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2019년은 김동인 순수 문예지 ‘창조’ 창간 100주년

by 김지지

 
김동인 덕분에 한국 문학이 한 단계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김동인(1900~1951)이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한국 문학사에 끼친 공로는 ▲‘더라’, ‘이라’ 등 구투(舊套)의 탈피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체 서사체로의 변혁 ▲‘he’, ‘she’에 해당하는 3인칭 대명사 ‘그’의 사용 ▲사투리의 사용 등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사투리의 사용’을 제외한 세 가지는 이광수가 먼저 시작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문장의 시간 관념을 또렷이 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현대 소설의 문체를 개척한 김동인 덕분에 한국 문학이 한 단계 발전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동인은 평양에서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동인보다 18살이 많은 장남이자 이복형은 광복 후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이다. 김동인은 1913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했다가 곧 그만두고 1914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학원을 거쳐 메이지학원 중학부로 전학했다. 그곳에는 1년 먼저 와 있던 동갑내기 고향 친구 주요한이 있었다. 1917년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가 1918년 4월 결혼한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잠시 미술학교에서 그림에 대한 개념을 익혔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1일 주요한과 함께 도쿄에서 순수 문예지 ‘창조’를 창간했다. 전영택·김환·최승만도 창간 때부터 ‘창조’ 동인으로 참여하고 주요한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이름을 올렸으나 재정적 부담은 언제나 부잣집 아들인 김동인의 몫이었다.

김동인이 “4,000년 역사 이래 최초의 신문학의 꽃봉오리”라고 자부했던 ‘창조’ 창간호에는 김동인의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 주요한의 신시 ‘불놀이’가 실렸다. 김동인은 창조 2호(1920.2)에는 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를 실었고, 1921년 5월에 종간된 9호에는 강렬한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은 ‘배따라기’를 발표했다. 창간호부터 7호까지는 도쿄에서, 8호와 9호는 서울에서 발간된 창조지에는 소설 19편, 시 70여 편, 희곡 4편, 평론 16편, 번역시 49편 등이 수록되었다.

 

‘창조’ 창간호(1919년 2월 1일 발행)
‘창조’ 동인들의 당면 목표는 이광수 문학에 대한 극복

참다운 신문학 개척을 기치로 내건 ‘창조’ 동인들의 당면 목표는 신문학 초창기의 독보적 존재였던 이광수 문학에 대한 극복이었다. 김동인은 ‘창조’ 창간호에서 기존의 이야기와는 다른 묘사법과 작법을 선언했다. 이것은 이광수의 계몽적인 문학을 이상화해 관념적으로 도구화한다든지 혹은 ‘정사(情事)의 문학’으로 일관하는 것에 반기를 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창조’ 폐간 후 ‘개벽’과 ‘동명’지 등에 발표된 김동인의 초창기 단편소설은 낭만적 정열과 감상이 짙은 낭만적 리얼리즘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조선문단’ 1925년 1월호에 실린 ‘감자’를 계기로 자연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감자’는 종래의 감상적인 탐닉이나 영탄적인 세계가 아닌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이었다.

문학적 성취와는 별개로 김동인은 호사스럽고 방탕한 작가로 동료 작가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평양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최고급 호텔에서 밤마다 기생들을 옆에 끼고 살았으며 마음 내키면 도쿄를 산보 다니듯 한다고 해 ‘동인식 도쿄 산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러나 1926년 평양 보통강 관개사업 실패로 막대한 유산을 잃은 뒤에는 갖가지 불행이 겹치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궁핍해지고 1927년 아내까지 집을 나가는 등 가정 파탄까지 가중되면서 김동인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게다가 우울증 등 신경 증세의 악화로 수면제와 최면제를 과다 복용하면서 몸까지 망가졌다.

‘창조’ 동인 주요한의 노년 모습

 

김동인은 1930년대 들어 이광수의 계몽주의는 물론 신경향파나 카프의 사회주의 문학에 맞서서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걸고 탐미주의적 순수문학을 지향했다. 예술지상주의가 극적으로 체현된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광염 소나타’(신민공론·1930)와 ‘광화사’(삼천리·1930) 등이 있다.

