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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⑯] 김향안(변동림)과 두 남자… 시인 이상에게는 짧고 뜨거웠던 생의 반려자였고, 화가 김환기에게는 뮤즈이면서 매니저였다

↑ 왼쪽부터 김환기·김향안(1944년)과 이상(1920년대 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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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시인 이상(1910~1937)과 화가 김환기(1913~1974)는 우리나라 근현대 문학사와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문화예술인이다. 두 사람을 직접 이어주는 끈은 없으나 각기 다른 시기에 두 사람을 보듬고 끌어안아준 여성이 있으니 김향안(1916~2004)이다. 그는 20살 때는 변동림 이름으로 4개월 동안 천재시인 이상과 뜨거운 청춘을 함께 하고 28살에는 김향안 이름으로 장차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혀나갈 김환기의 뮤즈가 될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변동림 개인사

 

변동림(1916~2004)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변국선은 구한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의학을 공부한 엘리트였다. 한일합병 전에는 중추원 참의직을 거쳐 수원 농림학교 교수로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실로 들어가 변동욱과 변동림 남매를 낳았다. 변동림 위로는 아버지의 전처 소생인 이복 언니 변동숙이 있었다. 변동숙은 시인 이상의 친구이자 꼽추 화가로 유명한 구본웅의 아버지에게 후처로 갔기 때문에 구본웅의 계모였다.

변동림은 경성여고보(현 경기여고)를 졸업한 뒤 오빠의 도움을 받아 도쿄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빠가 병에 걸려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도쿄 유학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할수 없이 프랑스 어학원을 몇 달 다니다 이화여전에 입학, 영문학을 전공했다. 변동림이 이화여전 다닐 때 오빠는 친구가 경영하는 다방 ‘낙랑파라’에서 일을 했다. 낙랑파라는 1930년대 장곡천점(소공동)에서 가장 유명했던 다방으로 박태원 김기림 김소운 구본웅 등 당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 시인 이상도 단골이었다. 변동림에게도 낙랑파라 다방은 신세계여서 커피를 마시러 수시로 드나들었다.

변동림이 20살이던 1936년 어느날 오빠가 “이상이 너 때문에 앓는다”며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당시 이상은 미술계와 문학계에 이름이 제법 알려진 인물이었다. 연작시 ‘오감도’도 2년 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해 파문을 일으킨 유명인이었다. 변동림도 신예 수필가로 문단에 입문한 상태였다. 변동림을 만났을 때 이상은 26살이었다.

1956년 파리에서 김향안

 

■불꽃같았던 이상의 27년 삶

 

이상은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었던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서울 통인동에서 태어났을 때 집안이 가난해 젖을 떼자마자 자식이 없는 백부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예술적 재능 가운데 먼저 드러난 것은 문학이 아닌 그림이었다. 미술에 대한 소질은 1924년 편입한 보성고보에서 발화했다. 그곳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미술 교사로 재직 중이었다. 이상은 교내 미술전람회에서 유화 ‘풍경’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해서는 건축과 교지 ‘난파선’을 만들며 문학으로 관심 영역을 넓혀 미술과 문학을 넘나들었다. 예술적 재능은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로 들어간 1929년부터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었다. 1929년 12월 ‘이상’ 필명으로 조선건축회지인 ‘조선과 건축’ 표지 도안 현상모집에서 1등과 3등으로 당선되었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양화 ‘자화상’으로 입선했다. 19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박태원의 중편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8.1~9.19) 삽화를 그렸다.

이상의 문학이 처음 활자화된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던 ‘조선’지 1930년 2월부터 12월까지 9회에 걸쳐 연재된 장편소설 ‘12월 12일’이었다. 그 후 ‘조선과 건축’ 1931년 7월호에 일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 등이 활자화되면서 시와 소설을 넘나드는 작가가 되었다.

