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속리산 국립공원] 충북 괴산의 도명산과 화양구곡은 실과 바늘이자 한 몸… 도명산은 정상의 소나무가 멋드러지고 화양구곡은 자연 절경과 역사가 어우러진 곳

↑ 도명산 정상에서 바라본 소나무 군락. 왼쪽이 코뿔소바위, 오른쪽이 조봉산(687m)이다.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도명산 산행은 6.2㎞에 4시간 / 화양구곡 탐밤 + 도명산 산행은 10㎞에 5~6시간

☞ 화양동탐방지원센터~화양구곡의 화양3교(도명산 입구)~정상~학소대~화양3교~원점회귀

 

by 김지지

 

■도명산(道明山)

▲어떤 산인가

수년 전 남수가 말했다. 충북 괴산 도명산(642m)의 정상 바위와 늘푸른 소나무가 참으로 멋지다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 데다 소나무가 일품이라는 말에 도명산 이름 석자가 수시로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이 도명산을 마침내 만나 회포를 푼 것은 2020년 9월 18일이었다. 도명산이 속리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는 것은 곧 알았으나 천혜의 계곡인 화양구곡을 품에 안고 있어 화양구곡과는 사실상 실과 바늘 관계라는 것은 도명산을 산행지로 정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남수가 도명산이 멋지다고 한 것도 본인이 다녀와서가 아니라 종이든 영상이든 어디에선가 읽거나 보고 나서 가보고 싶다는 바람을 얘기했다는 것도 그 즈음 알게 되었다. 도명산(道明山) 이름은, 화양구곡의 제6곡(능운대) 뒤쪽 산에 있는 채운암이라는 암자에서 도통한 이가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다지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다.

도명산의 순수 산행거리는 6㎞다. 화양구곡 주차장을 들머리와 날머리로 잡을 경우 평지 왕복거리 3~4㎞가 더해진다. 정상에 서면 북으로는 화양동계곡과 군자산(948m)·칠보산(778m)이, 동으로는 대야산(931m)이, 남으로는 낙영산(746m)·속리산연봉·문장대(1,054m)가 보인다지만 그것은 산 전문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어서 나같은 문외한 눈에는 그저 멋진 산그리메일 뿐이다.

도명산과 화양구곡 지도

 

▲산행 코스는

코스는 단순하다. 화양구곡 주차장을 떠나 40~50분 정도 계곡을 끼고 걷다가 우측 산으로 올라가면 된다. 정확히 말하면 화양구곡의 1곡~4곡을 지난 후 화양3교를 건너가기 바로 전 우측에 ‘도명산 탐방로 입구’라는 안내판을 보고 산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하산 지점은 화양구곡의 상류지점에 위치한 8곡(학소대) 부근이다. 순수 산행 거리는 도명산 입구 →(3.2㎞)← 정상 →(2.8㎞)← 학소대다. 주차장에서 도명산 입구까지 길은 화양구곡길과 겹친다. 화양구곡길은 흙길이 아니고 아스팔트길(혹은 시멘트길)이긴 하지만 가로수가 무성하고 세월의 더께가 바닥 길에서 느껴져 발걸음이 가볍고 기분이 상쾌하다.

도명산 등산로 입구. 왼쪽이 화양3교이고 오른쪽이 도명산 들머리다.

 

산행길은 능선이 나타날 때까지 단조롭다. 딱히 내세울만한 조망터도 없다. 전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세다. 게다가 안전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스릴이 있거나 위험하지도 않다. 그런데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것은 속리산 국립공원의 일부이고 화양구곡과 한 몸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멀리 화양구곡의 중심부에 위치한 송시열의 암서재가 내려다보인다. 도명산 입구에서 능선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그런데 능선에 오를 때까지 남수가 멋지다고 감탄한 소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능선부터 정상까지는 전반적으로 편한 길이나 가끔씩 나타나는 암벽과 급비탈에는 나무데크를 설치해 어려움이 없다. 데크를 따라 오르다보면 멀리 도명산 정상이 보인다. 한눈에 대형 암반으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5개의 큰 바윗덩이다.

능선에서 바라본 도명산 정상

 

정상이 멀지 않은 곳에 남수가 말한 소나무 군락이 펼쳐있다. 9월 중순인데도 연초록 옷을 입고 있는 게 신기하다. 소나무들은 암반 사이 쌓인 흙에 질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남수의 소나무 찬가가 비로소 와닿는다. 사람이 한 명 정도 드나들 수 있는 굴바위를 지나 조금더 올라가니 비로소 642m 정상이다. 주차장에서 2시간 20분 걸렸다.

