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땅 구석구석

[월출산 국립공원 ③ 도갑사 ~ 구정봉 ~ 천황봉 ~ 구름다리 ~ 천황야영장] 등산객이 가장 걷고 싶어하는 종주 코스(9㎞)… 가파르고 길어도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죠

↑ 구정봉에서 바람재로 내려가는 길. 천황봉 정상이 운무에 가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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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 내맘대로 평점(★5개 만점). 등산요소 ★★★ 관광요소 ★★★★
☞ 9㎞에 6시간 내외
☞ 도갑사 →(2.7㎞)← 억새밭 →(1.5㎞)← 구정봉 →(1.6㎞)← 천황봉 →(1.8㎞)← 구름다리 →(1.4㎞)← 천황야영장

 

희용 부부와 우리 부부가 월출산을 찾아간 것은 2022년 4월 29일이다. 서울 마포에서 오전 6시 20분 출발해 월출산 부근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1시 도갑사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출발시간이 늦어진 것은 고속도로가 막히는 데다 코로나19의 여파로 평일에 문을 연 도갑사 근처 식당을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구정봉에서 바라본 천황봉. 오른쪽 하단 바위 지나 움푹 패인 곳이 바람재 고개다.

 

■월출산 정보

 

▲월출산은 이런 산

월출산은 영암평야와 나주평야의 너른 들판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암릉 명산으로 설악산·주왕산과 함께 국내 ‘3대 바위산’으로 꼽힌다. 기암과 산줄기가 겹쳐지며 만들어낸 절경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해발고도가 810m에 불과해 1000m가 훌쩍 넘는 내륙의 산들과 비교하면 ‘그만그만한 산’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바다와 가까운 영암의 들판 위에 우뚝 솟아 있어 산행하는 노고는 내륙의 1000m 고봉들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다. 최고봉인 천황봉(810m)을 중심으로 구정봉, 사자봉, 장군봉, 향로봉, 노적봉 등 걸출한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30%가 전남 강진, 70%가 영암 땅에 속한다.

국립공원 중 면적은 가장 작으나 암릉미에서만큼은 여느 국립공원에 뒤지지 않는다. 능선마다 창과 칼을 들고 늘어선 봉우리와, 우뚝하게 솟아있는 온갖 형상의 바위들이 매력이다. 멀리서 보면 근육질 남자처럼 당당하고 올라가보면 오밀조밀한 바위탑과 봉우리들이 사통팔달로 펼쳐진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화승조천(火昇朝天)의 지세’, 즉 ‘아침 하늘에 불꽃처럼 내뿜는 기를 지닌 땅’이라고 기록했다. 월출산(月出山)의 한자를 풀어쓰면 ‘달맞이 산’이다. 그래서 월출산 자락엔 월곡리·송월리·월남리·월롱리·야월리 등 ‘달 월(月)’ 자가 들어간 마을이 많다. ‘영험한 바위’를 뜻하는 영암(靈巖) 지명도 바위가 많은 월출산에서 유래한다.

천황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동남쪽 암릉들. 왼쪽부터 705봉 달구봉 양자봉이고 저 아래는 월남저수지다. (2021년 12월 초 촬영)

 

▲주요 산행 코스

산행의 주요 들머리는 천황사, 도갑사, 경포대, 산성대 입구 네 곳이다. 이 가운데 경포대 기점은 강진군 쪽에 있고, 나머지는 영암군 쪽에 있다. 어느 등산로를 택하든 정상에 올랐다가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데 4~5시간쯤 걸린다. 4개의 들머리 중 산행객에게 가장 인기있는 들머리는 천황봉탐방지원센터다. 문제는 이 코스가 길이 가파른 데다 바위투성이라 등산 초보자에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세 곳은 상대적으로 순하고 편하다.

천황사 원점회귀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길이라면 9㎞ 거리의 주능선 종주 코스(천황사~구름다리~천황봉~구정봉~도갑사)는 등산객들이 가장 걷고 싶어하는 코스다. 월출산의 명물인 구름다리 위에서 아찔한 고도감을 경험하고, 천황봉을 거쳐 구정봉∼바람재~억새밭∼도갑사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걸어가며 주변 절경을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반 등산객이 이 코스를 꺼려하는 것은 천황사~천황봉 구간이 가파른 데다 천황봉~도갑사 구간이 길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대로 도갑사에서 올라가 천황사로 내려오는 등산객도 있으나 이 종주 코스의 문제는 하산 시 무릎에 무리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장년층에 해당하는 걱정이다.