이상의 학창시절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으로 인한 폐결핵이 괴롭혀

재능을 꽃피우던 그 무렵 이상을 괴롭힌 것은 무질서한 독서와 밤샘으로 인한 폐결핵이었다. 1931년 폐결핵 진단을 받은 후 병세가 더욱 악화하자 1933년 3월 총독부 기사직을 그만두고 황해도 배천온천으로 요양을 떠났다. 그곳 술집에서 만난 기생이 ‘금홍’이다. 이상은 1933년 청진동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리고 금홍을 마담으로 앉혔다. 살림집은 다방 뒷골방에 차렸다. 1936년 9월 ‘조광’지에 발표한 소설 ‘날개’는 이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상은 1934년 7월 24일부터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했다. 예상대로 독자들로부터 “미친 수작”, “정신병자의 잡문” 등의 혹평과 비난이 빗발쳐 ‘오감도’는 8월 8일 15회로 중단되었다. 대신 이상이 얻은 것은 명성이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외도에 눈이 멀어버린 금홍에게 “쓸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는 병신”, “돈도 벌어올 줄 모른다”라는 천대를 받은 끝에 2년 만에 금홍과 헤어졌다. 제비 다방도 경영난에 시달리다 1935년 9월 두 해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이상은 인사동에 카페 ‘쓰루(鶴)’, 광교 근처에 다방 ‘69’, 명동에 ‘무기(麥)’ 다방 등을 잇달아 개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인물이 변동림이다.

이상(오른쪽)과 경성고등공업학교 동기 원용석

 

■변동림과 이상의 결혼 그리고 죽음

 

허름한 셋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가 결혼식 올려

변동림의 수필집 ‘월하의 마음’에 따르면, 변동림이 이상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은 후리한 키에 곱슬머리가 나부끼는 모습이었다. 검은 눈이 이글거리듯 타오르고 광채를 발산하는 듯 했다. 쓸쓸한 웃음에 음성은 컬컬했다.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어느날 이상이 “우리 함께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 데 갈까?”라며 마음을 고백했다. ‘먼 데 여행도, 죽는 것도 싫지 않았던’ 변동림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이상에 흥미를 느껴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변동림의 집에서는 이상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변동림은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와 황금정(현 을지로)의 허름한 셋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가 1936년 6월 서울 동소문동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상은 달콤한 밀월 생활을 보내면서도 ‘지주회시’와 ‘날개’를 발표해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상은 어두컴컴한 셋방에서 종일 누워 지냈다. 햇빛을 보지 못한 이상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고, 폐결핵은 깊어졌다. 변동림은 이상의 약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는 바에 나갔다. 그러다가 1936년 10월 이상이 새로운 예술의 돌파구를 찾겠다며 일본으로 건너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4개월 만에 파국을 맞았다. 이상은 도쿄에서 고독과 병고와 싸우며 ‘종생기’, ‘실화’ 등의 소설과 ‘권태’, ‘실낙원’ 등의 수필을 썼다. 훗날 김향안은 당시 이상이 일본에서 쓴 ‘실화’, ‘종생기’ 등 작품 속 여인이 자신일 것이라는 일부 평론가들의 오해 탓에 오랜 시간 고통받았다며 이상을 원망했다. 다만 이상의 천재성만큼은 절대로 깎아내리지 않았다.

이상이 도쿄 방 안에만 박혀 있다가 울혈증 때문에 바람이나 쐬려고 세수도 하지 않은 봉두난발 모습으로 집을 나선 것은 1937년 2월 12일이었다. 오뎅집에서 데운 정종을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더니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며 이상을 끌고갔다. 이상은 3월 16일까지 34일간 이유도 모른 채 옥고를 치렀다. 폐결핵이 심해지자 경찰은 뒤처리가 귀찮아 풀어주었다. 김소운 등 몇 명의 유학생들이 그를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시켰다.

이상과 문우들. 왼쪽부터 이상, 박태원, 김소운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 마쳐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변동림이 도쿄대 부속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상은 이미 절망적인 상태였다. 변동림이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싶냐”고 묻자 이상은 “센비키야((千疋屋)의 메론”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일본의 고급 과일전문점인 니혼바시의 센비키야는 병원에서 멀었다. 서둘러 병원 근처의 노점에서 멜론을 사왔으나 이미 그는 멜론을 받아넘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결국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27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김향안의 짧은 결혼 생활도 막을 내렸다.

변동림은 도쿄 근처 화장장에서 남편의 사체를 화장했다. 유품과 유골을 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20일 전 역시 폐결핵으로 요절한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치르고 유해는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훗날 변동림은 이상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재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친구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 제목이 ‘친구의 초상’이다.

