 초반, 김지미가 영화에서 주로 상대한 남자는 자신보다 12살이 많은 최무룡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며 친해졌다. 촬영이 끝나면 다른 장소로 같이 이동해 촬영하고, 그곳에서도 끝나면 또 다음 장소로 같이 갔다. 거의 온종일 붙어 다니며 영화를 찍고, 좁은 활동반경 속에서 같이 보내고, 컴컴한 촬영소 안에서 러브신을 연기하고, 촬영이 없을 때는 현장에서 서로 속상한 얘기들을 털어놓다보니 정이 들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그 무렵 최무룡의 아내는 10년 전 결혼한 배우 강효실이었다.

▲최무룡-강효실 부부
최무룡(1928~1999)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개성상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연극에 빠졌는데,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한국 최초로 공연한 ‘햄릿’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 영화는 이만흥 감독의 ‘탁류’(1954년 4월 6일 개봉)로 데뷔했다. 최무룡은 맑고 정확한 발성과 강렬한 눈빛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얼굴은 개성이 넘치고, 눈 연기에 관한 한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재능이 넘치고, 연기 기초도 단단했다. 무엇보다 상대 배우의 리액션을 잘 받아주고 상대를 돋보이게 하는 데 탁월했다. 여배우들에게도 신사적이고 매너가 좋은 배우였다. 게다가 엄청난 달변이었다. 영화배우 신성일이 “어쩌면 저렇게 말을 잘 할까”라며 항상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신성일은 “말을 잘 하다 보니 언행일치가 잘 안 되는 게 흠”이라고 지적했다.
강효실(1932~1996)은 평양에서 연극배우 부부인 강홍식과 전옥의 딸로 태어나 평양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모기 이혼해 아버지와 살면서 평양의 국립극단에서 연기를 배웠다. 1950년 6·25가 터져 아버지와 헤어져 홀로 남하한 그는 남한에서 유명한 어머니 덕분에 풍족하게 살며 극단 생활을 했다. 1950년 연극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의 시녀 역을 맡아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그가 속한 신협에는 이해랑 박암 김동원 장민호 황정순 백성희 최무룡 등 당대 유명 배우들이 많았다. 자연히 총각인 최무룡과도 친해치고 사랑의 감정이 생겨 1952년 결혼했다. 강효실은 김기영이 감독하고 최무룡이 연기한 ‘주검의 상자’(1955년 6월 개봉)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추억의 목걸이’(1959), ‘오, 내 고향’(1959), ‘명동에 밤이 오면’(1964) 등 10편 정도의 작품에 출연했다.

