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베르사유 평화조약 체결 100주년… ‘평화’ 표방했으나 본질은 승전국의 가혹한 ‘보복’, 결국 히틀러라는 괴물 낳고말았다

↑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거행된 평화조약 서명식. 그림의 중앙 앞쪽에 독일 대표 요하네스 벨이 등을 보이고 고개를 숙인 채 서명하고 있다. 그 옆의 인물은 독일 외무장관 헤르만 뮐러다. 이 모습을 연합국 측 대표들이 반대편에서 주시하고 있다. 가운데에 콧수염을 기른 클레망소 총리가 보이고, 그림의 왼편으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가 앉아 있다.

 

by 김지지

 

승전국 대표, 임자 없는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혈안 

1918년 11월 11일 체결한 연합국과 독일의 종전 협정으로 1차대전의 총성이 멎었다. 승전국 대표들이 손익 결산을 따지기 위해 전후의 파리로 속속 몰려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1차 대전 종전 협상 대표인 프랑스군 원수 포슈(오른쪽 둘째)와 연합국 대표들. 독일의 항복 조인식은 프랑스 콩피에뉴 숲 빈터에 있는 포슈의 개인 열차 안에서 열렸다.

 

그들이 파리에서 첫 회의를 연 것은 1919년 1월 18일이었다. 회의에는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했으나 주요 권한을 쥐고 흔든 것은 프랑스·영국·미국·이탈리아·일본 등 5개 열강이었다. 그중에서도 최종 결정권을 손에 쥔 것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었다. 조지 총리는 “오렌지(독일)를 씨가 나오도록 짜겠다”며 별렀고 클레망소 총리는 “독일을 철저히 약화시켜 다시는 독일군이 프랑스 땅을 밟지 못하게 하겠다”며 회의장에 들어섰다. 윌슨은 1918년 1월 자신이 제시한 ‘14개조 평화 원칙’에 기초해 평화 조정자로서의 꿈을 안고 회의장 문을 노크했다.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오를란도 총리,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총리는 변방에서 참전하고도 승전국의 일원으로 회의장에 당당히 입장했다. 일본의 대표단은 68명이나 되었다.

각국 대표들은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잇속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고 임자 없는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혈안이었다. 1914년과 1917년 각각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승전국 명단에 이름을 올려 회의에 참석한 일본과 중국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중국 산동반도의 소유권을 놓고 격돌했다. 중미의 니카라과, 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 같은 나라들까지 패전국들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는 이유만으로 대표단을 파견해 먹이를 찾아 기웃거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튀르크 제국, 불가리아 등 패전국들에는 회의 출석이 허용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 후인 1918년 3월 독일과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협상 테이블에 나서지 않았다.

 

김규식, 현지에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

피식민지 국가들은 전쟁 당사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의 참가를 허락받지 못했다. 그래도 사정이 워낙 절박해 대표를 파견했다. 그들이 한가닥 기대한 것은 1918년 1월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조’에서 강조한 ‘민족자결주의’였다. 그들은 파리평화회의에 줄줄이 청원서를 들고 왔다. 호찌민은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시켜 달라고 윌슨 대통령에게 탄원했고 한국에서는 신한청년단이 김규식을 파견했다.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1919년 파리에 꾸려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 왼쪽 끝이 여운홍, 오른쪽 끝은 김규식, 뒷줄 왼쪽 3번째가 조소앙이다.

 

신한청년단은 1918년 1월 윌슨이 14개조를 발표했을 때 여운형·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이 장차 있을 파리평화회의에 청원서를 보내기 위해 1918년 8월 상해에서 조직한 단체였다. 김규식은 파리에 도착한 뒤 한국대표관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개칭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파리평화회의 회의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독립국 대표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일본 요청을 받은 프랑스 경찰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래도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으로 열강들을 향해 일본 지배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미국에서 7년간 유학하며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은 김규식은 프랑스어도 능숙했다. 소식지 ‘자유 대한(La Coree libre)’을 내면서 독립 국가의 대표라는 점을 알리려 애썼다. 파리위원부는 3·1 운동 등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소식을 참가국에 알리고 조르주 클레망소 파리평화회의 의장에게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서한을 전달했다.