김동인이 신문소설을 쓴 것은 1929년부터였다. 평소 신문소설은 예술이 아니라고 경멸하고 ‘문학을 위한 문학’을 소리 높여 주장하던 김동인이었지만 당장의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첫 신문소설은 192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 ‘젊은 그들’이었다.

평소 김동인은 기자로 변절한 문인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는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며 “그의 작품은 한낱 인도주의를 과장한 문자의 유희에 멈췄을 뿐”(조선일보 1929.7.28)이라고 비난했고,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 주요한에게는 “요한이 ‘사회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파멸을 뜻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주요한에게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인으로 돌아가라”며 “이것은 나의 권고인 동시에 조선 문예 애호가를 대표한 나의 명령”(조선일보 1929.12.3)이라고도 했다.

 

“4,000년 역사 이래 최초의 신문학의 꽃봉오리”

이런 김동인이 1933년 4월 주요한이 편집국장으로 있는 조선일보의 학예부장으로 입사한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는 일찍이 대중의 흥미를 끄는 일은 “문학을 배반한 훼절”, “자기의 존재를 굽히고 자기의 존재를 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하루 두 편의 소설을 썼다는 것 역시 사건이었다. 1931년 재혼한 그의 아내는 “연재물 두 회분을 30분 내에 쓴다. 글을 쓸 적에 원고지 다음 장을 넘기는 소리가 마치 글을 읽을 때 책장 넘기듯 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파지 한 장 없었다. 쓸 분량만큼 원고지를 미리 책으로 만들어 쪽수까지 매긴 후에는 수정을 하지 않고 단번에 써 내려갔다”는 차남의 증언도 있다. 김동인이 ‘금동’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장편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도 그중의 하나였으나 학예부장 업무를 처리하며 소설 두 편을 매일 쓴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결국 ‘운현궁의 봄’은 재직 기간 중 9회밖에 나오지 못했다.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한 성격에 소설가 추천 문제를 둘러싸고 주요한 편집국장과의 의견 충돌로 40일 만에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그가 직장 생활을 한 것은 일생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훗날 기자 생활을 한 것에 대해 “과부의 서방질이나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바”라고 했다.

김동인의 캐리커처. 안석주가 그린 것으로 조선일보 1933년 1월 12일자에 실렸다.

 

1930년대 중반부터 극도의 신경증으로 집필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서 김동인은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1938년 무렵에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 한때는 약물중독 상태에서 총독부 관리가 옆에 있는 것도 모른 채 꺼낸 말이 천황 모독죄에 걸려 반 년간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 활동 펼치고 광복 후에는 좌익 규탄하는 필봉 휘둘러

김동인은 1939년 여름 자진해서 총독부를 찾아가 황군 위문 작가단에 끼워 달라고 요청해 ‘성전종군작가’라고 쓴 어깨띠를 두르고 중국의 전선을 시찰하는 등 노골적으로 친일 활동을 펼쳤다. 매일신보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한 천황 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를 함께할 백성”(1942.1.23)이라는 글을 실었고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으며 1944년에는 친일 소설 ‘성암의 길’을 발표했다. 다만 그 무렵 기억상실증과 심한 난독증으로 거의 1년간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

광복 후에는 좌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하지만 젊은 시절 술과 기생으로 이어진 무절제한 생활과 수면제 과용으로 인해 1949년 5월부터는 글을 전혀 쓰지 못하고 1949년 6월에는 뇌졸중이 발병하고 1949년 말에는 완전히 누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결국 중풍 중세를 보여 왼쪽 몸이 마비된 채 누워 있을 때 6·25 전쟁이 일어났다.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인민군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집에 들이닥쳤으나 김동인의 몸 상태를 보고 포기했다. 1·4 후퇴 때는 아내가 자식을 지키기 위해 결단했다. 1951년 1월 3일 자식들과 피란을 떠나면서 “누구든지 이분을 발견하거든 잘 보살펴 달라”는 편지와 돈을 집에 놓고 피난을 떠났다.

부인이 1951년 8월 초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고 김동인의 시신은 집에서 20m 정도 떨어진 밭고랑에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부인은 시신을 그곳에 매장했다가 11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하지만 민간인을 화장해줄 수 없다고 거부해 군인 사체 20여 구와 함께 화장되었다. 가족은 결국 누구의 뼈인지도 모를 유골 일부를 받아 한강에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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