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봉(적취봉) 정상. 뒤는 제7봉(칠성봉)이다.
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6㎞에 4~6시간
☞ 팔영산자동차야영장 → 흔들바위 → 제1봉(유영봉) … 제8봉(적취봉) → 탑재 → 원점회귀
2022년 2월 24일, 아내와 함께 전남 거문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서울에서 고흥까지 내려간 김에 고흥의 명산 팔영산(八影山)을 찾아갔다. 산행 기점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 고흥분소이지만 내비게이션에서 ‘고흥 능가사’로 검색하면 편리하다. 주말에는 산행객이 북적거려 고흥분소 앞에 주차하고 산행을 하지만 그날은 평일이어서 능가사 천왕문 앞 왼쪽길로 올라가 팔영산자동차야영장에 주차했다. 주차장에서 탐방로 입구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팔영산은
팔영산(607m)은 전남 고흥반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2011년 다도해해상국립공원 팔영산지구로 지정되었다. 해발고도가 600m 정도에 불과한데도 100대 명산(산림청·블랙야크)으로 지정되고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은 것은 시원스러운 바다 조망과 8개 암봉을 오르내리는 산행 묘미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능가사에서 바라보는 산세도 절묘하다. 암봉마다 살짝 험한 지형이지만 철계단, 쇠줄·쇠봉 등 안전시설이 잘 갖춰 있어 노약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팔영산(八影山) 이름에는 중국 위왕과 관련된 전설이 어른거린다. 중국 위나라 왕이 세숫대야에 고인 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八影)’를 보고 신하들을 시켜 산을 찾았는데, 바다와 맞닿은 고흥 땅에서 이 산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중국 위나라는 220년 조조의 셋째 아들 조비가 황제가 되어 세운 왕조인데 굳이 멀리 떨어진 고흥에서 위나라까지 들먹이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팔영산 봉우리는 10개이지만 산행은 주로 8개 암봉을 잇는 코스로 진행된다. 남북으로 나란한 8개 봉우리 이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암봉을 오르는 맛이 제법 쏠쏠하다. 봉우리가 8개이니 봉우리 정상에 오르는 성취감도 8번이나 된다. ‘선비의 그림자’를 뜻하는 제1봉 유영봉(儒影峰)에서 ‘비췻빛 푸르름이 쌓였다’는 제8봉 ‘적취봉(積翠峰)’에 이르기까지 봉우리마다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코스는
코스는 서너 가닥이다. 그중 능가사 부근에서 출발해 제1봉(유영봉)부터 제8봉(적취봉)까지 순서대로 종주한 후 탑재를 거쳐 하산하는 원점회귀 산행이 가장 일반적이다. 6㎞ 정도 거리에 4~6시간 걸린다. 등산객이 많은 주말이나 휴일이면 이 순서대로 산행하는 것이 좋다. 철계단이 많아 역주행할 경우 마주 오는 등산객과 마찰이 생길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제1봉→제8봉 순서가 고도를 조금씩 높여가고 봉우리도 뒤로 갈수록 웅장한 맛이 있어 역순보다는 산행 맛이 좋기 때문이다. 다른 코스로는 ▲신흥마을~강산폭포~선녀봉을 거쳐 8개봉으로 올라가는 코스 ▲휴양림에서 출발해 8개봉을 거치는 코스도 있다. 특히 강산폭포~선녀봉 구간은 관리소에서 경고할 만큼 험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팔영산 8개봉을 오르내리다 보면 떠오르는 산이 있다. 강원도 홍천의 팔봉산(八峰山)이다. 이곳 암봉도 8개인데 산세와 산행 방식이 팔영산과 여러모로 비슷하다. 팔봉산의 최고봉은 327.4m여서 높이로만 보면 만만하다. 하지만 막상 올라보면 간단치 않은 산이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산 전체가 날카로운 바위산인데다 봉에서 봉으로 이동할 때마다 급경사와 절벽을 오르내려야 한다. 다행히 기암과 절벽 사이로 등산로가 잘 갖춰져 있어 지루할 새 없이 등산의 묘미와 스릴을 만끽할 수 있다. 팔영산에서 남해 바다를 내려다보며 산행하듯이 팔봉산에서는 산을 휘감고 흐르는 홍천강을 감상하며 봉우리를 오르내린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우리 산행은
우리 산행도 능가사 부근 팔영산자동차야영장에서 시작해 원점회귀 코스로 진행했다. 능가사는 하산 후 살펴보기로 했다. 다만 하산 후 피곤하다고 해서 능가사를 지나치면 안된다. 반드시 능가사 안 마당에서 팔영산 8개봉을 바라보아야 8개 기암괴봉이 돌병풍 같은 모습으로 기운차게 솟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의 전체 거리는 6㎞ 정도다. 구간별 거리는 탐방로 입구 →(1.2㎞)← 흔들바위 →(0.6㎞)← 제1봉 유영봉 →(1.3㎞)← 제8봉 적취봉 →(1.1㎞)← 탑재 →(1.8㎞)← 원점회귀다. 코스는 탐방로 입구 → 흔들바위 → 제1봉(유영봉·491m) → 제2봉(성주봉·538m) → 제3봉(생황봉·564m) → 제4봉(사자봉·578m) → 제5봉(오로봉·579m) → 제6봉(두류봉·596m) → 제7봉(칠성봉·598m) → 제8봉(적취봉·591m) → 탑재 → 원점회귀 순이다.