결혼 후 강효실은 최무룡이 4대 독자라는 것을 의식해 아들 낳는 것을 의무로 알았다. 그러나 첫 아이는 딸이었다. 게다가 며칠 후 죽어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다시 아이를 가졌으나 또 딸이었다. 이후 세번째도 네번째도 계속 딸만 낳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남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임신한 끝에 1962년 3월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아들을 낳았으니 훗날 영화배우로 성장할 최민수였다.
▲간통과 결혼
아들 최민수가 아직 젖을 떼지 못하고 있던 1962년 5월 무렵 최무룡과 김지미 사이가 보통이 아니라는 소문이 강효실 귀에 들려왔다. 강효실은 김지미를 집으로 불러 사실 여부를 물었다. 김지미는 최무룡과 육체관계가 있었음을 인정하며 용서해달라고 애원했다. 최무룡도 간통사실을 인정했다. 1962년 9월이 되자 최무룡과 강효실이 이혼할 것이라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10월 22일에는 강효실이 최무룡과 김지미를 간통 혐의로 고소했다. 이혼 위자료로 500만원을 청구하는 소송도 제기했다.
김지미와 최무룡은 10월 31일 구속되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초대형 스캔들이어서 도하 각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구속될 때 웃는 사진이 신문에 실려 ‘악마의 미소’라며 연일 화제가 되었다. 훗날 최무룡은 당시의 미소가 회심의 미소가 아니라, 카메라 앞에만 서면 흘러나오는 ‘습관성 미소’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김지미도 옆에서 함께 웃었으니 변명에 불과했다. 검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영화 ‘손오공’을 촬영하러 홍콩에 갔던 1962년 2월 말 그곳 호텔에서 처음 동침한 것을 시작해 귀국 후에도 계속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드러났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김지미는 3월 1일 홍성기와 합의이혼했다.
김지미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홍콩 초기에 우리 두 사람은 남자와 여자 관계가 아니고 존경하고 사랑받는 선후배이자 밤을 새며 함께 일을 하는 동료 사이였다. 홍콩에서 촬영하다 쉴 때 대화하다보니 나도 그랬지만 최무룡의 가정도 별로 원만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가정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똑같은 처지의 남녀가 홍콩에서 함께 지내다보니 홍성기와의 소원한 관계로 외로웠던 내 눈에는 마음 따뜻한 최무룡이 구원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홍콩에서 돌아오니까 우리 관계가 공공연한 스캔들로 번졌다. 나는 이미 이혼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강효실은 격분했다. 아이가 넷이나 있는 가정이 나 때문에 무너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해 강효실을 찾아가 사죄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고소를 당했다.” “그래도 우리가 좋아한다는 것이 곧 결혼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고소를 당하고 보니 결국에는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강효실도 이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결국에는 상황에 밀려 이혼하게 되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어쨌든 강효실의 고소 후 두 사람은 김지미가 위자료 330만원과 강효실의 빚 78만원을 대신 갚아준다는 조건으로 강효실과 합의하고 강효실도 고소를 취하해 구속 1주일 만인 11월 7일 풀려났다. 최무룡은 석방 후 “효실이는 나에게 쇠사슬을 채워주고 지미는 나를 풀어주었다”며 김지미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러면서 “지미에게 물심양면으로 빚을 져서 이젠 우리 두 사람은 결합 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놓여있다”라고 말해 결혼 가능성을 내비쳤다. 당시 위자료 400여 만원은 역대 최고액이었다. 최무룡 대신 김지미가 위자료를 준 것은 최무룡이 돈이 없는 데다 김지미가 출연하거나 출연예정인 영화가 30편이나 되어 김지미가 출연하지 못하면 영화계가 풍비박산 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최무룡은 강효실과 이혼하고 김지미와 합쳤다. 최무룡은 김지미 보다 12살 많았다.
이혼 당시 최무룡-강효실 사이에는 세 딸과 한명의 아들이 있었고 김지미-홍성기 사이에는 딸 한명이 있었다. 김지미는 영화 촬영에 바빠 자신의 친딸은 지인의 할머니에게 맡겨 키우는 상황에서도 최무룡의 네 자식은 자신의 집에서 키웠다. 그중에는 태어난지 1년도 안된 최민수도 있었다. 최민수는 이런 김지미가 고마워 성장한 후에도 김지미를 험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어머니처럼 대했다. 강효실은 최무룡과 헤어진 후 정신적으로 힘든 날들을 보냈다. 남편과 아이들을 빼앗겼으니 살아서 무엇하랴 하는 생각에 죽을 약도 먹고 동맥도 끊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나 틈틈이 연극 무대에 섰다.

▲이혼
김지미는 이혼과 간통과 재혼을 거치면서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불러주는 영화가 많아 곧 집도 마련하고 이혼 전 수준을 회복했다. 1964년 연간 출연작이 20편을 넘어서고 1966년부터 연간 30편대로 늘어났다. 당시 문희·윤정희·남정임 트로이카 스타들이 서로 경쟁하며 역할을 3등분 하는 가운데 김지미는 홀로 자기 영역을 지키며 질주했다. 최무룡은 결혼 후 영화감독을 병행했다. 김지미가 출연한 영화도 여러 편 만들었다. 감독 데뷔 영화는 김지미가 출연한 ‘피어린 구월산’(1965.9.22)이었다. 이후에도 ‘나운규 일생’(1966), ‘한많은 석이 엄마’(1966), ‘서울은 만원이다’(1967), 애수(1967) 등 1960년대에만 14편을 감독했다. 영화마다 김지미가 도움을 주었지만 빚은 늘어났다. 김지미가 사재를 털어 남편을 지원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김지미는 이런 자신의 인생이 한탄스러웠다. 따뜻한 방에서 잠 한숨 실컷 자지 못하고 동지섣달에도 얼음을 깨고 차가운 물에 들어가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삶에 회의가 생겼다. 1963년 7월 아들을 낳을 때도 새벽까지 비를 맞으며 밤샘 촬영을 한 뒤 아침 7시에 집에 돌아와 9시에 아이를 낳았다. 산후 조리는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집에 어머니가 있었지만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 아들이 4살 때이던 1967년 2월 끓는 물에 빠져 죽는 엄청난 슬픔을 겪어야 했다. 새로 태어난 딸이 백일도 안될 때였다. 이처럼 김지미가 온갖 고생을 하는데도 최무룡의 빚은 계속 늘어났다. 김지미는 지인들에게 “열심히 뛰어도 이잣돈도 안되니 이럴 바에야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했다.

