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공포정치의 화신’ 로베스피에르 단두대에서 처형

프랑스 혁명이 발발(1789년)하고 루이16세가 처형(1793년)된 뒤 프랑스 전역에 공포정치가 몰아쳤다. 권력을 장악한 자코뱅당의 산악파(과격파)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공안·보안위원회를 구성하면서 프랑스 전역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공포정치로 약 약 30만∼80만 명이 체포되어 이 가운데 4만∼5만 명이 처형되었다.

공포정치의 한 가운데에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 북부 아라스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6살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죽고 아버지마저 곧 어린 자식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면서 로베스피에르는 7살 때부터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명문학교인 루이르그랑 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7세 되던 해 루이 16세가 루이르그랑을 방문했을 때 생도 대표로 환영사를 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고향으로 변호사로 활동하며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힘을 쓰고 명성을 쌓아갔다.

1789년 5월 루이 16세가 176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아라스가 속해 있는 아르투아 지역의 ‘제3신분’(평민층) 대표로 선출되어 파리에 갔다. 6월 말 파리에서 삼부회가 국민의회로 재편되고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프랑스대혁명이 점화했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체구도 작고 목소리도 작아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하지만 자유주의 귀족과 진보적 부르주아지 의원 등을 중심으로 결성한 자코뱅 클럽(자코뱅당)에 참여하면서 점점 자신의 지지층을 넓혀갔다. 그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연설을 했고, 모든 시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자코뱅파를 주도한 인물은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프랑스대혁명은 제3신분(평민 계층)이 주도한 시민혁명이었다. 제3신분 중에서도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부르주아 계층은 제1신분(추기경 등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을 제치고 사회 주도층이 되길 원하면서 입헌 군주제를 주창했다. 이들은 1789년 12월 귀족들의 반 혁명에 대항하기 위해 자코뱅 수도원을 근거지로 정치 클럽을 만들었다. 왕당파는 이들을 ‘자코뱅 클럽’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791년 10월 제한 선거(일정 이상의 세금을 낸 평민에게 선거권 부여)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고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푀양파, 공화제를 주장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 등이 참여했다. 하지만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률이 계속 높아지는 등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하기까지했다. 루이 16세는 비밀리에 외국으로 망명하려다 붙들리고 만다.

결국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던 끝에 1792년 8월 10일, 굶주림에 지치고 분노에 가득 찬 민중이 국왕과 왕비가 사는 튈르리궁을 습격·방화하고 루이16세 일가를 탑에 가뒀다. 이로써 왕정은 끝장이 났다. 곧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한 국민공회가 1792년 9월 20일 구성되었고 국민공회는 그날 왕정 폐지와 공화정(프랑스 제1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국민공회는 세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공회당의 ‘우익’에는 브리소, 베르니오, 콩도르세 등의 지롱드파가, ‘좌익’에는 자코뱅파가, 중간에는 중도적인 평원파가 포진했다. 지롱드파는 지주와 상업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한 온건공화파 계열이었고, 자코뱅파는 하층민이 지지 기반이었다. 자코뱅파를 주도한 인물은 ‘세 거두’로 불리던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와 장 폴 마라, 그리고 조르주 자크 당통이었다. 자코뱅파도 단일 세력은 아니어서, 에베르파, 마라와 당통 등의 코르들리에 클럽, 그리고 로베스피에르, 생쥐스트 등의 몽테뉴파(산악파)로 나뉘었다. 이처럼 분파가 다양했지만, 초기에는 분파 사이의 견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문제는 루이16세의 처리 문제였다.

국민공회 때는 의장을 기준으로 우익에는 지롱드파가, 좌익에는 자코뱅파가 포진했다.

