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제9차 헌법개정과 역대 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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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충실히 반영하고 민주 절차 밟았다는 점에서 의미 인정받아 

야당인 신민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워 돌풍을 일으킨 것은 1985년 2월의 ‘2․12 총선’이었다. 신민당은 12대 국회 개원 후 여세를 몰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의 반대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신민당이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에 총력전을 펼치는 가운데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개헌 정국은 고문정권 규탄을 외치는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로 이어졌다.

전국이 이렇게 요동치는데도 전두환 대통령은 4월 13일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소모적인 개헌 논의는 1988년 올림픽 이후로 미루고 차기 대통령은 5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출하겠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른바 4·13 호헌조치였다. 민심은 거세게 반발했다. 야권과 재야세력은 이런 민심을 모아 1987년 5월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고문조작 규탄과 호헌 철폐를 외치며 이른바 ‘6·10 항쟁’을 전개했다. 결국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 등 시국 수습책을 제시하는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다.

개헌 협상은 6․29 선언 후 급물살을 탔다. 먼저 구성된 것은 여야 동수의 8인 정치회담이었다. 8인 정치회담은 1개월 간의 논의 끝에 5년 단임제의 개헌안을 확정하고 8월 31일 합의문에 서명했다. 헌법 전문과 본문 130개 조항에도 완전 합의를 이룸으로써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에 의한 개헌이 이뤄졌다. 이후 헌법개정 기초소위의 개헌안 초안 완성(9.17)과 헌법개정안 발의(9.18)를 거쳐 10월 12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다. 본회의 투표 결과 총 투표자 258표 중 가 254표, 부 4표로 가결되었다. 개헌안은 10월 27일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되어 10월 30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1988년 2월 25일 0시를 기해 제5공화국은 사라지고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처럼 9차 개헌은 어느 때보다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밟았다는 점에서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6공화국 헌법은 2019년 현재, 개헌 사상 가장 긴 수명(32년)을 유지하며 우리 헌정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 헌법은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라 현실과 틈새가 벌어진 부분도 많다. 현행 헌법에 헌법재판소와 지방자치에 관한 조문이 각각 3개와 2개에 불과한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또한 여야 정치권의 주도 하에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고, 장기적인 국가 비전이 반영되지 못한 점도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장기집권의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진 현재적 상황에서, 또한 소득 2만 달러를 넘어 국민의 수준이 한껏 높아진 상황에서 현행 헌법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발췌개헌(1952년), 헌정사상 최초의 헌정 파괴 행위

우리 헌법은 1948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1차례의 헌법 제정과 9차례의 헌법 개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은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 요소를 절충했다. 대통령제적 요소는 4년 임기의 대통령이 국가원수 겸 행정부 수반 역할을 하고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을 임명하며 법률안 거부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의원내각제 요소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고 국무위원과 국회의원의 겸직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제1차 헌법 개정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7월 4일 전시수도 부산에서 이뤄졌다. 목적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집권이었다. 제헌 헌법에는 대통령의 임기가 4년으로 규정되어 있어 이승만으로서는 원천적으로 재임이 불가능했다. 더구나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였기 때문에 당선 여부가 불확실했다. 그래서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정부안과 의원내각제를 주 내용으로 한 의회 발의안의 일부를 각각 발췌, 정․부통령을 국민 직선으로 하고 단원제 국회를 양원제로 하는 개헌안을 만들어 이를 관철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밤, 의사당 문이 봉쇄된 채 군경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163명이 찬성하고 3명이 기권함으로써 기립 표결로 통과되었다. 대통령선거는 1952년 8월 5일 국민 직선으로 치러졌고 이승만은 523만표(74.6%)를 얻어 재선에 성공했다. 이처럼 발췌개헌은 헌정사상 최초의 헌정 파괴 행위였으며 전시독재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차 개헌(1960년), 소급입법의 빌미로 작용

1954년 11월 29일에 공포된 제2차 개헌 역시 이승만이 장기집권의 길을 트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물이었다. 대통령의 중임을 1차로 제한한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철폐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처음에는 국회에서 재적 203명 중 135표를 얻어 개헌선 재적의원 3분의 2(135.333)에 0.333인이 미달되어 부결된 것으로 발표되었다. 하지만 이틀 후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억지 주장을 펴며 개헌선을 135표로 수정하고 가결을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60년 4·19 혁명 후 입안된 제3차 개헌은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를 방지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강화하며 공무원의 신분 및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등을 담아 추진되었다.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 양원제와 지방자치 실시 등을 규정한 3차 개헌안에는 정당 조항의 신설, 헌법재판소 신설, 중앙선거위원회 신설, 대법원장․대법관 선거제, 공무원․경찰의 정치적 중립성 보장 등이 반영되었다.

