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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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정의 새 교통규칙 발표로 사람은 좌측통행, 전차․자동차는 우측통행

20세기에 도입된 우리나라의 통행원칙은 ‘우왕(右往)’으로 시작해 ‘좌왕(左往)’을 거쳤다가 광복 후부터는 ‘우왕좌왕(右往左往)’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6년 12월 1일 경성이사청이 우측통행령을 내린 것이 근대적인 교통질서의 첫 걸음이었다. 1905년 가로관리규칙에서 ‘차량이나 우마가 마주치면 서로 우측으로 피하라’고 규정하면서 우측통행이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우왕’이 ‘좌왕’으로 바뀐것은 1921년이었다. 그해 9월 조선총독부가 통행령을 개정해 12월 1일부터 좌측통행을 본격 시행하면서였다. 좌측통행을 실시하는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불편을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복 후, 정말 우왕좌왕할 일이 생겼다. 미 군정이 새 교통규칙을 발표, 1946년 4월 1일부터 보행자들은 일제 때 방식대로 좌측통행을 유지하되 전차․자동차는 우측통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일본식으로 걷고 자동차는 미국식으로 달리게 됐다. 남과 북의 도로교통방식도 이때부터 어긋나 남쪽 사람들은 좌측통행 북쪽 사람들은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우왕좌왕’은 서울 지하철 운영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즉 일제 때 부설한 철도와 연결되는 지하철 1호선은 좌측으로 운영되고 있고, 2호선∼8호선은 미국식을 따라 우측으로 통행하고 있다. 특히 4호선은 당고개~남태령 구간은 우측통행, 선바위~오이도 구간은 좌측통행으로 운행되고 있어 ‘우왕좌왕’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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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드자동차 컨베이어 시스템 도입

↑ 포드자동차 하일랜드 파크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1913년 4월 1일, 미국 미시간주 하일랜드 파크의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을 이용한 자동차가 처음 생산됨으로써 세계 자동차사가 새로 씌어졌다. 컨베이어 시스템은 공장 내부를 물흐르듯 연결하는 컨베이어가 설치되고 그 옆에 배치된 노동자들이 순서대로 부품을 조립하는 생산방식으로 대량생산 → 가격할인 → 대량소비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공정과정이다.

처음 생산된 자동차 이름은 ‘모델 T’였다. 1908년에 첫 선을 보여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동차다. 모델 T는 헨리 포드가 부의 상징물이었던 자동차를 일반 대중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한 신개념의 자동차이면서 동시에 포드를 ‘자동차 왕’으로 우뚝서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견고하고 조작이 간단했으며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했다. 다른 자동차 값이 2100달러였을 때 825달러짜리 모델 T의 등장은 포드자동차의 신화를 알리는 예고편이었다.

모델 T로 자신감을 얻은 포드는 당시 재봉틀과 콜트권총이 이미 채택하고 있는 컨베이어 시스템에서 착안, 단일모델·대량생산 방식을 도입했다. ‘1초이상 걷지 않는다’ ‘결코 몸을 구부리지 않는다’ 포드가 구상한 2대 원칙을 충족시킨 컨베이어의 등장은 대당 생산시간을 63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켜 연간 7∼8만대에 불과하던 생산량을 이듬해부터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그 결과는 자동차 가격을 290달러까지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아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의 50%를 차지하게 됐고, 1927년 단종될 때까지 모두 1500만 대를 보급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 기록은 1970년대에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의 ‘비틀’이 이 기록을 깨기까지 단일 모델로선 세계최대 생산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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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서유견문’ 간행

↑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 고려대박물관 소장

 

개화를 꿈꾸던 구한말 선각자 유길준이 최초의 대미 외교사절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그의 나이 27세였던 1883년 9월이었다. 아더 미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며 신임장을 제정한 보빙사 일행은 박람회를 참관하고 병원·소방서·우체국 등 선진문명을 둘러보았다.

일행이 2개월여의 공식 일정을 끝내고 귀국선에 몸을 실을 때 유길준은 현지에 남았다. 선진 문물에 대한 갈증이 그의 귀국을 가로막은 것이다. 다행히 에드워드 모스 피바디 박물관장이 최초의 국비 유학생인 그를 도왔고, 그 역시 7개월 만에 영어로 편지를 쓸만큼 노력한 덕에 동부최고의 명문학교 덤머 아카데미에 입학, 하버드대를 목표로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1884년 12월 조국에서 전해진 갑신정변 소식은 그를 번민에 빠뜨렸고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유길준은 고국행 배에 몸을 실었다. 영국·이집트를 거쳐 홍해를 지나 싱가포르·홍콩·일본을 경유하는 6개월간의 여정 끝에 제물포항에 도착한 것은 1885년 12월이었다. 그러나 김옥균 등과 친하다는 이유로 체포와 7년간의 연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간 한국인 최초의 근대 서양 견문록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했으니 전화위복이었던 셈이다. 1895년 4월 1일,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인 ‘서유견문’이 1000부 한정본으로 일본 교순사에서 발간됐지만 이듬해 친러내각의 득세로 유길준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곧 금서로 낙인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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