 

오늘날 이상에 대해서는 전위적 실험 정신과 해체적인 서사를 앞세워 분열된 내면세계를 탐구한, 우리 문학사의 대표적 이단아라는 설명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면서 이상을 평가하는 문단의 온도 차는 뚜렷하다. “잉크로 글을 쓰지 않고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썼다”, “이상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모국어의 훼손에 기여한 시인”, “자기 기만의 속임수”라는 부정적인 악평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이상의 누이동생은 이상이 괴팍하고 방탕한 천재로 알져진 것에 대해 “한 번도 집에서 담배를 피운 적이 없고 술을 마시는 모습도 본 적이 없다”며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퇴폐적이고 문란한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김향안·김환기의 만남과 결혼

 

김환기 편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로 가득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떠나보낸 김향안은 한동안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간간히 수필과 소설을 기고하며 지내던 그녀에게 일본 시인 노리다케 가쓰오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덕에 총독부에서 잡지를 편집했다. 당시 노리다케는 변동림을 이성으로 마음 속에 두고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는 못했다. 변동림은 불구처럼 왜소한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노리다케는 구애를 포기하고 자신이 알고 지내는 일본 유학파 출신의 화가 김환기를 소개해주는 것으로 변동림 인생에 살짝 발을 걸쳤다.

첫 만남이 있던 날, 변동림은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직장 동료를 데리고 저녁 자리에 나갔다. 변동림은 28살이었고 김환기는 31살이었다. 김환기를 보는 순간 시골뜨기에 키만 껑충 크다는 느낌을 줄 뿐 인상적이진 않았다. 고향이 전남 신안군 안좌도라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김환기에 대한 인상은 곧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얼마후 김환기가 편지를 보내왔다. 변동림이 그저 답례차 인사한다는 마음으로 답장을 보냈더니 장문의 편지에 이어 그림을 곁들인 편지도 보내왔다. 변동림이 답장을 보내지 않아도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다감한 글로 가득했다. 한때 문학가를 꿈꾸던 사람답게 편지 하나하나가 수필이었다. 소설을 쓰던 변동림은 편지를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편지로 조금씩 가까워졌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김환기는 여전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것은 조혼과 이혼 그리고 고향에 있는 노모와 세 딸 때문이었다. 1942년 가을이 다 지나갈 무렵, 변동림은 자신이 쓴 소설 ‘정혼’이 실린 잡지(국민문학 1942년 12월호)를 김환기에게 보냈다. 잡지에는 이헌구·한설야·안석영·오영진 등 낯익은 문인들의 이름이 여럿 보였다. 그것을 보는 순간 김환기는 변동림이 이미 내로라 하는 문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변동림, “내가 낳아야만 자식이냐”면서 결혼 밀어부쳐

김환기는 변동림을 세 번째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청혼했다. 변동림은 그 순간 당황했지만 이후 꾸준한 교제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신하면서 청혼을 받아들였다. 김환기의 세 딸과 홀어머니도 모두 품기로 했다. 그러나 두 집안 모두 발칵 뒤집혔다. 김환기 어머니는 새 며느릿감이 과부에다 소실의 딸이라는 얘기를 듣고 펄쩍 뛰며 반대하고 몸져 누웠다. 변동림의 집에서도 자식이 3명이나 되는 이혼남을 반길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천하의 변동림이 이미 결심한 것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변동림은 내가 낳아야만 자식이냐면서 결혼을 밀어부쳤다. 김환기도 서울 정착을 위해 작고한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고향의 전답을 정리한 돈으로 1944년 서울 종로구 관철동 부근에 3층 건물을 빌려 종로화랑을 개관했다.

결혼에 앞서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꾸어 새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다. 고향 향(鄕)에 언덕 안(岸)으로 된 향안(鄕岸)은 사실 김환기의 아호였다. 이것을 변동림이 자신의 필명으로 차용한 것이다. 김환기는 대신 ‘수화’라는 아호를 사용했다.

두 사람은 1944년 5월 1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미술계의 어른 고희동이 주례를 서고 김환기와 막역한 정지용·김진섭이 청첩인으로 사회를 본 결혼식에는 서울에서 활동하던 화가와 문인들이 대부분 참석했으나 양가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보금자리는 미술계의 김환기와 매우 가까웠던 미술계 선배 김용준이 물려준 성북동의 노시산방(老枾山房)에 꾸몄다. 김용준은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겨주며 김환기의 호와 김향안의 이름을 따서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김향안과 김환기 결혼(1944년 5월 1일)

 

■김환기의 개인사와 일본 유학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 안좌도에서 천석지기 외아들로 태어났다. 육지가 그리워 목을 빼다 보니 키가 커졌다고 스스로 농을 하곤 했는데 그의 키는 거의 190㎝나 되었다. 서울의 큰누나집에서 중동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32년 도쿄의 긴조중학((錦城中學)을 졸업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외아들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결국 김환기는 아버지의 강요로 1932년 3월 귀국해 4월 밀양박씨 여성과 결혼했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싶어 1932년 12월 아버지 몰래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모친은 부친 몰래 일본으로 학비를 보냈다.

