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헨리 포드의 포드자동차 ‘모델 T’ 생산… 자동차의 개념과 시장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신개념의 자동차

 

198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PC 혁명과도 같은 것

포드자동차의 신화가 시작된 것은 헨리 포드(1863~1947)가 33살이던 1896년 6월 4일이었다. 그날 새벽 포드는 4개의 자전거 바퀴에 4륜 마차의 차대를 얹고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자신의 첫 번째 자동차 ‘쿼드리 사이클’을 몰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디트로이트 거리를 달렸다. 포드차 1호에 들어간 부품 대부분은 여기저기서 그러모은 폐품들이었다. 헤드라이트는 없었고 경적은 종소리로 대신했다. 브레이크가 없어 차를 세우려면 엔진을 꺼야 했고 후진할 때는 뒷바퀴를 들어 올려 방향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포드차는 디트로이트의 명물이 되었다.

포드는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처의 농촌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살에 학교를 중퇴한 그는 낮에는 디트로이트에 있는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생활비를 벌고 밤에는 자동차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실이 ‘쿼드리 사이클’이다.

포드는 36살이던 1899년 8월 직장을 그만두고 자동차 공장을 세울 결심을 했으나 좀처럼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더구나 디트로이트에는 정비소 수준의 영세 자동차공장이 50여 개나 있어 공장을 세운들 승산이 없어 보였다. 포드는 그 무렵 열리는 자동차 경주에 착안했다. 경주에서 이기면 자신의 자동차가 인정을 받게 될 것이고 그러면 투자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포드는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자 투자자가 나타나 1899년 8월 5일 ‘디트로이트 자동차’를 설립했다. 하지만 품질이 떨어지고 자동차도 팔리지 않아 결국 문을 닫았다.

포드는 다시 자동차 경주에 도전, 1901년 10월 우승했다. 이것을 계기로 다시 확보한 투자금을 종잣돈 삼아 1903년 6월 16일 자신의 이름을 딴 ‘포드자동차’를 설립했다. 그해 7월 20일 시판한 850달러짜리 ‘A형’ 자동차는 그해에만 2,000대 가까이 팔려 포드자동차의 돌풍을 예고했다. 당시 자동차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소량만 생산하는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투자자들은 당연히 부유층을 상대로 한 시장을 선호했다.

하지만 포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튼튼하고 값싼 차를 꿈꿨다. 포드는 투자자들과 상의 없이 1905년 봄 디트로이트 신문에 이런 자신의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자 투자자들이 반발하며 포드에게 회사 주식을 모두 떠맡으라고 했다. 포드는 투자자들의 주식을 사들여 1906년 11월 회사를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이후 2기통 엔진의 ‘모델 A’를 시작으로 B, C, F, N, R, S 등 차례차례 새 모델을 시장에 내놓은 포드자동차가 마침내 운명의 차 ‘모델 T’를 출시한 것은 1908년이었다.

 

컨베이어 생산방식은 20세기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양식의 출발점

10월 1일 첫선을 보인 ‘모델 T’는 당시만해도 부의 상징물이었던 자동차를 일반 대중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한 신개념의 자동차였다. 볼품은 없었으나 견고하고 조작이 간단했으며 가격이 저렴했다. 다른 자동차 값이 평균 2,000달러였을 때 825달러짜리 ‘모델 T’의 등장은 198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PC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동차가 실용화된 지 이미 30년 이상이나 지났고 ‘모델 T’에 앞서 여러 종류의 모델이 나왔지만 ‘모델 T’는 자동차의 개념과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포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공장에서 벌어지는 작업을 치밀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실제 작업에 걸리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재료와 도구를 가지러 가는 데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드는 생산 공정을 표준화·단순화하고 그 유명한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기법’을 도입했다. 또한 검은색 모델만 생산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델 T가 미시간주 하일랜드 파크의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물 흐르듯 연결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13년 4월 1일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도매업자들이 소고기를 포장할 때 머리 위에 매달아놓고 쓰는 수레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람이 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사람에게로 오게 하는 것이었다. 대량생산 → 가격할인 → 대량소비를 가능케 하는 컨베이어 생산방식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라는 20세기적 생산·소비양식의 출발점이었다.

