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보라매병원
보라매병원 사건의 전말
1997년 12월 4일 뇌를 다친 58세 남성이 서울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실려왔다. 의사는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해 환자 가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동의서 없이 응급수술을 시작했다. 수술 중 환자 아내가 도착하고 의사는 응급수술 경위와 수술 진행 상태를 설명했다. 그런데 수술 후 환자의 의식이 회복되지 않았다. 환자 아내는 이튿날 경제적인 이유로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며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들어 퇴원을 만류했으나 아내는 “동의도 없이 수술해 놓고 퇴원도 마음대로 못하게 한다”면서 막무가내로 퇴원을 요구했다.
의사는 퇴원 시 사망 가능성이 있다는 환자 상태를 아내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킨 뒤 “환자가 사망하더라도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12월 6일 수술 이틀 만에 환자를 퇴원시켰다. 환자는 수련의가 병원 구급차를 이용해 환자를 집으로 옮긴 뒤 인공호흡 장치를 제거하자 수 분 만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검찰은 1998년 1월 “중환자를 보호자의 퇴원 요구만으로 내보내 죽게 한 것은 살인 행위”라며 사법사상 처음으로 의사에게 살인죄를 적용, 불구속 기소했다. 이후 치료를 계속했을 경우 환자가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는지, 회복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퇴원시켰다면 의사의 행위가 살인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놓고 7년 동안 치열한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이른바 ‘보라매병원 사건’의 시작이었다. 1심 법원은 1998년 5월 15일 “의료 행위 중지가 환자의 사망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 의사로서 환자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우선한다”며 살인죄를 적용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 후 전국 각 병원에선 의사들이 ‘살인죄 기소’를 면하기 위해 관례적으로 퇴원시켜 온 회생 가능성 없는 환자의 퇴원을 거부했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존엄사 논란으로 확대되었다. 존엄사 반대론자들은 “인간의 생명권은 최고의 가치로서 현행 헌법과 형법 역시 인간의 생명 존중과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존엄사 찬성론자들은 “인간의 자율권을 존중해야 하고 삶의 질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환자 본인이 치료 여부를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의사는 환자가 자율적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협력자로서 설명할 의무만 지고 있다는 것이다.
‘존엄사 허용해야 하나’ 질문에 70% 찬성
서울고법은 2002년 2월 ‘환자 아내의 살인 행위를 용이하게 한 방조 행위에 해당된다’며 살인방조죄를 적용, 의사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러면서 “불치 상태의 환자 스스로 진지하게 치료 중지를 요구하고 병원윤리위 등 검증 절차를 거쳐 더 이상의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될 경우 소극적 안락사 등 치료 중지를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법원도 2004년 6월 29일 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적용,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의사가 환자를 퇴원시키면 보호자가 보호 의무를 저버려 피해자를 사망케 할 수 있다는 미필적 인식은 있었고, 환자를 집으로 후송하고 호흡 보조장치를 제거하는 등 살인 행위를 도운 점이 인정되므로 살인방조범으로 본 원심은 타당하다”고 밝혔다. 환자 아내는 항소심에서 살인죄가 적용되어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했다.
이 판결은 보호자나 환자가 원한다고 해서 회복 가능한 중환자의 퇴원을 허락했다가 사망할 경우 보호자는 물론 퇴원을 허용한 의사까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의사협회는 성명을 통해 “의료계 현실을 도외시한 판결”이라고 강력 반발했으나 이후에도 존엄사는 법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라매병원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인 2003년 ‘정신질환자 자살미수 사건’에서도 법원은 “자살 시도 가능성이 있는데도 의료진이 환자의 외출을 허락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 생명권 우선 원칙을 유지했다. 또 다른 법원은 2008년 1월 근이영양증을 앓아 20여 년간 간호해 온 아들의 인공호흡기를 떼내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기소된 어머니에게도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의 이런 판결에도 불구하고 ‘소극적 존엄사’에 대한 우리 국민의 공감지수는 상당히 높았다. 2006년 국정홍보처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의식 가치관’ 설문조사에서 ‘존엄사는 허용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중 22%가 ‘매우 그렇다’, 48%가 ‘대체로 그렇다’고 답해 찬성 의견이 7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 할머니 존엄사 논쟁
존엄사 논쟁이 본격적으로 점화한 것은 대법원의 보라매병원 사건 판결(2004년 6월)이 있고 4년이 지나서였다. 2008년 2월에 시작된 이른바 ‘김 할머니 뇌사 사건’이다. 당시 김 할머니는 폐암이 의심되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기관지 내시경을 이용한 조직 검사를 받다가 폐출혈과 심호흡 정지를 겪고 식물인간이 되었다. 할머니 가족은 처음에는 의료진의 과실 여부를 따지기 위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신청했다가 김 할머니가 뇌 손상을 입어 회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내 첫 존엄사 소송’을 진행했다.