정상에서 둘러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방금 지나온 소나무들은 작은 숲을 이루고 있고 저 아래 화양구곡이 뱀꼬리처럼 길게 늘어져있다. 남으로는 낙영산과 조봉산이, 동으로는 가령산과 그 너머 대야산이 아는체 한다. 다리가 튼튼하고 폐활량이 좋은 등산객 중에는 화양3교에서 올라 도명산~낙영산~가령산을 거쳐 9곡 상류의 자연학습원 방향으로 하산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세한 코스는 소백산 국립공원 사이트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도명산 정상

 

9월 중순인데도 소나무가 연초록 옷 입고 있어

정상에서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까지 하산길은 2.8㎞다. 정상에서 300m를 내려가면 안내목이 학소대 2.5㎞, 반대방향으로 공림사 2.4㎞를 가리킨다. 공림사는 낙영산 아래 아늑한 사찰이다. 이곳에 우람하게 가지를 뒤튼 느티나무 노거수 20여 그루가 서 있다. 이중 종무소 옆에서 자라는 느티나무가 가장 나이가 많다. 수령 1000년을 훌쩍 넘겼다는데, 촛농이 흘러내린 것 같은 형상의 나무 밑동 크기에 입이 딱 벌어진다.

정상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니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대형 암벽이 지나가는 산객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본다. 수직 암벽에 각각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마애삼존불상이다.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다. 안내문을 보자. <ㄱ자로 꺾어진 암벽에 선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불상은 9.1m의 규모에 안면(顔面) 길이만도 2m에 이르며 세 불상 중 가장 세련된 솜씨를 나타내고 있다. 중앙 불상은 더욱 커서 전체 높이가 14m에 이르는 정면상으로 하반신까지 선각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 다른 불상은 동떨어진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데 5.4m 규모다. 다른 부처와 달리 약간의 돋을새김 기법을 사용하여 곡선미의 세련된 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불상 머리 위쪽 윤곽이 오랜 세월 비바람에 마모되어 사라지자 최근 누군가 일부러 긁어서 윤곽을 낸 것처럼 보인다. 부처님의 발끝에서는 물이 샘솟고 있다. 어떤 이는 그 물로 목을 축였다고 하는데 샘물 안에 올챙이도 보이고 해서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학소대로 내려가는 하산길(왼쪽)과 마애삼존불상

 

하산길은 흙길에 통나무 계단의 연속이어서 경사가 있어도 힘들지 않다. 물론 올라오는 등산객은 땀 좀 흘릴 것이다. 마지막 10분 거리는 수레가 다닐 정도의 길이어서 산책길이나 다름없다. 하산 종착점인 학소대 옆 계곡 철다리에 도착하니 벌써 1시간 30분이 지났다. 쉬는 시간 포함해 순수 산행 시간이 4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도명산은 화양구곡을 거치지 않고는 접근이 쉽지 않다. 물론 도명산 정상을 경계로 화양구곡 반대쪽(남쪽)에 공림사 코스가 있으나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화양구곡까지 둘러볼 수 있는 코스를 선호한다.

 

■화양구곡(華陽九曲)

▲구곡(九曲)의 시작은 중국의 주희

화양구곡(華陽九曲)의 구곡(九曲)은 굽이치는 계곡의 절경 중 멋지고 아름다운 아홉 곳 기암괴석을 뜻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구곡을 설정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후학을 가르치고 음풍농월했다. 구곡의 시작은 중국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자(1130~1200)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이다. 주자가 터를 잡고 신진들을 가르친 곳은 예전부터 중국에서 신선이 살았던 곳으로 이름난 명승지이며 또 주자로 인해 그 명성이 배가된 중국 복건성 숭안현에 있는 무이산의 아홉구비의 계곡이다. 주자는 54살 되던 1183년에 이 구곡 중 다섯 번째 구비에 해당하는 은병암 밑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세우고 제자를 가르쳤다. 이후 무이구곡은 구곡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성길(1562∼1620년 이후)이 1592년 그린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견본담채, 33.5×398.5㎝,). 임진왜란을 당해 군에 종사하고 있을 때 진중에서 그렸다고 전한다.