전문 103조로 된 제1공화국의 헌법 중 무려 52개 조항을 고친 3차 개헌안은 1960년 6월 15일 211명의 의원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반적으로 이때의 정부 형태를 의원내각제라고 하지만 이원집정부제 성격도 가미되었다. 즉 대통령이 형식적 원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계엄선포 거부권, 헌법재판소 심판관 임명권, 국무총리 지명권, 헌법개정안 발의권 등 실질적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11월 29일 공포된 4차 개헌은 총 10차례의 제․개정에서 유일하게 부칙만 개정한 경우다. 3차 개헌 후 5개월 만에 또다시 개헌을 추진한 것은 혁명재판 과정 중에 일어난 혼란 때문이었다. 즉 혁명재판 과정에서 ‘반혁명분자들이 위반한 정․부통령 선거법은 의원내각제 개헌이 통과된 6월 15일자로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면소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개진되어 재판이 혼란을 겪은 게 발단이었다.

 

5차 개헌(1962년), 헌정 사상 첫 국민투표 도입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있었으나 정부와 국회는 법 제정을 1심 판결 이후로 미뤘다. 그러던 중 10월 8일의 1심 판결에서 유충렬 전 시경국장만 사형을 선고받고 나머지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형을 선고받아 풀려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격분한 4․19 혁명 부상학생 50여 명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당 정부 물러가라”고 외쳤다. 국회는 그제야 헌법 부칙에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한 개헌안을 만들어 발의했다. 개헌안은 민의원(11.23)과 참의원(11.28)을 각각 통과한 후 11월 29일 공포되었다. 이에따라 12월 30일 특별법인 ‘민주반역자 임시처벌법’이 제정되고 1961년 1월 15일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설치되었다. 4차 개헌안은 일반 국민의 분노를 해소해준 측면이 있긴 하지만 이후 수차례 제정된 소급입법의 빌미가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도 크다.

1962년 12월 26일에 공포된 제5차 개헌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다. 대통령중심제 복귀, 대통령 재임 2기로 국한, 국회 단원제가 골자였다. 5차 개헌은 국회가 해산된 상태에서 헌정사상 처음 국민투표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군사정권은 1961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같은 해 6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공포했다. 정상적 상황이 아닌 비상시에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은 사실상 헌법 역할을 했다. 의원내각제 정부에서 의회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군사정부 형태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3권을 장악한 일종의 회의제였다.

군사정부는 개헌을 추진했다. 그러나 기존 헌법을 개정하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했다. 문제는 의회가 해산된 상태였다는 점이었다. 군사정부는 결국 논의 끝에 국회 의결 없이 헌법을 개정하는 방법으로 국민투표제를 도입했다. 5․16 쿠데타 세력은 12월 17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요 내용은 권력분립에 의한 대통령제, 국회 단원제, 정당제 강화를 위한 무소속 출마 금지, 당적 이탈 시 의원직 상실,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 헌법 개정 시 국민투표제 도입 등이다.

6차 개헌은 1969년 10월 21일 공포되었다. 목적은 박정희의 장기집권이었다. 기존의 3선 금지조항을 폐지하고 대통령의 재임을 3회까기 가능하게 해 이른바 ‘3선 개헌’으로 불리는 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날치기로 국회를 통과하고 10월 17일의 국민투표에서 역대 최저의 찬성률(65.1%)로 확정되었다.

 

7차 개헌(1972년), 헌법적 차원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헌법

헌법적 차원에서 가장 비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는 7차 개헌안은 1972년 12월 27일 공포되었다. 6차 개헌을 통해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박정희는 아예 대통령 직선제를 없애는 내용의 이른바 ‘유신헌법’을 추진했다. 7차 개헌안은 국회 해산, 정당활동 금지 등 비상계엄조치로 헌정이 중단된 상황에서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를 통과하고 12월 27일 공포되었다.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퇴보시키고 대통령이 임명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임기 6년에 중임이나 연임 제한이 없어 대통령의 1인 장기집권체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이밖에도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과 국회 해산권을 부여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국회의원 3분의 1도 대통령의 추천으로 선출되었다.

8차 개헌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후 12·12 사태로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에 의해 추진되었다. 신군부는 1980년 대통령과 국무회의를 대신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언론 통폐합 등의 조치를 단행한 뒤 정권 탈취의 마지막 수순으로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개헌 작업은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언론의 자유가 봉쇄된 가운데 신군부의 일방통행식 결정으로 진행되었다. 개헌안은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95.48%의 투표와 91.6%의 찬성으로 확정되고 10월 27일 공포되었다. 또다시 군부에 의해 헌정이 유린되는 순간이었다.

8차 개헌은 외부적으로 대통령의 7년 단임제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표방했지만 그 속내는 군부의 장기집권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5공화국 내내 국민들은 정권의 비민주성에 맞서 강력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국민들은 1987년 폭압적 권력에 맞서 거리로 나섰고, 마침내 열망을 9차 개헌의 헌법에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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