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김두한 국회에 똥물 투척

↑ 왼쪽은 오물 박스를 들고 발언대에 선 김두한 의원이고 오른쪽은 오물을 투척하는 모습이다.

 

김두한의 정치 생애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이면서 퇴장을 알리는 신호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이병철 회장이 “건설 중인 한국비료를 국가에 바치고 모든 사업 활동에서도 손을 떼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1966년 9월 22일, 열혈남아 김두한(1918~1972) 의원이 마지막 질의자로 국회 발언대 위에 섰다. 그가 “나는 감옥을 별장같이 드나든 사람이며 또 들어갈 결심을 했다”,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주로 행동에 옮기기를 잘한다”고 말할 때만 해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김두한은 뒤이어 “불의와 부정을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은 피고”라며 자신이 갖고온 종이 박스를 열더니 “이건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먹어라”며 박스 안에 든 통을 들어 국무위원석 탁자에 쏟아부었다. 자신의 집에서 퍼온 똥물이었다. 정일권 총리, 장기영 경제기획원장관, 김정렴 재무장관, 민복기 법무장관, 박충훈 상공장관 등이 무방비 상태에서 똥물을 맞았다. 본회의장은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고 장내는 똥냄새가 진동했다.

김두한의 정치 생애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였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퇴장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느닷없이 벌어진 희대의 사건에 정일권 총리는 “모욕 받고는 국정을 보좌할 수 없다”며 국무위원 총사퇴를 발표했다. 국회는 징계안을 회부했다. 이틀 뒤인 9월 24일 김두한은 의원 사직서를 냈다. 사직서가 국회를 통과하자 국회의장(議場) 모독과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 수감되었다. 45번째로 기록된 이날의 철창행은 12월 21일 병 보석으로 끝이 났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명멸한 수많은 주먹 가운데 으뜸

김두한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명멸한 수많은 주먹 가운데 으뜸이었고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살아서는 그 자신의 입으로 부풀려진 무용담으로, 죽어서는 소설(조선일보 연재소설 ‘인생극장’)과 영화(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그리고 드라마(SBS ‘야인시대’)와 만화 등으로 장르와 시대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재현되며 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두한은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 김좌진(1889~1930) 장군이었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이 그렇듯 김두한 역시 가난에 내몰렸고 이 때문에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장군의 아들은 청계천의 수표교 밑에서 자랐다. 회고록에서 김두한은 “나를 협객으로 만들어준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투옥시켜 교동보통학교 2학년생을 거리로 내몬 일본제국주의”라고 회고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조선총독부 요시찰 인물로 등록되어 광복이 될 때까지 주기적으로 유치장을 순회했다”고 썼다. 일본계 하야시패와 영역 다툼을 벌이다보니 자연스럽게 협객이나 항일주먹으로 인식된 것일 뿐 사실 김두한은 주먹에 의지해 호구를 해결하는 주먹패였다.

해방 후 유명 만담가 신불출의 영향을 받아 좌익계열의 조선청년전위대에 가담했다가 1946년 4월 유진산이 조직한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행동대장 격인 감찰부장을 맡은 것을 기점으로 우익으로 돌아섰다. 이때의 변신에 대해 딸 김을동은 “아버지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김좌진 장군 암살범은 공산당원’이라는 주위 사람의 한마디에 그냥 확 돌아버린 것“이라고 했다. 다른 주장도 있다. “김좌진 장군의 피살은 일제강점기에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김두한이 모를 리 없었다“면서 “좌익이자 그의 죽마고우 주먹패였던 정진용이 세력 범위를 자신의 영역 쪽으로 넓혀와 우익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김두한은 1946년 9월 철도노동자들이 용산역에서 파업을 벌일 때 대한민청 별동대를 이끌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0월의 대구폭동 때도 좌익을 타도하는데 선봉에 섰다. 1947년 4월 20일 신불출, 문예봉 등 좌익 연예인들이 서울 명동의 국제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신탁통치 지지를 내용으로 한 공연을 벌일 때도 부하들과 함께 급습해 정진용 등 여러 명을 납치해 린치를 가했다. 이때 정진용을 포함 2명을 죽여 김두한은 부하들과 함께 미군에 체포되었다.

김두한의 딸 김을동 전 국회의원(가운데)의 풍문여고를 졸업식에 참석한 김두한과 어머니

 

“김두한의 돈은 본 사람이 임자”

한국인 판사 덕에 3명에게만 2~5년형이 선고되고 김두한 등에게는 벌금형이 선고되자 미·소공동위에 참석한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가 하지 중장에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김두한은 1948년 1월 미군정의 재판을 다시 받아야 했다. 재판은 3월 15일 김두한 등 14명에게 교수형, 2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으나 하지의 감형으로 김두한에게만 교수형이 선고되고 나머지는 종신형 혹은 징역형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김두한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10월 장출혈로 가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생활은 여전했다.

1954년 5월에는 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해 기생들의 도움을 받으며 주먹 시절 자신의 주무대였던 서울 종로을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화려한 변신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부는 삐딱한 김두한을 당선 6일 만에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했다. 의원들의 석방 결의로 풀려나 우여곡절 끝에 자유당에 몸을 담았으나 곧 한국 야당의 대표 격이 된 민주당에 가담함으로써 극우 반공투사에서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적 반공투사로 또 한 번 변신하게 된다. 4·5대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그는 1965년 11월에 실시된 제6대 용산 보궐선거에 출마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이때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 사건으로 또다시 구속되는 신세가 된다. 감옥생활이 지긋지긋할 만도 했을 텐데 석방 후 9개월 만에 똥물을 투척해 또 한 번 감옥행을 자처했다.

김두한은 무심한 가장이었다. 기생들한테는 그렇게 돈을 잘 썼으면서도 집엔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순국선열의 유족에게 지급되는 연금도 몽땅 고아원으로 보냈다. 주변에선 “김두한의 돈은 본 사람이 임자”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돈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다. 오물사건 후 광산업 등 몇몇 사업에 손을 댔으나 부진을 면치 못해 결국 2년 동안 고혈압에 시달리다 1972년 11월 18일 서울의 한 호텔 객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어 나흘 만인 21일 세상을 떠났다. 김을동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일 다하며 살다 간 사람”,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고 두려움도 없었던 기인”이라고 아버지를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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