그러자 유럽 신문들이 파리위원부 활동에 관한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파리위원부가 발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따르면 1919년 3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프랑스 신문에 한국 관련 기사 게재 건수가 133종 423건이나 되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도 “한국 교회의 총애하는 자녀들이 받는 핍박에 대해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의 생애를 하기를 천주께 기구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파리위원부에 보냈다. 그 무렵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도 정한경·민찬호와 함께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려고 했으나 미국이 파리행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김규식의 이런 노력에도 평화회의의 목적 자체가 서구 제국주의 국가 간 영토 재분할이다 보니 한국 문제는 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결국 피식민지 국가들의 기대와 희망은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조약 결과, 유럽의 지도 대폭 바꿔놓아

승전국들이 6개월 동안의 논의 끝에 440개조로 구성된 이른바 ‘베르사유 조약’을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서명한 것은 1919년 6월 28일이었다. 5년 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피살되어 1차대전이 발발했던 바로 그날이었고 48년 전인 1871년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굴욕적인 항복을 받은 뒤 통일 독일제국을 선포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굴욕적인 항복을 받은 뒤 독일의 제2제국을 선포하고 있다. 장소는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장소와 같은 ‘거울의 방’이고 날자는 48년 전 같은 날(6월 28일)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전후 지도를 대폭 바꿔놓았다. 변화가 가장 극심한 곳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였다.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는 지역이긴 하지만 독일은 13%의 영토와 600만 명의 인구를 빼앗겼다.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로 넘어갔고, 라인강 서부 지역은 연합국이 15년 동안 점령했다. 폴란드에는 동프로이센의 일부 영토를 빼앗겨 독일 본국과 동프로이센으로 분리되었다. 독일이 점유하고 있던 중국의 산동반도와 적도 이북의 태평양 유역 식민지는 일본의 차지가 되었으며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승전국들에 분할되었다. 공군은 해체되었고 육군은 지원 병력에 한해 10만 명으로 제한되었으며 해군의 군함 보유량은 10만t 이내로 묶였다.

베르사유 조약의 후속 조약은 실무 협상단이 조율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는 생제르맹 조약(1919.9.10), 불가리아와는 뇌이 조약(1919.11.27), 헝가리와는 트리아농 조약(1920.6.4), 오스만튀르크와는 세브르 조약(1920.8.10)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오랫동안 그들이 지배해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은 독립했다.

평화조약안. 미국판(출처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는 전 영토의 73%와 인구의 75%를 잃어 경제적 자립도가 한참 떨어지는 인구 620만 명의 약소국으로 추락했다. 300만 명의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로 편입되었다. 헝가리는 영토의 3분의 2를 잃고 인구는 800만 명으로 쪼그라들어 마자르 족의 옛날 헝가리 왕국 판도로 축소되었다. 빼앗긴 영토는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에 귀속되었다. 무장 병력은 3만 5000명으로 제한되었고 병력은 치안 유지와 국정 안정을 위할 때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바다로 빠져나갈 출구가 없는 내륙 국가가 되었다.

불가리아는 일부 영토를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 양도했고, 병력은 2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에게해로 나가는 출구를 잃었다. 더불어 무장은 해제당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를 통합해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했다. 오스만튀르크 제국은 중동 지역 대부분을 상실하고 이스탄불과 소아시아 반도로 축소되었다. 오스만의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요르단·이라크는 영국으로, 레바논·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편입되었다.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온 핀란드·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가 독립했다. 독일의 항구였던 단치히(현재 폴란드의 그단스크)에 자유시의 법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그동안 바다가 없던 폴란드는 단치히와 연결하는 회랑을 통해 해양과 연결되었다.