할머니 가족은 “할머니가 입원하기 전 ‘병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겨 소생하기 힘들 경우 나에게 인공호흡기를 절대 끼우지 말라’고 당부했다”며 병원 측에 호흡기 제거를 위한 병원윤리위원회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병원 측은 “인공호흡기 부착과 치료 등을 계속하면 1∼2년 이상 생존할 수 있다”며 거부했다. 이에 김 할머니 가족은 2008년 5월 서울서부지법에 ‘무의미한 연명 치료 중지 가처분 신청’과 함께 본안 소송을 냈다. 정부가 존엄사에 대한 법률을 제정하지 않아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이 침해되었다며 헌법소원도 냈다.
그해 7월 서부지법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으나 11월 본심 1심 재판부는 김 할머니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연명 치료 중지를 인정했다. 병원 측이 항소했으나 서울고등법원도 2009년 2월 10일 1심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2009년 5월 21일 존엄사를 인정하는 첫 판결을 내리고 존엄사 허용 기준을 제시했다. 기계장치에 의한 생명 연장보다는 존엄사를 택하는 게 인간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헌법상 행복추구권에도 부합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종교계 등은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남용되어 환자들이 무분별하게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반발했다. 헌법소원은 기각되었지만 의료계는 불치 환자들이 관행적으로 연명 치료를 거부해 왔다며 존엄사에 대한 자체 지침을 마련했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는 2009년 6월 23일 제거되었다. 그런데 길어야 3일 정도 살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김 할머니는 자발 호흡을 되찾았고 건강도 차츰 호전되었다. 이 때문에 ‘인공호흡기=인위적 연명 치료 수단’이란 등식이 깨지면서 ‘연명 치료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규정할 것인가’란 새로운 논란이 제기되었다. 이후 김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떼고도 201일 동안 살다가 2010년 1월 10일 숨을 거뒀다.
웰다잉법 제정과 합법적인 첫 존엄사
식물인간 상태인 ‘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떼 달라는 가족의 요구를 2009년 대법원이 받아들였어도 제도화하려면 법의 제정이 필요했다. 이후 사회적 논의를 거쳐 이른바 웰다잉법으로 불린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이 2016년 1월 국회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환자의 ‘자기 결정’에 따라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혈액투석·항암제 투여 등을 중단하고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97년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뗀 의사와 가족이 살인죄로 기소된 지 18년, 2009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식물인간 상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떼 달라는 가족의 요구를 대법원이 받아들인 ‘김 할머니 사건’ 이후 6년여 만이었다.
법에 따르면 연명 의료 중단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해도 회복이 안 되며 ▲사망이 임박한 환자만 가능하다. 임종기 환자 가운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연명 의료를 원치 않음을 명확히 밝혀 두거나, 2명 이상의 가족이 환자의 평소 뜻을 확인해 주면 된다. 환자 뜻을 알 수 없는 경우라면, 가족 전원이 합의해야만 가능하다. 병의 종류는 상관없다.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는지는 해당 환자의 담당의사와 해당 분야 전문의가 함께 판단한다. 중단할 수 있는 연명 의료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투석 및 항암제 투여의 의학적 시술이다. 연명 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영양분 공급, 물 공급, 산소의 단순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웰다잉법은 연명의료결정법 시범사업(2017년 10월~2018년 1월)을 거쳐 2018년 2월 본격 시행되었다. 존엄사를 택해 임종한 환자가 처음 나온 것은 시범사업 중이던 2017년 11월 중순이었다. 임종 환자는 소화기 계통 암으로 치료받던 50대 남성이었다. 그는 임종 한 달 전 “연명 의료를 받지 않겠다”며 연명의료계획서에 서명했고, 의료진은 본인 의사에 따라 환자가 임종기에 접어들었을 때 인공호흡기 착용, 심폐 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법에 따라 영양이나 물 공급, 통증 완화 치료는 계속 이뤄졌다. 하지만 환자는 병세 악화로 자연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