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 간첩사건을 이해하려면 황태성과 박정희에 대한 사전이해가 필수적이다. 황태성은 광복 후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조직부장으로 10·1 대구폭동을 주도한 뒤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부부상(차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형인 박상희의 결혼을 중매할 만큼 박상희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고, 때문에 박정희와도 친분이 깊었다. 박정희는 한때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 문제가 돼 1948년 11월 조사를 받았으나 그때 이른바 ‘박정희 리스트’를 작성, 군부대 안의 남로당원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5·16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미국이 그에게서 의혹의 눈초리를 떼지 않자 혁명공약 제1조로 ‘반공’을 내걸어 자신의 과거를 불식시키려 했다.
박정희가 또 다시 난처하게 된 것은 2년 뒤였다. 1963년, ‘국민의당’ 대통령후보 허정이 대통령선거 유세 과정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 것이다. 자칫하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부랴부랴 사건의 내막을 밝히도록 중앙정보부에 지시한다. 1963년 9월 27일의 중정 발표에 따르면, 황태성은 5·16 후인 1961년 9월 1일 서울에 잠입, 박정희와 김종필 중정부장과의 만남을 시도하다 10월 20일에 체포됐다는 것이다. 중정은 간첩사건이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사건 관련자들은 ‘밀사’였다고 주장한다. 박정희와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휴전선을 넘었다는 것이다. 결국 황태성은 박정희를 만나지도 못한 채 1963년 12월 처형돼 사건의 진실도 함께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