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1948년 제헌헌법 제정史] 우여곡절 끝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지배 원리를 새겨넣음으로써 대한민국 성장·번영의 초석 다져

↑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들이 이승만(앞줄 가운데) 국회의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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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1948년 대한민국 첫 헌법 제정의 세 주역은 유진오, 행정연구회(최하영), 권승렬

1945년 8월 해방 후 미 군정을 거쳐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이 논의되고 있을 때, 개별적으로 새 정부의 헌법 초안을 만드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었다. 먼저 관심을 보인 그룹은 일제 시대 고위관리 출신들의 모임인 ‘행정연구회’였다. 일제 때 법률 공부를 한 사람들이 헌법 초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익희의 제안에 따라 최하영의 주도로 행정연구회 첫 모임이 열린 것은 1945년 12월 17일이었다. 최하영(1908~1978)은 도쿄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1933년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조선총독부에서 근무했던 관료 출신이었다. 해방 직전에는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정책수석 정도에 해당하는 총독부 관방농상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 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행정연구회는 1946년 1월 10일부터 3월 1일까지 독일의 바이마르 헌법을 참고해 1단계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가 2년 뒤인 1948년 5월 제헌의회 개원을 앞둔 시점에 2단계 헌법 초안을 준비했다.

당시 행정연구회와 별개로 헌법 초안을 작성하느라 분주했던 사람은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오(1906~1987)였다. 유진오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1회 졸업생으로 일제 하에서는 보성전문 교수로 재직하면서 언론인과 작가도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미 군정에서 향후 대학교육의 근간이 될 법령 초안을 마련하고 남조선과도정부 때는 사법부 내 조선법전편찬위원회의 하부 조직으로 구성된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유진오가 홀로 헌법 초안을 작성한 것은 1948년 1월이었다.

행정연구회와 유진오는 이처럼 따로 작업을 진행하다가 1948년 5월 신익희의 중재로 만나 각자 만든 헌법 초안을 비교·검토했다. 당시 행정연구회 소속 회원들은 5월 14일부터 2단계 헌법 초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유진오와 최하영이었다. 이들이 헌법 초안 최종안을 완성한 것은 제헌국회가 개원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5월 31일 새벽 2시였다. 세칭 ‘유진오안’인데, 유진오는 자신이 작성한 헌법 초안을 토대로 행정연구회와 함께 심의했기 때문에 ‘유진오안’이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지만 행정연구회 소속 최하영은 다른 주장을 폈다.

최하영은 세칭 ‘유진오안’이 사실은 행정연구회의 2단계 헌법 초안을 토대로 완성한 것이지만 자신들이 일제 때 관리를 지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대놓고 떠드는 것이 부담스러워 사회적으로 혹평을 받지 않고 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한 경험을 가진 유진오의 이름으로 제헌의회 법전기초위원회에 제출토록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1946년 3월 행정연구회가 만든 1단계 헌법초안을 ‘기본’으로 하고 유진오의 사안(私案)을 ‘참고’로 해서 행정연구회 2단계 헌법초안을 만들었는데 그게 ‘유진오안’으로 불렸다고 주장했다. 최하영은 1948년 8월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후에는 심계원장(오늘날의 감사원장)을 지냈다.

고려대 총장 시절(1955년)의 유진오

 

헌법기초위원회 심의 첫날 ‘대한민국’ 국호 결정

헌법 제정과 정부 수립을 임무로 하는 제헌국회 첫 회의는 헌법 초안이 완성된 1948년 5월 31일 열렸다. 그날 제헌국회는 국회의장 이승만, 부의장 신익희·김동원을 선출한 뒤 곧바로 헌법 제정 준비에 착수했다. 왕조체제와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민주공화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시발점인 헌법 제정은 크게 3단계를 밟았다. 1단계는 전형위원 선출이었다. 2단계에서는 전형위원이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고, 그 기초위원이 헌법초안을 작성했다. 3단계는 국회에서의 헌법 독회 및 심의였다.

이에 따라 제헌의원들은 제헌의회 개원일인 5월 31일 헌법, 정부조직법, 국회법 등의 제정을 위한 임시준칙을 확정했다. 임시준칙은 제헌의원 가운데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30명과 국회법 및 국회규칙 기초위원 15명을 선출하되 이 기초위원을 선출하기 위한 10명의 전형위원을 별도로 선임하도록 규정했다. 또 헌법 제정 작업은 헌법기초위원회에서 헌법안을 기초하고 본회의에서 이를 심의·확정하는 순서로 진행되도록 규정했다. 임시준칙에 따라 전형위원들은 6월 1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30명과 국회법 기초위원 15명을 확정했다.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들은 6월 3일 첫 회의를 열고 한민당의 서상일을 위원장, 독립촉성국민회 이윤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유진오·권승렬·윤길중·고병국·임문환 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 국회법 및 국회규칙 기초위원 15명은 국회법 초안을 6월 9일 본회의에서 먼저 통과시키고 개정할 내용이 있으면 헌법 제정 후 개정하기로 했다.