중학 졸업 후 고향에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느라 4년제 대학 대신 3년제 과정인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1933년 4월 입학했다. 그해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첫딸이 태어났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김환기는 1935년 9월 재야적 성격의 미술단체인 ‘이과회’의 이과전에 ‘종달새 노래할 때’를 출품, 입선과 함께 정식 화가로 등단했다. 이후 일본 추상회화의 선구자들과 ‘백만회’를 결성하고 1936년 첫 개인전을 여는 등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37년 추상미술을 표방한 일본의 전위적인 미술단체 ‘자유미술가협회’에 유영국·이상규 등과 가입했는데 이들은 해방 후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제1세대를 대표했다.

1937년 김환기는 일본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10년 동안 이어진 일본 생활을 마감하고 그해 4월 부산으로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다. 귀국 후에도 계속 자유미술가협회와 관계를 맺다가 1941년 탈퇴 후 해방 때까지는 주로 낭인생활로 지내며 글과 그림을 표현한 화문(畵文)을 문예지에 발표했다.

1942년 6월 부친이 사망했다. 김환기는 아버지가 남긴 전답과 안좌도 앞 작은 섬 2곳을 둘러본 뒤 금고를 열어보았다. 부친이 직접 구입한 전답도 있지만 빚 문서와 함께 묶인 논문서가 꽤 많았다. 가뭄이나 기근 때 곡식과 바꾸면서 담보로 맡겼다가 몇 년이 지나도록 갚지 못해 아버지 소유가 된 전답이었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서울 웬만한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김환기는 빚 문서와 땅문서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아내에게도 한 살림 떼어주고 이혼했다.

 

■김환기의 해방 후 활동

 

해방 후 김환기는 1946년 10월 개교한 서울대 미술학부 서양화가 교수로 부임했다.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자 홀어머니와 세 딸을 서울로 불려들였다. 1947년 7월 유영국, 이규상과 등과 ‘신사실파’를 결성하고 1948년 12월 화신화랑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추상 내지 비구상을 통해 순수한 조형미를 추구했던 신사실파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을 잇는 아카데믹한 구상미술이 화단을 지배하던 당시로서는 매우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다. 신사실파란 이름은 김환기가 붙였다. “추상을 하더라도 모든 형태는 사실(寫實)이므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뜻에서 지어졌다. 신사실파는 1949년과 1953년에도 전시회를 열고 해산했다. 1949년 2회 전시회 때 장욱진이 합류해 회원은 4명이었다. 일본 유학을 공통점으로 하는 이들은 회원이 비록 4명에 불과했지만 당시 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높았다.

김환기

 

김환기는 1949년 창립된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1952년 피란지 부산에서 홍익대 미대 교수로 부임했다. 그에게는 유독 문인 친구들이 많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40~1950년대에 창간한 ‘현대문학’, ‘문학예술’ 등의 문예지 표지화나 본문 삽화를 많이 그렸고 문인들의 창작집 표지에도 그의 그림이 많이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의 백자에 빠져 살았다. 한푼이라도 생기면 어디에선가 백자들을 사와 방이란 방은 물론 심지어는 마루밑에까지 두었다.

당시 교수 월급으로 여섯 식구가 먹고살기에는 빠듯했다. 김향안은 특유의 살뜰함으로 김환기가 예술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살림이 어려웠어도 백자 항아리를 사 들고 오는 김환기를 단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친구들에게 그림을 팔러 다녔던 것도 그녀였고, 생활비가 부족할 때 돈을 꾸러 다녔던 것도 그녀였다.

 

■파리 시대(1955~1959)

 

6·25전쟁 후 김환기는 홍익대로 적을 옮겨 후학들을 가르쳤으나 미술의 본향이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일제 강점기 때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서구 미술을 직접 체험하려는 의욕의 발로였다. 그러나 수입이 뻔한 형편에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 귀가하고는 “도대체 내 예술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라며 김향안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대화는 이어졌다. “나가 봐!” “어떻게?” “내가 먼저 나가볼게”

김환기로서는 어렵게 꺼낸 푸념이었으나 김향안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변동림은 프랑스 영사관을 찾아가 출국을 준비했다. 그리고 1955년 4월 20일 혈혈단신 파리에 도착했다. 김향안은 파리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서 미술사와 어학을 공부하면서 남편을 위해 아틀리에(작업실)를 구하고 파리 화단의 사람들을 만나 기반을 닦아놓았다. 김환기는 1년 후 1956년 4월 파리로 날아갔다. 김향안은 생활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김환기의 통역사이자 대변인, 파리 현지 갤러리와 남편을 잇는 매니저 역할을 수행했다.

