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한국 청소년축구 ‘세계 4강 신화’ 달성과 박종환

↑ 한국과 폴란드의 3·4위 결정전 경기 모습

 

세계청소년대회 예선 탈락했으나 북한의 난동 덕에 출전 자격 획득

대한민국 축구의 ‘4강 신화’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활짝 꽃을 피웠다. 하지만 처음 싹을 틔운 것은 1983년 6월 2일 멕시코에서 개막한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현 U-20 월드컵)였다. 한국의 청소년축구대표팀은 그 대회에서 4강에 올라 세계 축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29년 동안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한 축구 변방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4강 신화’의 주역은 청소년축구 대표팀 감독 박종환이었다. 그는 1936년(호적상으로는 1938년) 황해도 옹진에서 태어나 춘천고에서 축구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함께 축구선수로 활동한 춘천고 동기 중에는 훗날 대한민국 최고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될 이주일도 있었다. 박종환은 고교 졸업 후 신흥대(경희대)를 거쳐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나 선수로서는 화려하지 않았다. 이후 지도자로 뛰어들어 몇몇 고교 축구팀 감독을 거쳐 1976년 서울시청 감독으로 부임해 서울시청팀을 명실상부한 실업 최강의 팀으로 올려놓았다.

그는 경기 중 한 번도 웃지 않는 감독, 선수들의 경기를 늘 차갑게 노려보는 감독으로 유명했다. 호랑이 감독이었고, 축구밖에 몰랐으며 가혹할 정도로 심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선수들의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성적이 좋아 1980년 청소년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고 1981년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을 우승시켜 승부사적 기질을 지닌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박종환은 1983년 6월 2일 멕시코에서 개막하는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예선을 준비했으나 아시아 동부지역 예선에서 중국과 북한에 져 멕시코 본선행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북한이 1982년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의 난동으로 2년간 국제대회 출전이 금지된 덕에 3위였던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에 대리 출전하는 행운을 얻었고 마침내 종합 1위에 올라 세계대회 출전 자격을 획득했다. 지금은 (만) 20세 이하가 나가지만 당시는 19세 이하였다. 그야말로 진짜 ‘청소년’ 대회였다. 그런데 이 행운을 거부하려는 대한축구협회 간부가 있었다. 당시 축구협회 부회장이 “나가봤자 망신”이라며 AFC 본선 티켓을 반납하라고 한 것이다. 박종환은 “허락 안 해주면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서야 허락을 받았다.

 

세계 언론 ‘오리엔트 특급’, ‘붉은 악마’ 찬사 아끼지 않아

출전권은 얻었지만 초기 사정은 열악했다. 박 감독과 코치 1명뿐 스태프도 없었다. 선수들 각자 쌀과 반찬을 챙겨와 직접 식사를 해결했다. 조리사조차 없어 박종환 감독이 숙소 주방을 빌려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일 때도 있었다. 훈련 방식도, 대회 준비도 주먹구구인 건 매 한가지였다. 산소가 부족한 멕시코 고지대에 대비한다며 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400m 트랙을 20바퀴 이상 달리게 했다. 훈련 중 호흡이 가빠 쓰러지는 선수도 있었다. 엄격한 규율과 체벌도 병행했다. 지금 같으면 인권침해 이야기가 나올 상황이지만 그때 모두가 묵묵히 견딘 덕에 본선 멕시코전에서는 큰 효과를 보았다.

