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의 ‘소금 행진’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절정… 운동의 최종 목표는 영국인을 내쫓고 인도인 스스로 인도를 통치하는 것

↑ 물레를 돌리는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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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10차례에 걸쳐 총 2,333일 감옥에서 보내

‘인도의 국부’로 추앙받는 간디(1869~1948)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다. 하지만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로 부른 뒤부터 ‘마하트마 간디’로 불렸다. 간디가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고국 인도로 귀국한 것은 1891년이었다.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남아공의 한 인도 회사로부터 법률 자문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1893년 남아공의 나탈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목격한 인도인의 비참한 생활상은 간디를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이끌었다. ‘사티아그라하’는 ‘진리(사티아)’를 ‘잡고 지킨다(아그라하)’는 의미로, 우리말로는 ‘진리 지키기’, ‘비폭력 저항’, ‘진실에의 헌신’ 등으로 표현된다. 인도인들은 남아공에서 자기 땅을 가질 수 없었다. 남아공 내 트란스발 공화국에서는 밤 9시 이후 외출도 할 수 없었다. 항상 신분증을 소지해야 했고 지문 날인도 의무적으로 해야 했다. 백인이나 기독교인들과 함께 걸어 다녀서도 안 되었다.

간디는 1895년 ‘나탈인도국민회의’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전개했다. 수많은 인도인이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투쟁에 동조하며 파업과 시위에 참여하고 투옥과 처벌을 감수했다. 이 때문에 당초 1년 정도만 체류할 예정이던 간디의 일정은 기약 없이 늘어났다. 그사이 몽둥이에 맞아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고 감옥도 세 번이나 드나들었다. 죽는 날까지 10차례에 걸쳐 총 2,333일이나 감옥에서 보내게 되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1906년 간디가 중대 결심을 했다. 금욕과 동정주의를 맹세하는 ‘브라마차라 서약’을 한 것이다. 이미 13세에 결혼한 그였지만 평생 성적 욕망을 멀리하기로 결심하고 변호사로서의 성공과 모든 소유욕을 벗어 버리겠다는 맹세였다.

 

인도인들 “우리는 빵을 구했으나 대신 돌을 받았다”라며 분노

간디는 1915년 1월, 22년 만에 인도로 돌아와 수행자들의 공동체인 ‘아슈람’을 만들었다. 그곳은 간디의 사상을 실천하는 실험실이었고 폭력 없이 투쟁하는 법을 가르치는 훈련소였다. 간디는 농민해방운동을 벌이고 방직노동자 파업을 지원했다. 가뭄으로 기근이 발생했을 때는 세금 납부 거부운동을 펼쳤다. 1차대전 때는 영국을 도와야 한다며 인도인의 참전을 지지했다. 곤경에 빠진 영국을 도우면 전쟁 후 영국이 이떤 형태로든 인도를 도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인도 최대의 정치결사인 ‘인도국민회의파’도 독립의 희망을 품고 참전을 독려했다. 이렇게 해서 1차대전에 참전한 인도인은 150만 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인도인들의 희망은 종전 후인 1919년 3월 18일 이른바 ‘롤럿법’이 통과되면서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롤럿법’은 영국을 비판하거나 인도인의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체포·구금할 수 있고 의심스럽다고 판단되면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도록 한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영국의 전쟁 승리를 위해 애써온 인도인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간디 역시 “우리는 빵을 구했으나 대신 돌을 받았다”라며 분노했다.

간디는 영국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1919년 3월 ‘하르탈’ 운동을 제창했다. 운동은 하루 동안 모든 행동을 중단하고 슬픔에 잠기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가게와 공장은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집 안에서 기도와 단식을 했다. 이런 와중에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광장에서 롤럿법 철폐를 요구하는 1만여 명의 군중 시위가 일어났다.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사방이 집들로 둘러싸여 있는 사실상 막다른 곳이었다. 그런데도 현지 주둔 여단장의 발포 명령과 함께 출구를 막아선 영국군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군중은 맥없이 쓰러졌고 광장은 피바다를 이뤘다. 379명이 죽고 1,137명이 부상한 대참사였다.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 1930년의 ‘소금 행진’에서 절정 맞아

간디는 1920년 비폭력적인 자급자족운동 ‘스와데시’를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악마적인 영국 정부의 모든 것을 거부하자고 호소했다. 영국 상품 불매, 공립학교 불취학, 세금 납부 거부 등을 촉구했다. 최종 목표는 ‘스와라지’, 즉 영국인을 내쫓고 인도인 스스로 인도를 통치하는 것이었다.