국회 개원식(1948.5.31)

 

6월 3일 첫 모임을 가진 헌법기초위원회의 중요 안건은 국호 제정이었다. 당초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무난하게 결정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제헌의원들 사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생각이 많은 데다 정부 출범을 주도하는 이승만 국회의장이 국호로 ‘대한민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국민회와 함께 제헌국회의 양대 세력이었던 한민당이 ‘고려공화국’을 국호로 내놓으면서 논의가 복잡해졌다. 광복 이후 전개된 국호 논쟁에서 우파는 ‘대한’, 좌파는 ‘조선’을 내세웠고 ‘고려’는 중도파가 선호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김구 세력과 함께 우파의 주축이었던 한민당이 ‘고려’를 주장한 것은 뜻밖이었다. 한민당이 ‘고려’를 고집하면서 국호는 헌법기초위원회의 헌법안 심의 첫날인 6월 7일 표결에 부쳐졌다. 그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 집계되어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대한민국’이 국호로 결정된 사실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7월 2일자 1면

 

이승만, 대통령중심제 꿈 포기하지 않고 막판 뒤집기에 성공

국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헌법 제정이었다. 본격적인 심의에 앞서 헌법기초위원들을 당혹케 한 것은 6월 4일 발생한 돌발 변수였다. 당초에는 헌법기초위원회가 세칭 ‘유진오안’을 토대로 심의할 계획이었는데 권승렬 전문위원이 유진오안과 별개로 헌법 초안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권승렬은 일제 시대에 변호사로 활동하며 신간회에 참여하고 독립운동가를 변론한 인물로, 정부 수립 후 초대 검찰총장과 2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권승렬

 

두 개의 헌법안은 전체적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으나 일부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유진오·행정연구회 헌법안은 ‘한국헌법’이란 이름이 있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한국 인민(人民)은…”으로 시작되는 전문(前文)에 이어 제1조 “한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한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으로부터 발(發)한다”로 되어 있었다. 권승렬 헌법안은 이름과 전문은 없고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발한다”로 되어 있었다. 이후 헌법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국무총리·국무회의 용어, 인민 대신 국민이라는 용어 등은 권승렬안에 따른 것이다. 표결에 부친 결과 유진오·행정연구회 안이 13표, 권승렬 안이 11표를 얻어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안’을 심의 주축으로 삼고 ‘권승렬안’을 참고해 각 초안을 한 조문씩 읽고 첨삭‧토의하는 독회(讀會) 방식으로 헌법안을 완성하기로 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조문별 토의가 6월 7일 시작된 가운데 각 정파가 촉각을 곤두세운 것은 6월 10일 시작된 권력 구조 심의였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 양원제와 단원제, 대통령 직선제와 간선제 중 각각 하나를 선택해야 했는데 유진오안의 골자는 내각책임제와 양원제였다. 그러나 한민당이 단원제를 선호해 6월 10일 단원제로 결정되었다. 대통령 선출 방식이 간선제로 결론이 난 가운데 헌법 기초위원들은 6월 11일 내각책임제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그런데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제헌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이 연출되었다. 기초위원들이 내각책임제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는데도 이승만 국회의장이 대통령중심제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막판 뒤집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승만은 6월 21일 헌법기초위원들에게 “대통령제를 채택하지 않으면 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치적 협박에 가까운 이 말의 파장은 컸다. 이승만이 정부 구성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취약한 제헌국회의 정당성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도 있는 중대 사안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김구가 5·10 총선에 불참하고 현실 정치에서 발을 뺀 상태에서 제헌의회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거의 유일한 축이었다.