최무룡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1968년 말 김지미에게 “당신까지 말려들어 두 사람 모두 못사느니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며 헤어지자고 했다. 그 무렵 부부는 집 한 채도 없었다. 4000만원 상당의 김지미 정릉동 집은 은행에 저당잡히고 최무룡이 빌려쓴 돈은 3000만원이나 되었다. 급기야 최무룡은 1969년 6월 9일 2000만원 부도를 냈다. 부부는 헤어지기로 했다. 1969년 6월 11일 새벽 김지미 정릉 자택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무룡은 “김지미가 떠안을 여러 부담을 덜어 주고 톱스타인 아내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김지미는 이혼 후 개봉한 ‘너의 이름은 여자’(1969년 7월 3일 개봉)에서 열연을 펼쳐 아시아태평양영화제(1969년)와 청룡영화상(1970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한 후 공허하게 지내던 그녀에게 때맞춰 찾아온 희소식이었다.
▲이혼 후 김지미의 영화 인생
김지미가 30대로 접어든 1970년대는 한국영화의 침체기로 분류된다. 1970년도의 제작편수가 사상 최다인 231편을 기록한 것을 정점으로 영화제작이 급감하고 작품의 질도 떨어져 흥행 면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TV 보급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정치적 이유가 컸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영화사 설립이 신고제에서 등록제로 바뀌고 검열이 강화되다보니 사회성 있는 영화는 만들지 못하고 매춘 등 말초적인 영화들만 넘쳐났다. 정부 비판은커녕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게 있으면 제작이 금지되었다. 영화인들 사이에 위기감이 팽배해지고 영화 제작이 줄어들었다.
김지미 역시 1970년 36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을 정점으로 1971년 20편, 1972년 13편, 1973과 1974년 2편, 1975년 4편 등 영화 편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대신 이 시기의 영화를 보면 ‘스타 김지미’에서 ‘배우 김지미’로 변신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기의 깊이가 달라졌다. 그 결과 1974년도에는 김수용 감독의 ‘토지’로, 1975년에는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으로 2년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토지’는 1974년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도 선물했다.

▲이혼 후 최무룡의 영화 인생
최무룡은 이혼 후에도 영화에 출연하며 예의 인기를 과시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는 나이트클럽 쇼에 출연 하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1976년에는 김지미-나훈아 결합 소식을 듣고 그해 9월 재미교포 위문공연 명목으로 미국으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한 여성과 결혼하고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등 새로운 인생을 펼쳤으나 여성과는 1년 후 헤어졌다. 이후 계속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4년 6개월만인 1981년 3월 귀국했다. 국내에서 몇몇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불러주는 영화는 없었다. 생활이 곤궁해져 악극에 출연하고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러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나마 성공적이었던 것은 1988년 공화당의 공천으로 고향 경기 파주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1996년 초에는 임야를 주택지로 형질변경해주겠다며 2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1년,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고, 1996년 12월에는 폭력조직이 가짜약을 판매한 장소에서 공연을 했다가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99년 11월 11일 서민아파트에서 외롭게 살다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 번째 남자 : 가수 나훈아
김지미와 가수 나훈아가 결합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은 1976년 7월 9일이었다. 당시 김지미는 두 번의 이혼 경험이 있는 36살이었고 나훈아는 동거하던 여성과 그해 초 헤어진 29살이었다. 언론은 “1972년 2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스타의밤 공연에서 처음 만나 4년간 밀회를 해왔다며 양가 부모의 허락을 얻는 대로 가까운 시일 내에 결혼하겠다”는 두 사람의 발표를 인용 보도했다. 김지미는 훗날 나훈아를 만나게 된 저간의 사정을 이렇게 얘기했다. “나훈아가 노래를 잘해 우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를 몇번 해줬다. 형제지간처럼 지내다 1976년 군대 다녀오고 일이 없어 더 친해졌다. 남녀관계이다보니 (육체적) 문제가 좀 있긴 있었다.” “원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는데 언론이 스캔들로 몰아가니까 오기와 반발심이 생기고 우리 둘 사이에도 의지하는 감정이 생겨 결합한 것”이라며 결혼의 동기를 언론으로 돌렸다.
사실 김지미에게는 나훈아와 결합하기 전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최무룡과 헤어진 후 8년이나 만난 사이였다. 김지미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사랑이었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았다. 결국 나훈아와 스캔들이 터지고 오기로 나훈아와의 결합을 결정하면서 그 남자와는 헤어졌다.

