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리콴유
by 김지지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큰 넓이의 도시 국가다. 그런데도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2022년 기준 8만 2000달러가 넘어 세계 5위에 랭크되어 있다. 당연히 아시아에서는 1위다. 이런 싱가포르의 오늘이 있게 한 주역은 ‘싱가포르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리콴유 전 총리다. 그는 영연방 자치령이던 1959년부터 31년간 총리로 재임하면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부패를 일소하는 데는 철저했다. 무엇보다 실용성을 갖춘 정부 조직, 기업 친화적인 조세·고용 제도, 영어를 기반으로 한 이중 언어 정책, 항만·공항을 토대로 쌓은 물류 시스템 등으로 싱가포르를 ‘기업 국가’로 우뚝 서게 했다. 2023년 9월 16일은 리콴유 탄생 100년이 되는 날이다. 리콴유의 삶과 싱가포르의 역사를 알아본다.
독립, 국가 창업, 선진국 건설까지 성취한 전 세계 유일 정치인
전 세계 국가 중 독립과 국가 창업, 선진국 건설까지 성취한 정치인은 싱가포르의 리콴유(1923~2015) 전 총리가 유일하다. 이런 리콴유를 가리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수에즈 운하 동쪽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했고,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지, 인물이 시대를 만드는지의 오랜 의문에 후자라는 해답을 준 인물”이라고 극찬했다. 키신저는 리콴유를 지도자뿐 아니라 사상가로 표현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끝자락에 붙어 있는 작은 섬 나라다.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예로부터 물건이 거래되고 사람과 돈이 모이는 자유무역항으로 유명했다. 1824년 말레이반도의 말라카·페낭과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의 해협 식민지로 편입되고 1867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리콴유가 1923년 9월 16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때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리콴유의 조상은 중국 광동성에서 이주한 화교 이민자였다. 빛(光)과 영리함(耀)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李光耀(리콴유)’는 어린 시절부터 수재로 이름났다. 싱가포르의 명문 래플즈대에 수석 입학했으나 1941년 12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이 과정에서 싱가포르 내 중국 청년들을 대량학살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런데도 리콴유는 일본군 정보부에서 번역 일을 하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고향을 짓밟은 일본군에 대해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생존이 우선”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고 해명하면서 일본 점령기 경험에 대해서는 “정부의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시기”라고 회고했다.
리콴유는 종전 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유학 시절 접했던 영국의 선진 문물과 학문 그리고 그 안에서 겪었던 아시아계 인종에 대한 차별 등의 경험은 “고향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리콴유는 1950년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동전문변호사로 활동했다. 우체국 집배원과 전화 교환수 노조, 해군기지 파업 등에도 관여해 한동안 노동운동을 하는 ‘좌파’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리콴유는 31살이던 1954년 10월 실용주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의 창당을 이끌면서 사무총장으로 활동했다. 1955년 4월 총선에선 싱가포르 최다 득표로 당선되어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리콴유는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 영국 식민정부와 투쟁하는 한편 공산세력과도 맞서 싸웠다. 입법의회 전원을 선출하고 자치정부를 구성할 중대 선거인 1959년 5월 총선에서는 인민행동당이 총 51석 중 43석을 얻는 압승으로 집권당이 되었다. 리콴유는 36세 나이에 영연방 자치정부의 수반(총리)으로 취임했다.
냉혹한 실용주의를 국가 정책의 기조로 삼아
그의 첫 목표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연방 가입이었다. 세력을 키우고 있는 공산 세력으로부터 싱가포르를 보호하고 또 싱가포르를 먹여 살릴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자원도 자본도 없고 지리·정치적으로는 ‘섬’에 불과한 싱가포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싱가포르는 1963년 8월 31일 137년 만에 영연방에서 독립하고 그해 9월 16일 공식 출범한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어 연방의회 159석 중 15석을 할당받아 말레이시아 연방의 싱가포르 자치주가 되었다. 그러나 싱가포르 자치정부를 이끌고 있는 중국계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반(反) 중국 정서가 다시 불거지고,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에 시장을 열어주지 않아 연방정부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결국 싱가포르는 1965년 8월 9일 연방을 탈퇴했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이날을 독립일로 기념한다.