▲들머리~제1봉
탐방로 입구에 8개봉을 인공적으로 축소해 만든 50㎝ 정도 높이의 화강암이 순서대로 서 있다. 국립공원 측의 발상이 좋다. 입구를 통과하면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길 오른쪽에서 시누대(신이대=해장죽)가 2월인데도 연초록 빛을 띠고 있다. 이 대목에서 시누대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본다. 시누대는 대나무의 일종이나 대나무와는 다르다. 요즘은 주로 향피리 재료로 쓰이지만 과거에는 화살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재료였다. 사실 동이족(東夷族)으로 불린 우리 한민족도 활을 잘 쏘는 데서 유래한다. 동이의 ‘이(夷)’를 해자하면 큰(大) 활(弓)이다. 그 활의 화살이 바로 시누대에서 나왔으니 알고 보면 우리 역사와 민족을 지켜온 일등공신인 셈이다.
길은 계속해서 편안한 흙길에 완경사다. 곧이어 자연석을 평평하게 깔아놓은 돌계단 구간이 나타나는데 아기자기하다. 그렇게 40분 가량 오르니 서어나무 군락이 산죽(조릿대)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흔들바위(289m)다. 생김새만 흔들바위이고 실제로는 흔들거리지 않는 그곳에서 뒤쪽 주차장까지는 1.2㎞이고 앞쪽 제1봉(유영봉)까지는 0.6㎞ 거리다. 흔들바위를 떠나 숲 사이 나무데크를 지나니 살짝 가파른 자연석 돌계단이다. 뒤이어 눈앞에 우뚝 솟구쳐 있는 거대 암벽을 올려다보며 쇠봉 난간의 쇠줄을 잡고 올라가니 ‘선비의 그림자’를 뜻하는 제1봉 유영봉(儒影峰·491m)이다. 흔들바위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제1봉~제8봉
제1봉(유영봉·491m) 정상은 비교적 넓은 마당바위다. 멀리 동쪽의 선녀봉과 그 너머 여자만(汝自灣)을 바라보는 정상석 모습이 앙증맞다. 여자만 다도해 풍경도 일품이다. 능사가와 야영장 주차장도 내려다보인다. 선녀봉은 여자만 쪽 능선 위에 홀로 우뚝 솟아있어 늠름하고 고고한 모습이다. 제8봉까지 가는 암릉길 어디서나 보이니 8개 암봉의 지휘자 같다.
제1봉에서 바라보는 제2봉(성주봉·538m)이 우람한 성채처럼 보인다. 제1봉과 제2봉 사이 안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급경사 철계단이 2봉 꼭대기를 향해 길게 이어져 있다. 제8봉까지 안부와 봉우리를 반복해서 오르내리지만 안부가 한참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힘들지는 않다. 고도를 몇십 미터 내려갔다가 다시 몇십 미터 올라가는 정도다. 철계단을 오를 때도 약간의 스릴감과 고도감을 느끼지만 구간마다 쇠봉·쇠줄 등 안전장치가 잘 갖춰져 있어 위험하지 않다. 그래도 힘들다 싶은 산행객을 위해서는 우회로까지 만들어놓아 안전하게 산행할 수 있다.
제1봉에서 안부(유영봉사거리)로 내려와 철계단을 오르면 산봉우리가 부처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제2봉 성주봉(聖主峰·538m)이다. 성주봉에서 방금 지나온 유영봉을 바라보면 고도차가 47m인데도 유영봉 정상석과 마당바위가 내려다 보인다. 성주봉 아래 안부(성주봉삼거리·511m)에서는 동쪽 팔영산자연휴양림으로 내려갈 수 있다. 거리는 1.4㎞다. 제3봉 생황봉(笙簧峯·564m)은 암릉길에서 살짝 비껴난 곳에 있어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생황봉은 바람이 바위를 스치면 생황(아악에 쓰이는 관악기) 소리가 난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생황봉에서 사자봉(제4봉)과 오로봉(제5봉)이 연이어 보인다.