 

무이구곡을 본뜬 한국의 구곡은 고려 말 문장가인 안축이 경북 영주시 소백산 계곡에 죽계구곡(竹溪九曲)을 설정하면서 시작된다. 죽계구곡은 소백산 초암사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상류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에 걸쳐 흐르는 계곡이다. 이후 자연을 통해 도를 체득하려는 활동들이 선비들 사이에 유행하면서 전국에 이런저런 구곡이 앞다퉈 설정되었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문헌에 기록되고 실체가 확인된 구곡은 102개다. 경북이 53개로 가장 많고 충북 27개, 전북 4개, 충남·경기·경남·전남 각 3개, 강원·울산 각 2개, 서울·대구 각 1개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북의 소백산권역과 충북의 속리산권역에 구곡이 특히 많은 이유는 산이 넓고 깊어 계곡이 발달해 조선시대 선비들이 자연을 감상하고 학문하기 좋은 장소로 이곳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화양구곡은 어떤 곳

전국 102개 구곡 가운데 최고 명성을 자랑하는 곳은 충북 괴산의 화양구곡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회 이상 등장할 정도로 역사성도 있다. 뛰어난 경관에 9군데 명소 모두 흐려진 곳 하나 없이 뚜렷하다. 물줄기와 지형이 바뀌고도 남을 수백여 년이 흘렀는데도 거의 완벽하게 본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많은 구곡 중 화양구곡만큼 1곡부터 9곡까지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괴산에는 안동 10개, 영주 8개 다음으로 구곡이 많다. 화양구곡을 비롯, 선유구곡, 연하구곡, 고산구곡, 쌍계구곡, 갈은구곡, 풍계구곡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화양구곡은 조선시대 노론의 영수 송시열(1607~1689)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송시열은 ‘삼전도의 굴욕’(1637년)이 있고 그동안 사대하던 명나라가 패망(1644년)하자 청나라를 친다는 북벌론(北伐論)을 효종과 함께 주창했다. 그러나 효종의 승하(1659년)로 북벌이 무산되자 1689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23년 동안 한 해에 몇 달 간 화양동 계곡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다.

화양서원의 만동묘 (출처 괴산군청)

 

오늘날 남아있는 송시열의 자취가 화양구곡 안에 있는 화양서원과 만동묘 그리고 암서재다. 화양서원과 만동묘는 제3곡 읍궁암 부근에 있다. 화양서원은 송시열이 죽고 6년 뒤인 1695년 제자들이 스승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하고 1696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만동묘(萬東廟)는 1689년 사약을 받은 송시열이 “내가 살던 충청도 화양계곡에 명 황제를 기리는 사당을 만들라”고 한 유언에 따라 1704년 제자들이 화양동에 세운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 그리고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동묘의 만동은 선조가 쓴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처음과 끝 자를 따온 것이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명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절필동’이라는 네 글자로 충성을 표시했다. ‘황하가 만 번 휘어도 결국 동쪽으로 흐르듯, 황제 폐하를 향한 충성은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화양구곡길 일부

 

화양구곡은 충청북도 괴산군 속리산국립공원 내의 가령산과 도명산 북쪽 골짜기에서 화양동 입구까지 5~6㎞ 구간이다. 울창한 숲과 맑은 물, 그리고 너른 반석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있다. 화양구곡은 전국 구곡 중 유일하게 2014년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구곡의 주요 구성요소인 바위, 소(沼), 절벽 등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화양동은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이라 불렀으나, 송시열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중국을 뜻하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일양래복(一陽來服)’의 ‘양(陽)’을 따서 화양동으로 불렀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의 극단을 보여 준 장소라는 비난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화양계곡에 구곡을 설정한 이는 송시열의 제자들이다. 송시열 사후 권상하가 처음 구곡을 설정하고 민진원이 구곡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그 이름을 전서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진원이 화양구곡 9개 굽이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 확정한 시기는 1721년에서 1727년 사이일 것으로 전문가는 추정하고 있다. 화양구곡은 선유구곡(仙遊九曲)과 만난다. 선유구곡은 송시열에 앞서 이황이 이 부근을 찾았다가 경치에 반해 9개월 동안 머물면서 설정한 구곡이다. 두 구곡은 일부 명칭을 공유한다. 이를테면 경천벽, 학소대(선유구곡은 학소암), 와룡암(선유구곡은 와룡폭) 등이다.

 

▲화양구곡 답사

화양구곡은 30년만에 처음이다. 1990년 여름, 당시 회사 노조 풍물패와 겸사겸사 화양구곡에서 더위를 식혔는데 바위 위에서 놀았던 것 말고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 회사를 떠나 물어볼 사람도 없다. 화양구곡을 미리 정리하면 제1곡 경천벽, 제2곡 운영담, 제3곡 읍궁암, 제4곡 금사담, 제5곡 첨성대, 제6곡 능운대, 제7곡 와룡암, 제8곡 학소대, 제9곡 파천이다. 제1곡에서 제9곡까지 3㎞ 정도 거리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데 왕복 3시간 정도 걸린다.