▲나훈아
나훈아(1947~ )는 서라벌고 2학년 때 우연히 동네 음악학원에서 노래 실력을 인정받아 1966년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데뷔했다. 처음 녹음한 4곡 중 ‘천리길’을 여러 사람이 내는 LP 음반에 끼워넣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러나 ‘천리길’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호의 노래 ‘황금의 눈’을 표절했다는 이유로 곧 금지곡으로 묶였다. 오아시스는 미리 녹음해둔 4곡 중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임 그리워’, ‘약속’ 등 3곡을 다른 LP 음반에 끼워넣어 1968년 시장에 내놓았다. 반응은 뜨거웠고 나훈아는 서서히 스타로 발돋움했다.
1972년 2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연 리사이틀에는 5만 명의 여성 관객을 끌어모으며 기염을 토했다. 그해에 ‘물레방아 도는데’, ‘고향역’, ‘녹슬은 기찻길’ 등 트로트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트로트 황제’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1973년 7월 공군에 입대하면서 1976년 제대할 때까지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김지미와 결합을 공표한 것은 제대 후였다. 김지미는 나훈아와 결합 후 영화계와 연락을 끊은 채 대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변장호 감독의 ‘을화’(1979 변장호)에만 출연했다. 나훈아 역시 가수 활동을 접고 조용히 지내다 1981년 10월 다시 가수생활을 시작해 ‘싱어송 라이터’로 변신했다.
그런데 김지미에게 나훈아는 홍성기나 최무룡처럼 허심탄회하게 터놓고 말할 상대가 아니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세상의 눈을 의식해 6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사실혼 관계로 6년을 지내다 1982년 5월 4일 헤어진다고 나훈아의 입을 통해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나훈아는 이후 다른 여성과 동거하면서 딸을 낳았다.

▲결별 후 김지미 영화 인생
김지미는 나훈아와 결별 후 2년 동안 김기영 감독의 ‘화녀’(1982.7 개봉)와 홍파 감독의 ‘외출’(1983.9 개봉) 두 편에만 출연했다. 이처럼 출연작이 적어진 것에 대해 김지미는 훗날 “감독들이 안 썼으니까”라고 솔직히 말했다. 하지만 그 시절 한국 영화 대부분이 젊은 배우 중심으로 기획되다보니 중년이나 노년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할 여지가 적어지고 김지미가 제안받은 영화가 에로물 일색이었던 것도 저변에 깔려있다. 그 무렵 영화사들은 미성년에서 막 벗어난 애들을 데려다 재미만 좇는 영화를 만들었다. 40대 중반의 김지미 연기 인생도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84년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김지미는 삭발 투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5분의 1 가량의 장면들을 촬영했을 때 불교계가 반발해 촬영이 중단되었다. 김지미와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다가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강원도 속초에서 다방 아가씨들의 열악한 현실을 목격하고 영화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김지미는 영화 제작을 위해 1985년 ‘지미필름’을 설립했다. 이로써 국내 여배우 출신 최초로 영화제작자 1호 여성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지미필름은 예정대로 임권택 감독의 ‘티켓’(1986.8.23. 개봉)을 제작했다. 김지미는 ‘티켓’으로 198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그 무렵 자신이 제작하지는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6.4.5)에도 출연,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시카고영화제 세계평화메달상을 수상했다. 지미필름은 이후에도 장길수 감독의 ‘아메리카 아메리카’(1988), 노세한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89), 유영진 감독의 ‘물의 나라’(1989),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 6편을 제작했는데 김지미는 3편에 출연했다. 그중에서도 김지미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1992.2.1. 개봉)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18억원을 들여 일본과 러시아를 오가면서 촬영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 영화 실패로 막대한 손해를 보게되자 지미필름도 문을 닫았다.