점차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에서 수입된 옷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독립하자는 의미로 물레 돌리기와 손으로 옷감을 짜는 카디 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펼쳐졌다. 교사들은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공무원들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간디가 쓴 흰 빵모자와 카디옷(베틀로 손수 짠 옷감으로 만든 거친 옷)을 걸친 수천 명의 학생은 농촌과 도시 빈민가로 내려가 간디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령사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갈등을 빚고 있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역시 하나가 되었다.

간디는 1921년 인도국민회의 대표로 선출되자 국민회의를 명망가 중심에서 대중조직으로 탈바꿈시켜 독립운동의 중추로 삼았다. 이런 일련의 활동으로 1922년 3월 2년간 또다시 투옥되었다. 석방 후 간디는 물레를 돌리고 손으로 옷감을 짜는 카디 운동과 스와데시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전국적으로 수백만 대의 물레가 바쁘게 돌아갔다. 다시 대규모로 시작된 비폭력 불복종 운동은 1930년의 ‘소금 행진’에서 절정을 맞았다.

당시 영국은 인도에서의 소금 생산을 금지하고 전부 영국에서 수입한 소금에 50%의 높은 세금을 매겨 팔았다. 이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은 소금조차 제대로 섭취할 수 없었다. 이 소금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간디의 여정은 1930년 3월 12일 인도 서부 아마다바드 시에서 시작되었다. 386㎞ 떨어진 서부 해안가 단디까지 걸어가는, 훗날 ‘소금 행진’으로 불릴 이 고난에 찬 간디의 행진은 지나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과 호응을 받았다.

3주 만에 단디에 도착한 1930넌 4월 6일, 출발 당시 78명이던 일행은 어느덧 수만 명의 군중으로 불어나 있었다. 간디는 영국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전자에 바닷물을 담았다. 바닷물은 이튿날 소금이 되었다. 군중들도 항아리와 냄비에 염수를 담아 소금을 만들었다. 간디는 소금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지만 인도 전역에서는 소금세에 항의하는 소금의 제조와 판매가 성행했다. 경찰이 곤봉을 휘둘러도 군중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맞기만 할 뿐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가 터지면 그 자리에 쓰러져 영국의 폭력성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투옥된 사람만 6만 명에 달했다. 간디는 그의 체포에 항의하는 편지가 영국 정부에 쏟아진 덕에 풀려날 수 있었고, 소금세는 1931년 백지화되었다.

 

간디의 암살 소식에 유엔은 모든 가맹국의 국기를 3일간 반기로 게양

1931년 간디는 영국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런던으로 갔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인도로 돌아왔다. 간디는 불복종운동을 준비하다가 다시 갇혔다. 1933년 풀려난 후에는 정치보다는 사회 발전을 위해 시간을 바쳤다. 그런 가운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영국은 또다시 독립을 시켜주겠다며 인도인의 참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인도국민회의는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군중은 관청을 비롯해 영국을 상징하는 물건을 파괴했다. 우체국, 경찰서, 법원 등을 불태우고 철도와 전선을 끊었다. 이 때문에 네루를 비롯해 3만 명이 다시 감옥에 갇혔다. 국민회의를 떠나 비폭력 사상 전파에 전념하고 있던 간디 역시 영국 정부를 향해 불복종운동을 전개하다가 1942년 감옥에 갇혔으나 건강 악화로 1944년 석방되었다.

인도는 전쟁이 끝난 후인 1947년 8월 15일 독립했다. 하지만 ‘힌두교 인도’와 ‘회교 파키스탄’으로 두 동강 난 분리 독립이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 해부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발하며 양측의 갈등이 특히 첨예한 지역에서 양측의 화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돌이키지는 못했다.

1948년 1월 30일 오후 5시쯤, 두 계파의 화해를 호소하는 5일간의 단식을 마치고 뉴델리 집 뒤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3발의 총성이 들렸다. 피격 순간 간디는 “헤람!( 신이시여!)”이라고 짧게 말한 뒤 곧 눈을 감았다. 범인은 “간디가 이슬람에 너무 우호적”이라며 간디에 불만을 품은 힌두교 민족주의자 나투람 고드세였다. 간디의 암살 소식에 유엔은 모든 가맹국의 국기를 3일간 반기로 게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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