이승만의 폭탄선언에 헌법기초위원회를 주도해 온 한민당의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결국 백관수·김도연·서상일·조병옥 등 한민당 중진들이 그날 밤 서울 계동의 김성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한민당 당수 김성수는 “건국 초에 정권 교체가 잦으면 정치적 혼란을 막기 어렵고, 새 나라의 초석을 놓는 데도 비능률적이므로 이 박사의 의사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며 한민당 의원들의 불만을 무마시켰다. 4·3 사건 등 좌우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승만 박사에게 강력한 통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날밤 내각책임제가 대통령중심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튿날인 6월 22일, 전날 밤 급하게 수정한 헌법안이 헌법기초위원회 회의에 보내졌다. 번안(안건을 뒤집음) 동의는 출석인원 총 22명 중 1명만이 기권하고 나머지 전원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제헌의회, 해방 3년 만에 대한민국 골격을 완성

헌법안은 6월 23일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본회의는 헌법기초위원회가 결정한 헌법 조항 전부를 통상의 회의 방식대로 3독회(讀會)로 진행했다. 3독회는 6월 23일에 시작해 7월 12일에 마무리 되었다. 제1독회에서는 국호, 인민과 국민의 차이, 정부형태, 국회 구성 문제 등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로, 국회 구성은 단원제로 확정되었다. 제2독회에서는 헌법 전문의 수정, 신체의 자유 조항, 교육 관련 조항, 국회 구성, 대통령 선출방식, 국무총리 임명 시 국회 동의, 대법원장 및 대법관 임명 시 국회 동의, 농지와 산림분배, 반민족행위자 처벌 등이 논의되었다. 7월 12일 진행된 제3독회에서는 헌법 제103조까지 모두 낭독한 뒤, 정확하게 표현됐는지만 다시 훑은 뒤 전원일치로 헌법 통과가 선포되었다.

예상대로 독회 과정에선 논쟁이 치열했다. 주요 쟁점은 임시정부의 계승 여부, 정부 형태, 농지개혁, 반민족행위자 처벌 등이었다. 임정 계승 여부는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헌법 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했다”고 규정했다. 임정의 법통이 아닌 정신을 계승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임정의 법통은 1987년 헌법에 이르러 명시되었다. 대통령 독재에 대한 우려도 컸다. 조봉암 의원은 “행정부 독재를 방지하려면 국회의 우위적 권한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통령 권한을 강력히 통제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국무원은 합의체 의결기관으로 규정되었으며, 대통령의 국정행위는 국무위원의 부서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그 제한들은 이후 개헌을 거쳐 하나씩 무력화되었다.

제헌 헌법은 경제에 관한 장을 별도로 두었다. 그중 농지개혁이 최대 쟁점이었다. 농지는 농민이 자작(自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 인식이었다. 당시 농지의 65%가 소작지였다. 헌법초안 제85조는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함을 원칙으로 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했다. 하지만 ‘원칙으로 한다’는 모호한 표현이 문제였다. 결국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확정적 수정안이 가(可) 94, 부(否) 65로 최종 통과되었다. 이는 1949년 농지개혁법의 헌법적 근거가 되었다. 반민족행위 처벌 문제도 뜨거운 쟁점이었다. 헌법초안 제100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1945년 이후의 ‘악질적 반민족 행위’ ‘반역 행동이라든지 간상배(奸商輩)의 행위’도 처벌하자는 의견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대상은 미군정하의 정상배나 친일 경찰이었다. 그러나 근소한 차이로 원안이 가결되었다.

한민당이 ‘고려’ 국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으면서 국호 문제가 또다시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대한민국’ 국호를 반대하는 입장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조봉암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뿐 아니라 국내외 다른 독립운동 세력들도 아우르는 국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국내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조봉암은 ‘대한민국’ 국호가 임정의 테두리 밖에서 독립운동을 한 세력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결국 국호도 찬반토론에 부쳐졌고 7월 1일 진행된 축조심의에서 ‘대한민국’ 국호가 찬성 163표, 반대 2표로 통과되었다.

이승만 제헌의회 의장이 1948년 7월 17일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7월 12일 제28차 본회의에서 헌법안 제3독회가 끝나고 곧이어 전문 10장, 103조의 헌법안이 제헌의원 전원의 기립 표결 찬성으로 최종 통과되었다. 헌법은 7월 16일 통과된 정부조직법과 함께 국회의사당에서 성대하게 공포되었다. 헌법의 서명·공포는 부칙 제99조에 따라 국회의장 이승만이 했다. 헌법의 서명 공포는 국가 원수의 권한에 속하는 사항이지만 당시는 대통령이 없는 상황이어서 이승만 의장이 서명하고 공포사를 낭독했다.  이로써 국망(國亡) 38년, 해방 3년 만에 대한민국의 골격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조선 왕조 시대와 일제 식민 지배만을 경험하였음에도 이처럼 온 국민이 참여하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제정한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대한민국 헌법 공포(1948.7.17)를 기념해 제헌의원들이 기념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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