1956년 파리의 첫 아틀리에에서, 김환기와 김향안 부부

 

1959년까지 이어진 파리 시대에 김환기는 파리, 니스, 브뤼셀, 피렌체, 모나코에서 5차례의 개인전을 열어 김환기 미술을 세계 시장에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환기 그림의 주조를 이루는 특유의 푸른색은 파리 유학시절에 등장했다. 푸른색은 하늘과 동해를 상징했다. 조선 백자를 열성적으로 수집했던 김환기가 백자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김향안은 김환기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신의 글도 계속 썼다. 수필집 ‘파리’ ‘카페와 참종이’ ‘우리끼리의 얘기’ 등을 통해 파리에서의 이국 체험을 통한 내면 성찰, 예술을 매개로 한 김환기 화백과의 사랑 등등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냈다. 파리 시대는 부부가 1959년 5월 서울에 돌아옴으로써 막을 내렸다.

1957년 파리에서

 

■뉴욕 시대(1963~1974) 그리고 김환기의 죽음

 

1963년은 김환기 그림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

서울로 돌아온 김환기는 홍익대로 복직했다. 1962년 5․16 군사정부의 대학 정비령에 의해 홍익대가 홍익미술대로 바뀔 때 초대 학장직을 맡았다. 1963년 2월 군사정부가 모든 예술단체의 통합을 종용해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로 양분되어 있던 미술단체가 ‘한국미술협회’로 통합되었을 때는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부부는 다시 세계로 나갈 꿈을 꾸었다.

1963년은 김환기의 그림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김환기는 1963년 9월 28일부터 그해 말까지 계속된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유영국, 남관, 김기창, 서세옥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선정되어 3점을 출품했다. 이 중 ‘섬의 달밤’이 명예상에 뽑혔다. 김환기는 1963년 10월 6일 상파울루에 도착, 비엔날레를 둘러보고 10월 20일 뉴욕으로 건너갔다. 11년 동안 계속될 ‘뉴욕 시대’의 시작이었다. 나이 50에 홍익대 학장과 한국미술협회장이라는 안정된 자리와 명예를 털어버리고 미지와 모험의 세계에 몸을 던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부부는 또다시 감행했다.

김환기가 뉴욕에 정착하고 8개월이 지난 1964년 6월 10일 김향안도 뉴욕에 내렸다. 부부는 뉴욕시대 초기 1년간은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자리를 잡았으나 지원이 끝나면서 뉴욕 생활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김환기는 전업 화가를 꿈꾸며 미국에 왔으나 이곳에서 김환기는 신인일 뿐이었다.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신문지나 전화번호부에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생활을 책임진 것은 김향안이었다.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김환기가 오롯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보필했다. 그렇게 예술과 생존의 두 가지 싸움을 모두 이겨내며 김환기의 성공만을 위해 열성을 다했다.

1968년 뉴욕 시절의 부부

 

뉴욕에서 점묘 추상화의 경지에 도달

뉴욕에서 김환기는 그전까지의 구체적인 대상이 완전히 지워지고 순수한 선과 점과 면으로 이뤄진 이른바 점묘 추상화의 경지에 도달했다. 뉴욕의 반지하 아틀리에에서 커다란 캔버스에 작은 점들을 하나씩 찍어갔다. 그의 점묘 작품은 화면 전체가 마치 밤하늘의 성좌와도 같은 무수한 푸른색 점으로 뒤덮여 있는 완전한 추상화였다. 김환기의 점화는 단순히 점을 찍는 작업이 아니었다. 그때그때 감정에 따라 큰 점, 작은 점, 굵은 점, 가는 점을 찍으면서도 질서를 잃지 않았다. 그가 뉴욕에서 시작한 점묘 시리즈 중 대표작이 김광섭의 시 ‘저녁에’를 읽고 그린 대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72×232㎝)다.

1970년 초 서울 한국일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한국미술대상전이라는 공모전을 만들었는데 그 해가 처음이므로 공모전의 권위를 세우려면 김환기의 동참이 절실하다는 전화였다.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를 하고 한국미술협회 초대 회장까지 역임한 한국의 대표적 화가에게 추천도 아니고 공모하라는 전화에 부부는 처음에는 기분이 언짢았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잡았다.

