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인류최초 원자폭탄을 개발한 美 ‘맨해튼 프로젝트’ 가동

↑ 로스앨라모스 연구소

 

■원자폭탄 원리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해하려면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것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과 원자폭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핵분열의 연쇄반응은 말 그대로 원자핵이 연쇄적으로 분열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분출하는 엄청난 에너지를 이용하는 게 원자력 발전이고 원자폭탄이다.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단단히 붙어 있다. 이것을 쪼개려면, 즉 분열시키려면 자연 상태에서는 안 되고 인위적으로 다른 중성자를 원자핵에 충돌시켜야 한다. 그러면 핵분열이 일어나고 거기서 튕겨나온 중성자가 다른 원자핵과 충돌해 또 다른 중성자를 방출한다. 이 중성자들이 다른 원자핵과 계속 충돌해 더 많은 핵분열을 일으키는 현상이 핵의 연쇄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과 어긋나는 이해할 수 현상이 벌어졌다. 즉 핵분열 후 전체 질량이 줄어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 1개를 두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합치면 원래대로 한 개의 사과가 되어야 하는데 핵분열에서는 다시 합쳐도 원래보다 조금 모자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유를 몰라 한동안 고민했으나 연구를 거듭한 결과 줄어든 질량만큼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질량에너지 등가원리 방정식(E=mc²)’이 빛을 발한다. 방정식에 따르면 에너지(E)는 질량(m) 곱하기 빛의 속도(c)의 제곱이다. 즉 아주 작은 질량도 빛의 속도로 가속하면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다.

세계 과학자들의 계속된 연구 결과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처럼 무거운 원자의 핵분열에서는 한 번 핵분열을 할 때 2~3개의 중성자가 새로 생겨 핵분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그 결과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자력 발전은 이처럼 우라늄과 플루토늄 원자의 핵분열 과정을 통해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 발전을 하려면 연쇄반응을 마냥 방치해서는 안 되고 적절한 조절이 필요하다. 그냥 놔둘 경우 에너지의 양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늘어나 폭발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은 순간적으로 많은 에너지 대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생겨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핵분열의 연쇄반응을 느리고 일정하게 유지해주면 필요한 에너지를 꾸준히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원자력 발전에서는 우라늄 연료 내부에 중성자를 쉽게 흡수하는 흑연과 같은 물질을 넣어둔다. 그러면 한 번의 핵분열 과정에서 나오는 2~3개의 중성자 중에서 1~2개를 흑연이 흡수하고 나머지 하나만 핵분열을 하게 된다. 따라서 핵분열의 연쇄반응이 일정하고 느리게 유지됨으로써 원자력 발전이 가능해진다. 결국 우라늄 원자핵 연쇄반응의 빠름과 느림에 따라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핵분열과 반대되는 핵융합이라는 현상도 찾아냈다. 수소의 동위원소인 중수소, 삼중수소와 같은 가벼운 원소들의 핵이 서로 결합해 원래보다 좀 더 무거운 원소의 핵을 만드는 핵융합이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핵분열 때와 마찬가지로 질량이 줄어들고 에너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분열을 이용하면 원자폭탄이 되는 것이고 핵융합을 이용하면 수소폭탄이 되는 것이다.

 

■각국의 원자폭탄 개발 과정

독일의 과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독일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피신한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여성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의 조언을 받아 우라늄의 핵분열에 성공한 것은 1938년 12월 21일이었다. 이것은 독일도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이트너의 조카를 통해 덴마크에 있는 닐스 보어에게 전달되었고 보어는 1939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이 사실을 미국 과학계에 전파했다.

당시 미국에는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있었다.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것이었다. 실라르드는 1939년 7월 미국도 서둘러 원자폭탄을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 8월 2일 미국에 망명 중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을 받았다. 편지는 2차대전이 발발(1939.9.1)한 후인 10월 11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곧이어 실라르드와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등이 포함된 우라늄 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의 재가가 나지 않아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는 바로 가동되지 않았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독일은 원폭 개발에 한발 한발 다가갔다. 독일은 우라늄의 핵분열에 성공한 후 점령지인 노르웨이의 중수 공장에서 1940년 4월 감속재로 쓰일 대량의 중수를 확보하고 벨기에에서는 다량의 우라늄을 확보했다. ‘불확정성의 원리’로 유명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 오토 한, 프리츠 슈트라스만, 발터 보테, 한스 가이거 등 뛰어난 물리학자들도 대거 독일의 우라늄 계획에 합류했다.