하지만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국토는 좁고 인구는 100만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계가 75,4%, 말레이계가 13.6%, 인도계가 8.6%로 인구 구성이 복잡했다. 국민들의 성향도 이데올로기에 따라 갈렸다. 리콴유는 “그 어떤 인종과 민족도 더 우월하지 않으며 싱가포르 국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또 하나 문제는 경제였다. 국민경제는 싱가포르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 해군기지에 빌붙어 먹고 사는 정도였다. 당면 목표는 생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 내동댕이쳐졌다고 생각한 리콴유는 내실은 차치하더라도 명목상으로라도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춰야겠다고 작심했다. 1965년 9월 유엔에 가입하고 10월 영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며 12월 헌법을 개정해 나라 이름을 ’싱가포르 공화국‘으로 바꿨다.
리콴유는 냉혹한 실용주의를 국가 정책의 기조로 삼았다. 국가의 이념이나 정체성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와 선린 우호 관계를 유지하되 그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고 국익과 원칙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국가 안보였다. 스스로 방위할 수 있는 무력이라곤 경찰 밖에 없는 상황에서 리콴유가 가장 우려한 것은 영국 해군기지가 철수할 경우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1000여 명의 말레이시아 연방 소속 군대가 싱가포르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 있는 것도 리콴유를 불안하게 했다. 밖으로는 말레이시아와 인구 1억의 인도네시아에 포위되어 있고 안으로는 말레이시아 연방군이 포진하고 있어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시급한 일은 군대 창설이었다. 리콴유가 구상한 군대는 복잡한 민족 구성과 존재조차 없었던 국가의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는 ‘거대한 용광로’ 같은 조직이었다. 군대 안에서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특정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도록 했다. 리콴유는 국민개병제를 채택했다. 18세가 되면 군대에 징집되는데 중병자가 아니면 모두 입대해야 하고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군대에 가야 한다. 대신 훈련기간은 3개월이다. 정부는 군대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유교적 권위주의’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리콴유는 “서구의 민주주의는 아시아에 맞지 않는다”며 ‘유교적 권위주의’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웠다. 중국계·말레이계·인도계 등으로 엉킨 민족 갈등을 풀기 위해 어느 민족의 모국어도 아닌 ‘식민지 언어’ 영어에 ‘제1 공용어’ 지위를 부여했다. 인구의 75%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계의 반발에도 “세계와 연결되지 않으면 과거의 어촌으로 돌아갈 것”이라며 그들을 설득했다. 사회경제적으로는 ‘12345 비전’을 내걸었다. 1명의 부인, 2명의 자녀, 3개의 침실, 4바퀴 달린 승용차, 500달러 주당 소득이라는 야심찬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당시 싱가포르는 돈도 자원도 없고, 마실 물조차도 말레이시아에서 사다 먹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없으면 오게 하자”였다. 돈, 물건,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먼저 규제를 풀었다.
경제개혁과 더불어 철저하게 추진한 것은 부패 척결이었다. 부패조사국(CPIB)을 설치해 반부패 척결의 전권을 맡겼다. 공무원 급여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가장 부패가 적은 나라로 만들었다. 리콴유는 자신의 친구나 장관들에 대한 수사를 막기는커녕 장려했다. 1986년 부패조사국이 국토개발부 장관의 뇌물 정황을 보고했을 때 리콴유는 공개 조사를 승인했다. 장관은 무고하다며 면담을 요청했지만 리콴유가 “조사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고 답하자 며칠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5년 부동산 가격의 급등으로 자신의 일가에 대한 투기 의혹이 일었을 때는 조사를 자청했고, 무혐의 결론이 난 뒤에는 차익을 모두 기부했다. 리콴유는 1997년 동아시아를 휩쓴 금융위기 때 싱가포르가 건재했던 이유로 부패 청산을 들었다.