 

1곡 경천벽(擎天壁), 2곡 운영담(雲影潭), 3곡 읍궁암(泣弓巖)

화양구곡은 승용차로 화양 제1교를 건너면서 시작된다. 제1곡인 경천벽은 화양 제1교를 건너 우측으로 꺾어지자마자 계곡 건너편에 있으나 곧 나타날 주차장만 신경쓰다가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경천벽은 높이 솟은 기암괴석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경천(擎天)은 ‘하늘을 떠받치듯 높이 솟았다’는 뜻이다. 오른쪽 바위 정면에는 민지원이 쓴 ‘擎天壁’이 선명하고, 왼쪽 바위에는 ‘華陽洞門(화양동문)’이 송시열의 글씨로 새겨져있다.

제1곡 경천벽

 

답사는 경천벽에서 300m 정도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대형 주차장에 주차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쉬운 것은 주차 관리를 민간에 맡기고 주차비로 5000원이나 받는다는 것이다.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공원 안 화장실을 이용하란다. 화장실 관리가 싫어서 다른 곳을 안내한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화양동 초입은 2차선 아스팔트 길이지만 가로수 나뭇가지들이 도로 위까지 뻗어있어 쾌적하다.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1㎞ 정도 걸어 올라가면 화양2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다리 옆 보(洑) 위로 물이 힘차게 흘러내린다.

화양동 초입길

 

화양2교를 건너 100m 정도 올라가니 소나무들을 떠받치고 있는 바위 벼랑이 마치 호수에 떠있는 듯한 모습으로 계곡 건너에서 손짓 한다. 그 바위 벼랑 아래가 제2곡 운영담(雲影潭)이다.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 속에 맑게 비친다’는 뜻이다. ‘雲影潭’ 글씨는 우측 아래 바위에 새겨져있다. 제3곡 읍궁암은 운영담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다. 바위가 크고 희고 둥글고 매끄럽다. 바위 위에는 돌개구멍으로 불리는 포트홀과 안내석을 세웠던 사각형 구멍이 뚫려있다. 청나라에 설욕하기 위해 북벌정책을 밀어 주던 효종이 갑자기 서거하자 정책을 추진하던 송시열이 효종의 기일 때마다 이 바위에 올라 활(弓)처럼 엎드려 통곡했다고 해서 ‘읍궁암’이다.

운영담

 

4곡 금사담(金沙潭)과 암서재(巖棲齋), 5곡 첨성대(瞻星臺)

읍궁암 부근 화양서원에서 나와 상류로 200m를 올라가니 ‘아홉골짜기 기암괴석 화양구곡’이라고 새긴 큰 바위 옆에 몇 그루의 느티나무 노거수가 강가에서 멋드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실 괴산(槐山)은 느티나무의 고장이다. 괴산군 나무(군목)도 느티나무다. 수령 100년 이상인 느티나무가 110그루, 300년 이상이 50그루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느티나무로 꼽히는 수령 800년 이상의 장연면 오가리의 느티나무(천연기념물 382호)를 비롯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만 113그루나 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는 전국에 19그루다. 괴산은 고을 이름조차 ‘느티나무 괴(槐)’에 ‘뫼 산(山)’을 쓴다. 지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괴산 땅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비롯한 노거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괴산의 마을은 어디나 수령 몇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거수 한 그루쯤을 거느리고 있다. 화양동계곡 여기저기에서도 오래된 느티나무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제4곡 금사담은 느티나무에서 조금더 올라간 곳에 있다. 깨끗한 모래가 보이는 계곡 속의 못인데 물속으로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고 해 금사담이다. 일찍이 송시열이 왕래할 당시에는 물고기를 잡는 작은 배가 아니면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이 얕고 깊은 곳을 따라 옷자락을 걷고 건널 수 있으니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골짜기의 형세가 바뀜을 볼 수가 있다. 금사담 옆 큼직한 바위 위에 송시열이 학문을 연구하고 수양한 암서재가 세워져있다. 기품있는 모습으로 일년 내내 유유히 흐르는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시열은 60세이던 1666년 금사담 위에 ‘바위에 튼 둥지’라는 뜻의 암서재를 짓고는 아예 정착했다. 金沙潭(금사담) 글씨는 암서재를 받치고 있는 큼직한 바위의 시커먼 벽면에 세로로 새겨있다. 현재의 암서재는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금사담에서 5분 거리의 도명산 입구에 놓여있는 화양3교 위에서 화양천 상류를 바라보니 비가 온 후라 계곡 물에 힘이 넘친다. 화양3교는 암서재, 금사담, 첨성대를 비롯, 아름다운 화양계곡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경관 포인트다.