스릴감 고도감 느껴지지만 안전장치 덕분에 위험하지는 않아
제4봉 사자봉(獅子峯·578m)은 멀리서 보면 사자가 엎드린 모양이어서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실감할 수 없다. 봉우리 정상에 서니 제5봉(오로봉)과 제6봉(두류봉)이 연이어 보이고 멀리 왼쪽으로 깃대봉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봉우리와 봉우리 간 거리는 직선으로 수백미터 정도다. 제5봉 오로봉(五老峰·579m)에서 바라보면 가파르게 솟구친 두류봉(제6봉)이 철벽처럼 버티고 있다. 급경사 암벽인데다 8개 봉우리 중 경관이 가장 장쾌하니 팔영산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수직 절벽의 단애에 길게 설치된 철계단이 마치 지네가 기어오르는 듯 하다. 쇠사슬과 쇠발판 등이 설치되어 있어 위험하지는 않지만 고도감과 스릴감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구간이다.
가파른 철계단을 타고 제6봉 두류봉(頭流峰·596m)에 올라서면 조망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다른 봉우리에선 반쯤 가렸던 다도해의 전모도 드러난다. 동쪽으로는 여전히 여자만 바다가, 남쪽으로는 우주센터가 있는 나로도 일대의 바다가 펼쳐진다. 뒤돌아보면 방금 지나온 오로봉, 사자봉, 생황봉이 한지붕 세가족처럼 붙어있다. 두류봉에서 내려간 안부(두류봉사거리)에서는 휴양림이 1.0㎞, 고흥분소 주차장이 3.3㎞(야영장 주차장은 2.5㎞), 칠성봉이 0.2㎞ 거리다. 두류봉 아래 안부까지는 거리가 상대적으로 길긴 하지만 순해서 크게 무리는 없다. 제7봉 칠성봉(七星峰·598m)에 오를 때는 주상절리 느낌의 거대 바위와 통천문(通天門) 바위가 볼거리를 제공한다. 제7봉 칠성봉은 8개 봉우리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 그래봤자 고만고만하다. 4봉, 5봉, 7봉은 이름이 숫자와 연결된 사자봉, 오로봉, 칠성봉이어서 기억하기 좋다.
마침내 마지막 봉우리인 제8봉 적취봉(積翠峰·591m)이다. 제1봉에서부터 제8봉까지 쉬엄쉬엄해서 2시간 10분 걸렸다. 적취봉에서 살짝 내려가면 삼거리 안부다. 그곳에서 20분이면 제9봉 깃대봉(旗臺峯·609m)에 닿지만 암봉이 아닌데다 밋밋해 보통은 깃대봉까지 가지 않고 탑재를 거쳐 바로 하산한다. 그래도 깃대봉 정상이 예전 봉수대가 세워졌을 만큼 나름 조망이 있고 팔영산 최고봉(607m)이어서 지도상으로는 언제나 정상 대접을 받는다. 능선을 바다 쪽으로 내밀고 있는 깃대봉에 서면 고흥 동남쪽의 바다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제8봉~원점회귀
하산은 탑재를 거쳐 능가사로 원점회귀한다. 적취봉 아래 적취봉삼거리(578m)에서 탑재까지는 1.1㎞, 야영장까지는 2.9㎞다. 적취봉삼거리에서 바라보이는 모습은 온통 숲과 그 너머 바다와 섬들이다. 완만한 자연석 단을 따라 내려가면 곧이어 편백나무 숲을 지난다. 팔영산에는 수령 30년이 넘는 편백나무가 수십만 그루나 자란다. 편백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임도가 나오고 이내 탑재(고개)에 닿는다. 적취봉삼거리에서 탑재까지 걸리는 시간은 40~50분 정도다. 탑재에서 팔영산 정상부를 올려다보면 8개봉 중 3~4개봉만 보이고 그 아래 거대한 중턱은 온통 편백나무 숲이다.
탑재부터는 임도를 가로질러 등산로가 나 있다. 탑재에서부터 2㎞가 채 안되는 내리막길은 자연석 돌길이다. 국립공원답게 평평하게 잘 만들어놓고 길도 이쁘다. 2월 말이라 그렇지 초록이 살아있는 4월 후반부터는 매력적일 것 같다. 올라갈 때 수고한 것을 힐링해주는 내리막 오솔길이다. 원점회귀하니 7시간 20분이나 걸렸다. 다른 산행객보다 엄청 많이 걸렸다. 그만큼 쉬엄쉬엄하며 조망을 즐겼다는 얘기일 것이다.
■능가사
능가사는 전성기 때는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손꼽혔던 명찰이었다. 40여개 암자까지 거느린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당우가 적어 고요하고 썰렁하다. 그래도 2점의 보물을 품고 있으니 대웅전(제1307호)과 조선 숙종 때 주조한 동종(제1557호)이다. 신라 눌지왕 때이던 417년 백제 아도 화상이 보현사란 이름으로 창건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44년(인조 22) 벽천대사가 중창하면서 ‘인도의 명산을 능가한다’는 의미로 능가사(楞伽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1768년(영조 44)과 1863년(철종 14)에 각각 중수하고, 1993년에 응진전을, 1995년에 사천왕문을 각각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능가사가 고즈넉하면서도 고찰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돌병풍처럼 펼쳐진 팔영산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