한국은 6월 3일 본선 첫 경기 스코틀랜드전에서 2-0으로 패했다. 그러나 홈팀 멕시코와의 2차전서 종료 1분 전 터진 신연호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고 3차전 호주와의 경기에서도 2-1 승리를 따내 조 2위로 세계를 무대로 한 국제축구대회 출전 사상 첫 8강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멕시코전에서 4-2-4 포메이션으로 깜짝 승리를 따내면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벌떼 축구’라는 조어도 생겨났다. 전혀 예상치도 않은 승전보는 전국을 들끓게 했고, 일찍이 한국 축구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스타일은 축구팬들을 사로잡았다.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상대로 8강전이 벌어진 6월 12일, 온 국민이 일요일 아침의 늦잠을 포기하고 TV 앞에 모여 앉았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과시하며 겁 없이 달려드는 붉은 전사들에게 우루과이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팀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신연호의 골 덕에 전후반을 1-1로 마치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전반 14분. 김종부가 오른쪽을 돌파해 정확한 땅볼 센터링을 보냈고 문전에 기다리고 있던 신연호가 승리를 결정짓는 회심의 오른발 터닝슛을 성공시켰다. 2-1 승. 세계청소년대회 4강 신화의 달성이었다. 세계 언론은 한국을 가리켜 ‘오리엔트 특급’, ‘붉은 악마(Red Devils, 당시엔 붉은 악령·Red Furies)’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6월 15일 4강전 상대팀은 세계 최강 브라질(대회 우승)이었다. 김종부가 선취골을 성공시켜 전 국민을 열광시켰으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잇따라 2골을 허용해 1-2로 패하고 말았다. 폴란드와의 3~4위전에서도 1-2로 역전패해 4위에 그쳤다. 그러나 국민은 기적 같은 4위 입성에 너나없이 박수와 갈채를 보냈다. 예선에서 한국에 져 8강이 좌절된 홈팀 멕시코 관중도 이역만리 청년들 투지에 매료되었다. 신연호는 훗날 “멕시코인들은 우리 선수단 버스를 에워싸 환호했고 훈련장·경기장을 찾아왔다.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줬고 ‘옷에 사인해 달라’고 요청했다”며 “말은 정확히 통하지 않았지만 죽기 살기로 뛰는 우리 모습에 감동을 받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4강 브라질전 시청률은 약 83%였다.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한국 축구 시청률 조사치(2위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 79%) 중 최고였다.

축구 세계 4강이란 기적을 쟁취하고 귀국한 청소년 축구 대표 선수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 김포공항부터 광화문까지 시내 카퍼레이드를 벌일 때는 수십만 시민이 태극기와 풍선을 흔들거나 나팔을 불어 환영했다. ‘축구광’이던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로 초청해 선수들을 치하하고 선수단 전원에게 격려금 100만원을 금일봉으로 전달했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신연호 선수는 고려대 총장의 금 목걸이, 전남도지사의 금일봉을 받아 총 500만원 정도를 보너스로 받았다. 대기업 신입 사원 월급이 20만~30만원이던 시절이었다.

 

‘4강 신화’ 후, 국제대회에서는 승운 따르지 않았으나 국내에서는 승승장구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 후 박종환의 축구는 고전의 연속이었다. 1984년 LA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지만 지역 예선전에서 패해 올림픽 본선 진출 좌절이라는 고배를 마셨다.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 때도 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준결승에서 쿠웨이트에 패해 아시안게임 2연패에도 실패했다. 이처럼 국제대회에서는 승운이 따르지 않았으나 국내 프로축구에서만은 승승장구했다. 성남 일화팀을 이끌며 1993~1995년 K리그 3연패의 금자탑을 쌓아 제2의 전성기를 보냈다. 1996년에는 일화팀으로 아시아 그랜드슬램까지 달성해 AFC(아시아축구연맹) 선정 최우수클럽상을 수상하는 등 성남 일화의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박종환은 그해부터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1996년 7월, 그해에 치러질 아시안컵과 1998년의 프랑스월드컵을 겨냥한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으로 참패하는 바람에 월드컵 사령탑도 물거품이 되었다. 박종환은 일부 선수들의 태업을 참패의 원인으로 유추했다. 입증할 수는 없었으나 당시 축구계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소문이 있었다. 어린 청소년들과 달리 머리가 큰 프로선수들이 박종환의 혹독한 훈련방식을 참지 못하고 반발한다는 소문이었다. 게다가 박종환 감독은 국가대표 출신의 스타 감독도 아니었다.

박종환은 이후 한동안 여자축구를 활성화하는 데 매진했다. 여자축구단의 단장을 맡고, 2001년 국내 중·고·실업팀이 모두 망라된 여자축구연맹 초대 회장직을 맡았다. 2003년 대구시민의 축구단인 대구 FC 창단 감독을 맡아 2006년까지 지도했으나 예산과 선수 부족으로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그후 7년 동안 축구계를 떠나 있다가 2013년 성남시민축구단 초대 감독을 맡았으나 2014년 4월 선수 폭행 파문을 일으켜 자진사퇴 형식으로 축구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도 박종환에게는 ‘영원한 축구감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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