■네 번째 남자 : 의사 이종구
김지미가 어머니의 심장질환 치료를 계기로 이종구 박사(1932~ )를 알게된 것은 1990년이었다. 혼자 살며 아픈 노모를 모시던 김지미로서는 어머니에게 잘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이런 김지미의 마음을 아는지 어머니는 의사 사위를 두면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다며 딸을 부추겼다. 김지미는 어머니의 뜻도 있고 해서 이종구를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이종구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김지미에게 러브레터를 보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신성일에게는 다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이종구를 보면서 김지미는 유명 배우와 세계적인 의사의 결합이니 그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노년에 편안한 상대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종구
이종구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북한 함흥고보를 졸업했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가족을 따라 북한에서 대구로 피란을 왔다. 이종구의 부친은 유명한 비뇨기과 의사여서 6·25전쟁 때 유행했던 성병을 치료하며 큰돈을 벌었다. 이종구의 동생은 영화배우 신성일과 경북고 동기였다. 신성일이 경북고 2학년 때 집이 몰락해 학업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을 때 이종구 부친이 신성일에게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이종구는 1957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후 캐나다 맥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5년부터 캐나다 알버타대 의대교수로 지내며 독일계 미국 여성과 결혼해 세 아들을 두었다. 1989년 이혼한 뒤 30년 만에 귀국, 울산대 의대 내과학교실 교수와 서울중앙병원 심장센터 소장을 겸임했다. 이종구는 혁신적인 심장 수술법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결혼과 이혼
김지미는 1991년 11월 22일 자신보다 8살 많은 이종구와 결혼했다. 처음 3년간은 감사하며 살았다. 영화 한 편에 몇 억씩 받는 배우에게 남편의 월급은 초라했으나 월급봉투가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던 김지미에겐 꼬박꼬박 제 날짜에 월급이 들어오는 게 신기했다. 남편의 한 달 노력의 대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거리가 느껴진 건 3년 뒤였다. 이종구는 김지미의 압구정동 빌딩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싶다고 했다. 김지미는 대학에 남아 학자로서 후진을 양성하며 좋은 스승으로 남았으면 했는데 죽기 전에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게 소원이라는 이종구를 말릴 수 없었다. 김지미는 병원 개업에 맞춰 부부가 함께 방송에 출연하는 식으로 이종구를 뒷바라지했다. 그런 덕분인지 병원은 잘되었다. 하지만 김지미는 그때부터 두 사람 관계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니 것 내 것’ 식으로 따지는 경우가 늘어나니 돈이라는 게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지미는 점점 결혼 생활이 후회스러웠다. 그러나 또 다시 이혼하면 “김지미가 또 이혼했네”, “김지미가 젊은 남자 만나 바람난 게 아니냐” 하는 말들이 들릴 게 뻔해 마치 사진 프레임 속에서 사는 것처럼 참고 살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어쩌지 못해 결혼 10년 째인 2001년 가을 별거에 들어갔다가 2002년 2월 20일 합의이혼했다. 김지미는 세월이 흐른 후 “세 사람(홍성기·최무룡·나훈아)과 함께 했던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오래 산 마지막 11년이 가슴 아픈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런 시기를 이겨내기 위해 한국에이즈연맹 후원회장(1993년)과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1995년-2000년)으로 더 열심히 활동했는지도 모른다.
■남자 없는 김지미의 삶
▲아내 김지미
네 남자와 살 때 김지미는 배우 티를 안 내는 게 자신이 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집에는 트로피 하나 전시하지 않았다. 영화 스틸 사진도 걸어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상을 몇 개 탔는지도 모르고 그 트로피들이 어디에 박혀 있는지 잘 몰랐다. 김지미는 밖에서 활동하다가도 집에 들어서면 여자가 되고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김지미는 일단 시작했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빨리 집어치워버리는 성격이다. 사람도 노력하다가 가망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바로 헤어진다. 김지미는 세 번의 이혼과 한 번의 결별에 대해 “누가 뭐라든 사랑을 정말 열심히 했다”면서 “세 번 모두 중도 하차한 것은 상대방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결별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다.
김지미는 이종구와 이혼하고 몇 년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남자, 나이든 남자 다 살아봤지만 남자는 다 똑같이 어린애다.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여자들이 모성애로 감싸니까 사는 거다.”라며 남자관을 피력했다. 그러면서 “물론 그땐 사랑이었고, 사랑이 절실했을지 몰라도, 점점 상대를 알게 되고, 사랑이 희생되어가니, 사랑 참 별거 아니다, 사랑 별 볼일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김지미는 자신이 살아본 네 남자 중 굳이 꼽자면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다만 “최무룡은 인간성이 참 좋지만 맺고 끊고 자르는 부분이 부족하다”며 그런 부분이 싫었다고 했다. 김지미는 “가장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도 최무룡을 꼽았다.

▲노년기 삶
김지미는 2002년 미국 LA로 이주해서 최무룡과 사이에서 낳은 딸(1967년생) 집과 홍성기 감독과 사이에서 낳은 딸(1960년생) 집을 오가며 평범한 일상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 2010년 제15회 부산영화제에서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김승호(2007년)에 이어 배우로는 두 번째로, 여배우로는 최초이자 유일했다. 그해 명예의전당에도 ‘화려한 여배우’ 타이틀로 헌액되었다. 현재 영화배우 김지미가 원하는 것은 영화 출연이다. 수백 편 영화에 출연해 지겹기도 하건만 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하다고 말한다. 김지미의 마지막 영화를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