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길선주 장로의 회개와 평양대부흥운동 폭발… 평양은 이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려

↑ 길선주 목사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의 근원은 ‘평양대부흥운동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특성을 결정짓는 요소 중에는 새벽기도회와 통성기도가 있다. 근원을 좇아가보면 길선주 목사(1869~1935)와 그가 점화해 한국의 기독교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평양대부흥운동회’를 만나게 된다. 길선주는 평남 안주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우다가 중국의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성교와 선도 등에 심취해 20세 때인 1889년 입산수도했다. 산중에서 정좌법과 도인법으로 심신을 단련해 초인적인 힘을 얻고 차력술에 능했다. 전국에서 선도를 배우고 차력을 연마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저잣거리에서는 ‘길 도인’으로 불렸다.

그러던 중 “눈이 파랗고 코가 크고 머리털이 빨간 괴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양교에 발을 들여놓으면 혼을 뽑아서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려왔다. 소문에서 말하는 양교는 기독교였고 괴상한 사람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된 새뮤얼 모펫(한국명 마포삼열)이었다. 모펫은 1890년 1월 제물포에 도착해 그해 말부터 평양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893년 2월 평양의 널다리골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처음 예배를 드리고 1894년 1월 평양 장로교회에서 첫 세례를 주었다.

길선주는 기독교의 실체가 궁금했다. 모펫을 만나 기독교 교리를 물었고 ‘텬로력뎡(천로역정)’도 읽었다. ‘텬로력뎡’은 영국 소설가 존 버니언의 종교소설을 조선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선교사 존 게일이 1895년 번역·간행한 책으로 한국 최초로 번역된 첫 서양 소설이었다. 길선주는 번민에 빠져 며칠 동안 간곡하게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아한 옥피리 소리가 방에 진동하더니 어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길선주는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 눈물이 쏟아지고 몸이 펄펄 끓었다. 결국 이튿날 모펫의 널다리골교회 문을 두드렸다. 길선주는 1897년 8월 15일 28세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그레이엄 리(한국명 이길함)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모펫은 전도와 교육 사업을 길선주에게 일임했다. 길선주는 글방과 야학을 설립해 성경과 학문을 가르쳤다. 가정의 복음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1898년 3월 여전도회를 조직했다. 아들과 딸이 1898년과 1900년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큰 아픔을 겪었으나 그럴수록 교회에 더욱 헌신했다. 널다리골교회는 교인이 급속히 증가해 1900년 6월 장대현에 새로 지은 대형 교회로 이사했다. 1년 뒤 장대현교회의 교인은 1,400여 명으로 급증했다.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부터 오른쪽으로 새뮤얼 모펫 선교사, 길선주 목사. 그레이엄 리 신교사가 평양 장대현교회 앞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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