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신문연재와 논쟁

↑  소설 ‘자유부인'(왼쪽)과 영화 ‘자유부인'(1956년) 포스터

 

전후 세태의 성도덕 문란 등으로 큰 관심 끌어

정비석(1911~1991)의 소설 ‘자유부인’이 서울신문에 연재된 것은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총 215일이다. 소설은 국어학자 장태연 교수와 아내 오선영 부부가 벌이는 일탈의 감정과 애정 행각, 그리고 춤바람 등 전후 세태의 성도덕 문란 등이 세간에 큰 관심을 끌어 연재 기간 서울신문의 부수가 급증했다가 연재가 끝난 후 5만부가 한순간에 떨어졌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훗날 문학평론가들은 ‘자유부인’이 사회적 반향을 끌었던 요인으로 전쟁 이후 만연한 윤리적 타락과 권력형 비리를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을 들었다.

‘자유부인’ 첫회가 게재된 서울신문 1954년 1월 1일자

 

남편 장태연은 한글강습을 받고 싶어 하는 타이피스트 박은미를 처음 만난 날 양장 사이 언뜻 보이는 종아리에서 육체적 충동을 느낀다. 장 교수는 부인에게서는 느끼지 못한 야릇한 감각을 느끼고 가정까지 포기할 마음을 가져보지만 갑자기 박은미가 자신의 제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에 우울한 속내를 드러낸다. 장 교수의 부인 오선영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다가 어느 날 동창 모임에 다녀오고 나서 부에 대한 욕망을 분출한다. 그녀는 동창들이 공무원 남편 덕분에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질투감을 느끼는데 질투감은 돈도 권력도 성적 매력도 없는 남편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녀는 돈을 벌어 폼나게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취직한 양품점에서 몰래 가로채거나 자신의 남편에게 학점 청탁을 하는 학생에게서 받은 돈으로 소비 욕망을 채워간다. 한편으로는 댄스 교사를 자처한 젊은 대학생 춘호를 통해 육체적 갈증을 채우려고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양품점 사장의 남편인 한태석을 통해 육체적 욕망을 채우려고 과감하게 가출한다. 그러다가 한글맞춤법 간소화 반대 학술 세미나에서 연설하는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학자인가를 깨닫은 뒤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하고, 남편은 아이를 위해 그런 아내를 용서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불륜이라고 해봤자 연인과 함께 댄스홀에 다니는 정도로 끝나지만 당시 사회 상황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고 선정적인 주제로 화제가 되었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의 한 장면

 

당대 저명인사들 간의 논쟁으로 관심 증폭돼

더구나 소설을 둘러싼 당대 저명인사들 간의 논쟁까지 전개되면서 대중의 관심이 더욱 증폭되었다. 첫 포문은 황산덕 서울법대 교수가 열었다. 1954년 3월 1일자 대학신문(서울대 학보)을 통해 “대학교수를 모욕했다”고 비난한 것이 발단이었다. 황 교수는 “참다못해 붓을 든다”며 “대학교수를 사실도 아닌 허구를 써가면서 무의미하게 망신을 주고 대학교수 부인을 대학생의 희생물로 삼으려 하는 것은 예술이라는 말만으로는 변명이 안된다”고 비난했다. 이에 정비석은 3월 11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탈선적 시비를 박(駁)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거의 대부분의 비난이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일종의 사적 흥분에 불과하다”며 황 교수의 비난이 근거 없는 폭언이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황 교수가 3월 14일자 서울신문을 통해 또다시 반박했다. “문학정신 없이 성적 흥분을 돋우는 표현은 문학이 아니다”라며 “인기욕 때문에 저속한 작문을 쓰는 문학의 파괴자요,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격렬하게 정비석을 성토했다. 휴전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전 국민의 가슴 속에 중공군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상황에서 ‘중공군 50만 명에 해당하는 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분위기상 가장 끔찍한 비난 가운데 하나였다.

논쟁이 격렬해지자 변호사 홍순엽과 문학평론가 백철도 논쟁에 뛰어들었다. 홍순엽은 3월 21일자 서울신문의 ‘자유부인 작가를 변호함’이라는 글을 통해 “학자가 그의 과학적 지성이 지침하는 방향에 따라 자유로이 학문적 저작을 할 수 있듯이 작가는 상상의 세계에서 양식이 명하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붓대를 구사할 수 있다”며 “‘소설 내용이 대학의 위신과 민족문화의 권위를 훼손한다’는 황 교수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3월 29일자 대학신문에서 “양씨의 논쟁은 문학과 사회, 신문 연재소설의 성격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중공군 등을 내세워 공격하는 황 교수의 주장에도 문제가 있지만 ‘자유부인’도 근본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고 양비론적인 태도를 취했다. 논쟁의 와중에 1954년 4월 1일 제일신보에 ‘遂(드디어)! 자유부인 말썽-정비석 씨, 황산덕 교수 간에 난투극, 쌍방 중상으로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곧바로 만우절 해프닝으로 드러났지만, 대중들의 관심도를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되었다.

정비석

 

단행본과 영화로도 제작… 외설적인 대중서사의 대표격으로 알려져

논쟁이 마무리될 즈음, 소설이 또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전체 공무원들의 위신을 손상케 하는 의외의 결과를 초래케 되었사와 심히 죄송스럽기에…”라는 작가의 석명서가 6월 24일자 서울신문 광고란에 실리면서였다. 이 난데없는 광고가 실린 것은 6월 21일자 소설에 표현된 “국록을 먹는 공무원이 도장 하나 찍어 주고도 수천만금의 뇌물을 예사로 받아먹는 이 세상에서…”라는 대목이 공무원의 비위를 건드려 연재 중단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논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비석에 따르면, 한 여성단체가 ‘여성 모독죄’로 자신을 고소하는 바람에 경찰서에 불려 다니고 북한이 이 소설을 대남비방용으로 이용하는 바람에 치안국(현재의 경찰청)에 불려가 “남한의 부패상을 소설로 폭로해 공산도배들에게 이적행위를 했다”며 이적표현물 발간죄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소설은 연재가 끝나기도 전에 독자와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단행본은 권력의 입김으로 ‘공무원 뇌물’ 부분이 빠진 채 인쇄되었지만 소설 출간 당일 초판 3000부가 모두 매진되고 총 14만부 이상이 팔려나가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런데 영화감독 한형모는 1954년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키스신 도입이라는 신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따라서 파격적인 스토리와 영화감독의 만남은 영화 촬영 전부터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1956년 6월 개봉한 영화는 15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는데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로 시작되는 끈끈한 가사와 선율의 영화 주제곡 ‘댄서의 순정’도 흥행몰이에 힘을 보탰다. 영화는 여세를 몰아 1957년(속편), 1969년, 1981년, 1986년(2편), 1990년에 동일 영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자유부인’은 1982년 ‘애마부인’이 에로물의 상징으로 등장한 후에도 바람난 유부녀가 벌이는 외설적인 대중서사의 대표격으로 대중들 사이에 소비되었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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