포드가 구상한 2대 원칙은 ‘1초 이상 걷지 않는다’, ‘결코 몸을 구부리지 않는다’였다. 이 원칙을 충족시킨 컨베이어의 등장은 대당 생산시간을 630분에서 93분으로 단축시켰고, 연간 7만∼8만대에 불과하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1908년에는 1시간에 1대꼴로 자동차가 만들어졌으나, 1914년에는 24초당 1대가 만들어졌다.

1914년 한 해 동안 포드자동차 노동자 1만 3,000여 명이 27만 대를 생산할 때 미국의 나머지 299개 자동차업체는 6만 6,000여 명의 노동자가 28만 대를 생산했다. 그만큼 가격도 내려가 1908년에 825달러이던 모델 T의 가격은 1914년 400달러로 떨어졌다. 포드의 생산방식과 경영 철학은 T형 자동차처럼 세계로 퍼져나갔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라인 생산, 과학적 관리기법, 소품종 다량생산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테마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포디즘’의 출현이었다.

 

평생 신념은 반노동조합, 반사회주의, 반유대주의

포드는 1914년 1월 1일 임원회의에서 생산비 절감의 효과를 노동자들에게 나눠주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시간을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동종업계 평균임금이 2.38달러에 불과할 때 하루 최저임금을 5달러로 인상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출신 학교도 묻지 않았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건 하버드대를 졸업하건 똑같이 대우했다. 장애인의 일자리도 마련했다. 그러나 단조롭고 반복적인 작업, 비인간적인 작업환경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훗날 올더스 헉슬리는 풍자소설 ‘멋진 신세계’(1932)에서 포드를 저주와 마법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했고, 채플린은 영화 ‘모던 타임스’(1936)에서 컨베이어 생산방식의 비인간화를 고발했다.

1922년, 포드는 창당한 지 얼마 안 되는 독일의 나치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기부했다. 소규모이고 신생 정당인 나치당에서 얻을 이익은 없었는데도 막대한 기부를 한 것은 나치당의 노선이 그의 평생 신념과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반노동조합, 반사회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였다. 16년 뒤, 포드는 집권당이 된 나치당으로부터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포드는 노동운동에 관한 한 무자비한 자본가였다. 그는 고임금을 주는데도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포드는 노조를, 증권가를 장악한 유대인이 회사를 빼앗으려는 조직적인 수단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공장 안에서는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공장 밖에서는 구사대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살인과 고문, 집단 린치를 자행하며 노동조합의 결성을 막았다.

그가 노조와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에도 컨베이어 벨트는 계속 돌아가 모델 T의 가격은 290달러까지 떨어졌고 미국 내 시장 점유율은 1924년 한때 50% 이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이런 변화를 애써 외면한 게 문제였다. 포드는 트렌드 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은 단순한 모델을 외면했다. 1908년 첫 설계 후 거의 변하지 않는 모델 T는 겉모양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1924년은 포드에게 영광과 시련이 함께 시작된 해였다. 그해는 모델 T의 누계 생산량이 1,000만 대를 넘어선 해이자 ‘세비’라는 애칭으로 불린 GM의 시보레가 출시된 해였다. 시보레는 모델 T의 단점을 보완한 신선한 스타일로 눈길을 끌었다. 시보레가 다양한 모델과 색채로 자동차 시장을 급속히 잠식했지만 포드는 실용성만 강조했다. 기본설계도 바꾸지 않고 검은색만 고집했다. 결국 영원할 것 같던 포드의 신화도 1924년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모델 T는 1927년 5월 31일 마지막 차가 생산될 때까지 모두 1,545만 대가 나왔다. 1970년대에 독일의 국민차 폴크스바겐의 ‘비틀’이 이 기록을 깨기까지 단일 모델로선 세계 최대 생산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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