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황태성(1906~1963)은 박정희의 셋째형 박상희와 절친한 친구이자 공산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박상희는 1946년 대구폭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1946년 10월 5일 진압 경찰관들이 쏜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황태성은 남로당 경북도당의 조직부장으로 역시 대구폭동을 주도하다가 폭동 실패 후 월북, 고향에서 그의 종적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북에서 차관급인 무역부부상으로 지내던 황태성이 서부전선 비무장지대를 넘어 남한으로 잠입한 것은 1961년 8월 말이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에 성공하고 3개월이 지난 후였다. 황태성은 9월 1일 고향의 친지 아들을 만나 “나는 간첩으로 넘어온 게 아니라 김일성의 특명을 받아 밀사로 넘어온 것”이라며 “박정희와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했다. 친지의 아들은 나중에 중앙대 총장에까지 오른 당시 중앙대 강사 김민하였다.
황태성은 10월 5일에는 남한에 살고 있는 자신의 질부를 통해 박상희의 처 조귀분(김종필의 장모)에게 자신의 편지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편지를 받은 조귀분이 이 사실을 자신의 사위인 김종필에게 신고, 황태성은 10월 20일 중정 요원에게 체포되었다. 황태성은 계속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나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의 만남을 요청했지만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내걸 만큼 용공성 해소에 안간힘을 쓰고 있던 박정희가 자칫 함정에 빠질지도 모를 황태성을 만나줄 리가 없었다.
5·16 쿠데타 후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군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은 자신의 과거를 불식하기 위해, 또 자신에게 의혹의 눈총을 거두지 않고 있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반공을 최우선 기치로 내세우고 있었다. 결국 황태성은 박정희는커녕 김종필도 만나지 못한 채 비밀리에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송치되어 1961년 12월 27일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 상고심을 기다리던 1963년 9월 25일 한 야당 집회장에 황태성에 대한 유인물이 뿌려지고 허정 국민의당 대통령후보가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면서 황태성은 더 이상 익명의 존재가 아니었다.
“황태성은 북한 밀사” 주장도 있어
중앙정보부가 황태성의 존재를 세상에 공개한 것은 1963년 9월 28일이었다. 더 이상 숨겼다가는 오히려 20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악재가 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정희도 10월 9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중앙정보부가 나를 만나겠다는 황태성을 붙잡아 법에 의해 처리했다”며 “야당이 떠드는 이야기는 모두 허위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태성이 간첩이라는 박정희 측의 주장과 달리 지금도 “황태성은 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해석할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황태성의 잠입이 있기 1개월 전에 진행된 남북간 비밀회담 때문이었다. 1961년 8월 박정희 군사정권은 북한의 남침 기도를 막고 대북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북한에 비밀회담을 제의했다. 박정희의 남로당 전력에 기대를 걸었다가 혁명정부가 반공을 공약으로 내세운 데 당황한 북한도 박정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회담에 적극성을 보였다.
회담은 박정희, 김종필, 이철희 첩보부대장 등 고위간부 몇 명만이 알고 있었을 뿐 미국의 CIA도 모르게 진행되었다. 양측은 인천에서 뱃길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서해상의 무인도 용매도에서 서로의 배를 끈으로 묶고 배를 오가며 10여차례 회담을 열었다. 태풍 등의 기상악화로 해상회담이 어려워질 때는 황해도 해주로 장소를 옮겨 5차례 더 회담을 진행했다. 북한은 남한과 달리 각료 이상의 고위급 회담을 요구했다. 황태성의 밀파도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잠입한 것이라는 게 밀사론의 근거였다.
황태성은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사형이 확정되어 1963년 12월 14일 인천의 한 군부대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남북통일 만세”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