영국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처칠 영국 총리는 원자폭탄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고 1941년 8월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당시 영국의 연구진은 10kg 정도의 우라늄235만 있으면 원자폭탄을 제조할 수 있고 원자폭탄을 항공기에서 투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제조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영국은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미국에 전달하고 원폭 개발을 모색했으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개발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일본도 1940년에 이르러서 원자폭탄 개발에 착수했다. 개발은 2단계로 추진되었다. 1940년경 시작된 1단계는 연구개발에 중점을 두었으며, 저명한 물리학자가 이끌었다. 1943년경 시작된 2단계는 핵무기 생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화공학자가 주도했다. 일본은 1단계에서 약간의 진전을 보이며 소량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과 우라늄·중수 등의 필수재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2단계도 여러 난관에 직면하여 핵무기 생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의 원자탄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진전되었다.

 

■맨해튼 프로젝트

루스벨트 대통령이 원자폭탄 개발을 승인한 것은 1941년 10월 9일이었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란 이름은 미국의 2차대전 참전 후 기반시설 건설 및 무기 생산 시설 구축 등을 위해 과학·공학자들을 대거 모은 육군 공병대의 연구 시설 중 상당수가 뉴욕 맨해튼 컬럼비아대에 있었던 데서 유래했다. 맨해튼에서 개발 자체가 이뤄지진 않았지만 계획 초기에 맨해튼에서 초기 연구가 이뤄져 이후에도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암호명이 사용되었다. 극비로 분류된 원자폭탄 개발의 총괄 책임자로는 레슬리 그로브스 공병대 준장이 1942년 9월 임명되었고 프로젝트는 1942년 12월 출범했다.

그로브스는 1945년 7월 원자폭탄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될 때까지 3년 동안 13개 주에 걸쳐 있는 37개 시설과 12곳의 대학 부설연구소, 많을 때는 13만 명의 종사자를 연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맨해튼 계획에는 13만명의 인력과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가 투자되었다. 이는 2023년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330억달러(43조4973억원)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우라늄의 연쇄반응 실험이었다. 가능성은 1939년 1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천재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확인시켜 주었다. 1942년 12월 2일 시카고대의 스쿼시 경기장에 설치한 파일(원자로)에서 페르미가 최초로 제어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미국은 마침내 핵폭탄 제조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그래도 그때까지 누구도 해보지 못한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대량의 우라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우라늄은 지각에서 흔하게 구할 수는 있지만 1톤의 암석에 2g밖에 들어 있지 않고 농축된 원석도 없어 일일이 정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동위원소 관계에 있는 우라늄 중 핵분열 물질로 쓸 수 있는 우라늄235는 전체 우라늄 가운데 0.7%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원자폭탄 원료로 부적합한 우라늄238이었다.

전체 우라늄에서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작업은 기체 분사식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 방법은 우라늄의 혼합물을 원심분리기에 넣고 회전시키면 우라늄238보다 1.3% 정도 가벼운 우라늄235가 분리되는 현상을 이용한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라늄235 말고도 또 다른 핵분열 원료인 플루토늄239를 찾아냈다. 우라늄238은 자신은 핵에너지를 내놓지 못하지만 중성자와 섞이면 핵에너지를 내보내는 물질인 플루토늄239로 변하는 특성이 있다. 맨해튼 프로젝트팀은 우라늄235를 분리하는 공장은 테네시주의 시골 마을 오크리지에, 플루토늄239를 생산하는 공장은 워싱턴주의 핸퍼드에 건설했다. 오크리지에서는 1944년 2월 우라늄235가 처음 생산되고 핸퍼드에서는 1944년 말 최초의 플루토늄이 추출되었다.

그로브스는 원자폭탄 제조·설계를 담당할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소장으로 캘리포니아 공과대 교수인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1942년 말 임명했다. 그로브스는 훗날 오펜하이머를 임명한 것이 자신이 내린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술회했다. 연구소는 뉴멕시코주 샌타페이에서 북서쪽으로 56㎞ 떨어져 있는 로스앨러모스 교외에 세워져 1943년 4월 가동되었다. 연구소 주변에는 울타리와 가시철망이 쳐지고 우편물은 검열을 받았으며 전화는 도청되거나 녹음되었다. 우편물 주소는 ‘사서함 1663, 샌타페이’로 통일되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모두가 암호명을 갖고 있었고 로스앨러모스 지명은 대통령 명령에 따라 미국의 지도에서 사라졌다. 계획에 참여한 수천 명의 직원은 비밀을 지켜야 했고 옆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게 관리되었다. 실제로 원자폭탄이 개발된 후에도 자신이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끝에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 공군기지의 외진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플루토늄 폭탄 실험이 진행되었다. 실험은 성공했다. 핵폭탄 화구의 섬광은 400㎞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되었고, 굉음이 80㎞까지 울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력을 보였다. 그리고 8월 6일 새벽 2시 원자폭탄을 실은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서태평양 티니언 섬 기지에서 일본의 히로시마로 날아가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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