국가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 따위는 애당초 리콴유에게 없었다. 능력만 있다면 내외국인을 가리지 않았다. 싱가포르 전역이 임금 인상 문제를 놓고 심각한 노사분규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는 TV 카메라 앞에 차트를 걸어놓은 채 노동계, 경제계 인사 등을 불러 장시간 싱가포르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 어느 싱가포르인도 총리의 해박한 지식, 정확한 논리, 끝없는 애국심을 이기지 못했다. 혹독한 법치와 반부패 제도를 확립해 거리에서 껌만 뱉어도 심하면 태형을 받을 수 있는 나라, 마약은 0.5g 이상 가져도 사형당할 수 있는 나라로 바꿔놓았다. 산업 분야에선 완벽한 자유를 부여했다. 해상 물류의 요충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극대화시켜 외국에 문호를 활짝 열었다. 다국적기업의 사업자 민원 처리 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덕분에 싱가포르는 한국·홍콩·대만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승천하고 세계적인 금융·물류 중심지로 변모했다.
이런 리콴유의 정책은 사실상 독재정치에 가까웠다. 집권 여당인 인민행동당이 의회 의석의 90%를 장악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콴유는 민주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이긴 했으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인권을 탄압했으며 야당의 정치 활동을 위축시켰다. 언론도 철저히 통제해 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반대의 목소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여론이나 지지율 등락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의 일이 아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신문기사가 아니라 집 의료 직장과 교육”이라면서 ‘언론 자유’를 경시했다. 그는 ‘실천이 아니라 말로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정치인을 경멸했다. 또한 “국민이 사랑하는 지도자가 될지, 두려워하는 지도자가 될지 사이에서 나는 늘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믿는다”면서 마키아벨리즘 신봉자라는 것도 숨기지 않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막후에서 영향력 발휘
게다가 선진국에선 있을 수 없는 사실상의 권력 세습도 강행했다. 1990년 11월, 31년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선임장관’ ‘고문장관’이라는 직함을 갖고 국정에 계속 관여하며 막후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2대 총리 고촉통을 거쳐 2004년 8월부터는 장남인 리셴룽에게 싱가포르의 총리를 맡겼다. 다른 자녀들도 대부분 고위 관리로 재직하거나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권력과 부를 세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권력 세습이 가능한 것은 리콴유가 총리 재임 때 다른 선진국엔 없는 독특한 권력 이양 시스템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의회 다수당의 당대표가 총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리콴유는 당대표를 뽑을 때 당내 경선을 통하지 않고 현 총리를 포함한 당 지도부가 내부 논의를 거쳐 결정하도록 했다. 그동안의 총리도 이런 식으로 선출했다. 리콴유(1959~1990년 재임) 초대 총리 이후 고촉통(1990~2004년 재임)과 리콴유의 장남 리셴룽(2004~현재)이 총리직을 물려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칫 일부 세력의 권력 독점과 독재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동안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2022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가 8만 2000달러가 넘어 GDP 기준 세계 5위의 강소국에 랭크된 것도 총리직의 안정적 승계에 따른 연속적인 리더십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리콴유는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국민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는 권위적 통치가 불가피하다는 ‘개발 독재’ 정치 스타일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외국 지도자도 리콴유였다. 미국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리콴유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중국 덩샤오핑 주석, 일본 요시다 시게루 총리와 함께 ‘아시아 3대 지도자’로 꼽았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박정희)’ ‘내 관 뚜껑이 닫히거든 나를 평가하라(리콴유)’는 말도 닮았고 아버지에 이어 자식까지 국가 지도자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도 두 지도자는 비슷했다. 리콴유의 장남이면서 싱가포르 총리를 맡은 리셴룽은 1952년생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동갑내기다. 두 명 모두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리콴유는 2011년, 가족에게 “내가 죽거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기념관 같은 국가적 성역으로 만들지 말고 헐어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4년이 지난 2015년 3월 23일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