 

문제는 독일이 330억 달러의 배상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

배상은 1921년 4월 회의에서 330억 달러(1320억 마르크)로 결정되었다. 독일인이 꼬박 3년 동안 빵 한 조각 먹지 않고 일해야 겨우 모을 수 있는 거액이었다. 독일은 조약안이 지나치게 가혹하다며 반발했지만 승전국들은 그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조약안을 다르게 보았다. 클레망소 눈에는 조약이 너무 온건했고 조지가 보기에는 너무 가혹했으며 윌슨이 보기에는 너무 결함이 많았다.

독일 의회 앞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독일인들의 대규모 항의 집회 (1919년 5월 15일)

 

문제는 독일이 330억 달러의 배상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케인스조차도 “추악하고 비열한 요구”라고 꼬집었다. 결국 상환 일정이 다소 조정되기는 했지만 과도한 배상액은 두고두고 독일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은 지불할 금도 없었고 수출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불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통화 남발뿐이었다. 마르크 가치는 계속 하락해 1922년 11월 1달러에 7000마르크, 12월에는 5만 마르크로 폭락했다.

독일 정부는 외국의 점령에 대해 수동적 저항으로 맞섰다. 모든 독일 노동자들은 직장을 떠났으며 직장을 떠난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화폐를 무제한 발행하는 정책을 취했다. 1923년 8월 1달러에 460만 마르크, 12월에는 무려 42억 마르크라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마르크 가치는 계속 폭락했다.

1919년 7월 독일 언론에 소개된 삽화.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가 여성(독일)의 피를 빨아먹는 상황을 묘사했다.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독일인들의 굴욕감은 장차 조약의 비합법성과 부당성을 영토 확장의 야욕으로 정당화하려는 히틀러에게 이용되어 나치즘이 발호하는 자양분이 되고 말았다.

 

국제연맹 창설은 베르사유 조약의 산물

1920년 1월 10일은 1차대전 패전국에 전쟁 책임을 물은 ‘베르사유 조약’의 발효일이다. 조약에 ‘국제연맹 창설’이 명시되어 있어 1월 10일은 별도의 창립식 없이 자동적으로 국제연맹의 창설일이 되었다. 1920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첫 총회에는 42개 승전국과 중립국이 참석했으나 패전국 독일과 1918년 3월 독일과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전쟁에서 발을 뺀 러시아는 가입이 허락되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독일과 러시아 후신인 소련은 1926년과 1934년 각각 가입했다.

1920년 1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첫 총회 모습

 

그러나 첫 총회는 국제연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미국이 대표를 파견하지 않아 활기가 없었다. 윌슨은 1918년 1월 8일 발표한 ‘14개조’를 통해 국제연맹 창설을 제창하고 1919년 6월 조인된 ‘베르사유 조약’에 국제연맹 창설 조항을 삽입하도록 해 사실상 ‘국제연맹의 산파’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미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당시 미국 내의 복잡한 정치 구도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은 1919년 11월 19일 상원의 베르사유 조약 비준동의안 부결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 비준동의안 부결에 따라 미국과 독일은 법적으로는 여전히 적국 상태로 있어야 했다. 양국은 1921년 7월 미국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전쟁 종결을 선언하고서야 우호국으로 발전했다.

1920년대의 국제연맹은 국가 간의 사소한 갈등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으나 파시즘이 대두한 1930년대에 들어서는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에 만주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철수하기는커녕 되레 연맹을 탈퇴(1933)하는 바람에 국제적인 망신을 샀는가 하면 독일과 이탈리아로부터도 1933년과 1937년에 각각 탈퇴 통보를 받는 수모를 당했다. 소련에 대해서만은 핀란드를 침범했다는 이유를 들어 축출(1939)하는 용기를 보였지만 이미 연맹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였다. 공식적으로는 1946년 4월 18일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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