김환기는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자신보다 8살 많은 선배 시인 김광섭의 근작 시 ‘저녁에’를 떠올렸다. 둘은 성북동 시절 이웃사촌으로 지내다가 김환기가 뉴욕에 건너가 정착한 이후로는 주로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1969년 12월 김광섭이 ‘저녁에’ 시를 발표했다며 시가 실린 잡지를 보내왔는데 한국일보 전화를 받은 후 문득 ‘저녁에’가 떠올랐다. 김환기는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를 떠올리며 대형 캔버스 한복판에 푸른색을 칠한 뒤 그 위에 푸른 점이 찍힌 사각형을 가득 메웠다. 수많은 점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상징했다. 김환기는 김광섭에게 헌정하듯,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으로 붙여 한국일보에 보냈다. 예상대로  아니 예정대로, 작품은 1970년 6월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김환기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72×232㎝, 1970년)

 

그러나 그의 예술이 활짝 꽃피어갈 즈음, 그의 육신은 서서히 죽음을 맞고 있었다. 결국 1974년 7월 25일 뇌일혈로 쓰러져 뉴욕의 산 언덕 묘지에 묻혔다. 도쿄와 서울, 다시 파리와 뉴욕을 전전하던 ‘영원한 보헤미안’은 이렇게 객지에서 눈을 감았다.

 

■김환기 사후 김향안의 삶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오랜 벗이자 예술적 파트너였던 김환기의 죽음은 김향안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여정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낼 수 없었다. 김환기는 떠났지만, 그의 예술 세계를 널리 알리겠다는 김향안의 다짐은 더욱 단단해졌다. 김향안이 먼저 진행한 프로젝트 중 하나는 김환기의 회고전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1975년 미국 뉴욕에서 유화전(2월),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 회고전(11월), 서울 회고전(12월) 등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김향안은 김환기를 소개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섰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예술전문잡지 ‘공간’에 김환기에 대한 글을 10회에 걸쳐 연재하고 김환기에 대한 해외미술 평론가들의 글을 국내에 소개했다. 이외에도 국내외 매체에 작품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개재될 경우 수정을 요청하고, 각종 오해를 바로잡는 등 김환기 미술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서도 부부의 오랜 꿈인 김환기 미술관을 짓는데 팔을 걷어부쳤다. 그 결과 1992년 11월 5일,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환기 미술관을 부암동에 개관하고 뉴욕에 있던 김환기의 작품들을 가져와 전시했다. 김향안 특유의 끈기와 열성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힘이 더해진 결실이었다. 개관 후 김향안은 이렇게 얘기했다. “내 영혼은 김환기의 영혼과 함께 미술관을 지킬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는가? 김환기의 영혼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김향안은 1997년 미술관 옆에 수향산방을 짓고 살았다.

김향안 수필집 ‘월하의 마음’

 

김향안이 김환기 유작을 꼼꼼하게 관리한 덕에 2022년 현재 김환기 작품은 한국 최고 낙찰가를 경신 중이다. 현재 국내 최고가 작품은 2019년 경매에서 약 132억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1971년작 ‘우주’(Universe 5-IV-71 #200)다. 푸른색 전면점화 ‘우주’는 김환기의 유일한 두폭화(畵)이자 가로·세로 254×254㎝ 최대 규모로, 40년 만에 처음 경매 시장에 나와 신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김향안은 많은 이들에게 두 천재의 아내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이전에 뛰어난 수필가이자 소설가이자 화가였다. 미술 경영인으로서 바쁜 삶을 이어가면서도 직접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64년 이미 서양화가로 화단에 등단하고 자신의 작품들로 1977년과 1988년 뉴욕과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김향안은 시인 이상을 기리는 일에도 힘을 보탰다. 이상이 죽은 지 53년이 지난 1990년, 그의 시비(詩碑)를 건립하려는 논의가 한국에서 일어나자, 직접 사비를 들여 뉴욕의 조각가 한용진에게 제작을 맡겼다. 비석은 현재 이상의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다.

김향안은 뉴욕과 한국을 오가며 89세까지 살다 2004년 2월 29일 생을 마감, 뉴욕 근교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김환기의 묘 옆에 나란히 누웠다. 혹자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김환기가 꿈을 꾸면 김향안이 그것을 현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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