금사담과 암서재

 

화양3교를 건너면 계곡 건너 도명산 자락에 큰 바위가 첩첩이 층을 이루고 있는 첨성대(제5곡)가 우뚝 솟아있다. 그 위에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다고 해 첨성대다. 산길을 50m 정도 오르면 첨성대 암벽이다. 바위에 ‘만절필동(萬折必東)’ 글자가 크고 힘찬 글씨로 새겨져있다. 선조가 임진왜란 후에 쓴 글씨로 경기도 가평의 조종암에 새겨진 것을 베껴 옮긴 것이다. 명나라를 사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한 송시열의 결의를 담고 있으나 송시열의 지나친 사대는 지금도 비판을 받고 있다. 다른 글자도 바위벽에 새겨져 있다.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은 명나라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송시열의 친필을 각자(刻字)한 것으로 ‘천지는 대명나라 것이요, 세월은 명 숭정제 것’이라는 뜻이다.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뜻의 ‘非禮不動(비례부동)’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를 각자한 것이다.

 

6곡 능운대(凌雲臺), 7곡 와룡담(臥龍岩), 8곡 학소대(鶴巢臺)

첨성대를 감상한 후 계곡 따라 200m를 올라가면 왼편에 제6곡 능운대가 있다. 우뚝 솟은 큰 바위가 능히 구름을 찌를 듯하다고 해 능운대다. 능운대 정상의 평평한 바위에 ‘凌雲臺’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첨성대 조망도 좋다고 하니 한번쯤 올라갈 볼 일이다. 용이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명명된 제7곡 와룡암은 능운대에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다. 큰 바위가 계곡변에 가로로 걸쳐 있고, 전체가 구불구불하여 용을 연상시킨다. 臥龍岩(와룡암) 글자도 바위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와룡암에서 더 걸어 올라가면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장송이 멋스러운 자태를 뽐내는 학소대(8곡)가 기다리고 있다. 옛날 청학이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 치며 보금자리를 이뤘다고 해서 명명된 것으로 전해진다. 도명산 산행의 날머리와 가깝다. 8곡에서 9곡까지는 오르막이다. 거리도 1㎞ 이상 떨어져 있다. 길은 계곡과 멀어지면서 높아진다. 높아진 숲길을 걷다 보면 비탈면 쪽 솔숲 사이에 무더기를 이룬 바위가 있다. 형상이 영락없는 거북이 모양의 바위다. 일부러 만든 듯 또렷하고 머리와 뒷발까지 계곡으로 내려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와룡암(왼쪽)과 능운대

 

9곡 파천(巴串) 은 파곶으로도 읽어

거북바위를 지나면 제9곡 파천으로 내려가는 숲길이 나온다. 학소대에서 20분 거리다. 5분 정도 계곡에 내려서면 희고 깨끗하고 매끄러운 바위가 넓게 펼쳐진다. 너른 계곡 전체가 파천이다. 물도 좋고 바위도 좋다. 너럭바위에 앉아서 물에 발을 담그면 마치 신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1744년(영조 20) 송주상이 편찬하고 1861년(철종 12)에 송달수·송근수 등이 증보해 간행한 ‘화양지(華陽誌)’에서는 파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파곶은 계곡 가운데 있다. 흰 바위가 편평하게 퍼져 있는 옥반과 같다. 깨끗하고 반드러우며 티끌이 없어서 수천 명이 앉을 수 있다. 계곡 물이 바위를 꿰고 흐르는 것이 마치 큰 뱀과 같기 때문에 파곶이라 이름 했다. 이곳은 화양동의 첫째가는 절경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만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했다.

제9곡 파천

 

파천 위를 지나는 계곡물 소리가 장쾌하고 리드미컬하다. 화양구곡 최고의 절경이다. 공원 측의 안내문에는 파천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시냇물이 파(巴)자 모양으로 흘러가고, 물길이 반석 사이로 지나는데 곶(串)자를 닮아서 파곶으로 읽기도 한다. 파천의 ‘串’은 천으로도 읽히지만 곶으로도 읽힌다. 파천 옆에는 두꺼비와 흡사한 모습의 바위가 있어 나 홀로 ‘두꺼비 바위’로 작명했다.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길이 워낙에 편하고 올라올 때 지나쳤던 곳도 보이고 계곡 물소리를 친구삼아 걸으니 전혀 지겹지 않다. 동행해준 숙희씨가 있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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