 

“왕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자코뱅은 루이16세의 처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야만 그의 복위를 노린 국내외의 반혁명 움직임이 잠잠해질 것이기에. 또한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었던 식량난 문제가 혁명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문제를 덮어버리기 위해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하기도 했다. 반면 지롱드당은 왕의 권한을 박탈했으면 그것으로 되지 않았느냐고 여겼다. 자코뱅의 고집을 당할 수 없는 지롱드는 굳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면 재판을 거쳐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자코뱅은 “이처럼 명백한 죄인에게 재판은 필요 없다”고 반발했으나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 1792년 12월에 왕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왕에게 죄를 씌우는 일은 근본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구체제의 법으로는 물론이고, 1791년의 헌법에서도 왕은 주권자로서 불가침의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법리적으로 왕이 내란이나 외환을 시도하지 않은 이상, 통치를 잘못했거나 국민이 증오한다는 이유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결국 로베스피에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먹혀 들었다. “왕은 무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죄라고 선언하는 순간 혁명이 유죄가 된다. 이제 와서 혁명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왕을 죽여야 한다. 혁명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1793년 1월 19일, 재판은 끝났다. 그리고 이틀 뒤인 1월 21일 루이 16세는 2만여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파리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국왕까지 처형한 자코뱅당은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설치해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 본격적인 공포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루이16세

 

로베스피에르, 혐의만으로 수많은 사람들 단두대로 보내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반혁명 인사들을 계속 처형했다. 혁명에 반대하는 인사들이 집단 학살되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고, 2000여 명이 한꺼번에 강물에 수장되는 일도 벌어졌다. 1793년 6월에는 자코뱅의 사주를 받은 파리 코뮌의 노동자들이 국민공회에 난입, 지롱드파 의원들을 반혁명 분자라며 끌어내고, 자코뱅 일색의 공안위원회는 즉석에서 지롱드파 29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들은 약 넉 달 뒤 루이 16세를 처형한 단두대 앞에 선다. 이로써 막이 오른 공포정치는 1년 사이에 1만 7000명을 단두대로 보냈고, 지방 반란 진압 과정에서 따로 3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이 모든 죽음을 진두지휘했던 로베스피에르는 이렇게 말했다. “인권을 억압하는 자들을 응징하는 일,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런 자들을 용서하는 일, 그것은 야만입니다. 폭군의 잔인함은 그저 잔인함일 뿐이지만, 공화국의 잔인함은 미덕입니다.” 이로 인해 폭력은 사실상 합법화되었고 나라 전체가 공포 분위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나눠준다는 내용의 법령도 공포했다. 1794년 7월에는 아무 증거 없이 오직 혐의만으로 반혁명 분자들을 처형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제정했다. 이 법을 이용해 혁명재판소는 불과 50일도 안 되는 기간에 1376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가 극에 달하자, 당통이나 데물랭 같은 측근들조차 ‘혁명이 길을 잃고 있다’며 그를 비판했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는 오랜 동지였던 이들마저 단두대로 보내버렸다. 자코뱅의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인 마라가 암살된 후, 마지막 남은 당통이 그의 눈에 거슬렸다. 당통은 열성적이었지만 쾌락과 금전을 밝혀 결국 반혁명분자로 몰려 단두대에 세워졌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가 공화국을 피로 질식시키려 한다”며 죽음을 맞았다.

조르주 당통

 

마르크스, 자코뱅당을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라고 높이 평가해

자코뱅당은 농민들에게 토지 무상분배를 실시했으며, 서구세계 최초로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코뱅당을 공산주의의 사상적 뿌리라고 높이 평가했다. 자코뱅당은 국민공회에서 왼쪽 자리에 앉아 ‘좌익’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당통마저 없어지고 로베스피에르의 1인 독재가 본격화되자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국민공회 의원들과 공안위원회 위원들은 ‘다음엔 내 목이 날아갈 것’이라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이가 그의 공포정치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은밀하게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와 그 일당을 사로잡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테르미도르 반동’이었다. 테르미도르는 혁명 정부가 제정한 공화력의 달(月) 이름이다. 결국 로베스피에로는 국민공회군에 의해 체포됐고 다음날 1794년 7월 28일 그가 공포한 법에 따라 사실 관계 조사도 없고, 변론의 기회도 없이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형리들도 군중도 무덤덤했다. 그런 장면은 대략 일 년 전부터 질리도록 보아온 것이었으니. 지금 막 단두대의 제물이 된 사람도 오늘만 20번째의 제물이었다. 공포정치도 끝났다.

이후 혁명 주도권은 지롱드당의 온건파가 잡았으며, 국민공회는 1795년 헌법을 개정해 총재정부를 수립했다.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가 입법권을 갖는 체제였다. 총재정부는 반대파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후 나폴레옹이 통령 정부를 수립해 독재권력을 구축함으로써 프랑스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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