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 미문화원 1층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길이 솟아올랐다. 비슷한 시각, 1980년의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유인물 700여 장이 주변에 뿌려졌다. 불은 1층을 모두 태우고 1시간 만에 진화되었으나 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동아대생 장덕술군이 불에 타 숨지고 3명의 학생이 중경상을 입었다.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낯설던 시절, ‘반미’의 금기를 깬 이 사건은 투쟁의 격렬성과 대담성으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고, 미문화원이 1980년대 반미 투쟁의 표적이 되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사건의 윤곽은 3월 30일 방화를 실행한 고신대생 이미옥 등이 잡히면서 드러났고, 사건의 전모는 4월 1일 주범으로 공개 수배된 고신대생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4월 2일 문부식의 배후로 광주항쟁 수배자 김현장이 검거되고 3일 후 김현장을 은닉한 혐의로 최기식 신부가 연행되면서 불길은 예기치 않게 천주교 쪽으로 번졌다. 전두환 정권이 평소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천주교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하기 시작하자 천주교 측은 “범죄 혐의자라도 도움을 필요할 때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교회법을 내세워 맞섰다. 8월 11일 사건 관련자 16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과 이미옥은 무기징역, 다른 관련자들은 징역 3년에서 15년까지 선고되었다.

부산 미문화원에서 한번 터진 반미의 물꼬는 전국의 미문화원을 쓸고 지나갔다. 광주 미문화원에 화염병이 투척(1982.11)되었고 대구 미문화원에서는 폭발물이 터져(1983.9) 수명이 죽거나 다쳤다. 서울의 미문화원도 73명의 대학생들에게 점거(1985.5)되는 등 전국의 미 문화원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사형선고를 받고 6년 9개월 만에 풀려난 문부식은 운동권으로부터 한때 ‘반미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았으나 2002년 “경찰관 7명이 순직한 부산 동의대 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지정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입장을 표명한 뒤 진보․좌파세력으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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