월출산 지도

 

▲우리 산행 코스

우리는 도갑사에서 출발해 구정봉과 천황봉을 밟고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야영장으로 하산한다. <도갑사 →(2.7㎞)← 억새밭 →(1.5㎞)← 구정봉 →(1.6㎞)← 천황봉 →(1.8㎞)← 구름다리 →(1.4㎞)← 천황야영장>으로 이어진다. 산행 거리는 9㎞다. 당초 산행 시간은 6시간으로 잡았지만 동행 여성들이 암석길 하산에 약한 50대 중후반이고 평소 험한 산을 타지 않는데다 깜깜한 밤에 내려와 실제로는 7시간 30분이 걸렸다. 그래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내려와 감사할 뿐이다.

산행 후 “왜 천황야영장으로 올라가지 않고 도갑사로 올라갔느냐”는 지인들의 물음이 있었다. “그러면 하산이 편해 깜깜한 밤에 내려와도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산을 좀 탄다는 사람들은 모두 천황사로 올라가 도갑사로 내려가는 코스를 선호한다. 그런데 출발 전 나의 생각은 50대 중후반의 두 여성이 급경사 산행에 익숙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완경사에다 순한 도갑사로 올라가 구름다리를 거쳐 천황사로 여유롭게 내려오는 것이 좋겠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과적으로 하산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래서 깜깜한 밤에 고생고생하며 내려왔으니 지인의 지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두 여성이 급경사의 천황사 코스로 올라갔다면 분명 힘들어 했을 것이고 그래서 시간이 더뎠다면 도갑사 하산도 순탄치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인의 지적이 무조건 맞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다만 천황봉에서 경포대능선삼거리를 지나 구름다리로 내려가지 않고 계곡의 바람폭포삼거리로 내려가 0.3㎞ 거리의 구름다리로 올라갔다가 하산했다면 거리도 짧고 암벽 구간도 아니어서 더 쉬울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미왕재에서 바라본 향로봉(우측)과 암릉

 

■등산로 : 도갑사 → 미왕재 → 구정봉 → 천황봉

 

▲도갑사에서 미왕재까지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산(376m)을 등지고 주지봉(493m)을 바라보는 넓은 산자락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이다. 서기 880년(신라 헌강왕6년)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창건하고, 15세기 중엽 수미와 신미대사가 중창했다. 도갑사 입구에는 도갑사생태공원으로 꾸며졌는데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그중 인상적인 것은 도갑사 일주문 앞에 터주대감으로 자리잡은 이리 휘고 저리 휜 거대한 팽나무다. 수령이 500여년이나 된다. 도갑사 안팎으로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해탈문(국보 제50호), 구정봉 아래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미륵전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목조 문수·보현동자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석탑(보물 제1433호) 등이다.

도갑사 일주문 앞 팽나무

 

도갑사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등산 코스는 호젓한 길을 100여 미터 지난 곳에 자리잡은 도갑사 해탈문(국보50호)을 지나 경내를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해탈문은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해탈문 사이로 도갑사 경내가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다. 등산길은 대웅보전 뒤로 나 있다. 대웅보전은 최근 새로 칠한 듯 단청이 화려하면서 컬러풀하지만 다른 사찰과 달리 색상에서 절제미와 기품이 느껴진다. 대웅보전 앞에는 고려 초 건립한 5층석탑과 느티나무가 대웅보전의 수호신처럼 서 있다.

대웅보전을 왼쪽으로 돌아 등산길로 접어들면 곧바로 왼쪽 계곡의 용수폭포가 청량한 소리로 반겨맞는다. 이곳은 KBS드라마 ‘성균관스캔들’(2010년)의 촬영지였다. 밤새 비가 내려 작은 계곡물이 콸콸콸 흐른다. 다만 폭포 쪽에 목책을 쳐놓아 폭포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게 한 건 아쉽다. 곧이어 숲으로 들어서면 길은 좌우로 갈라지는데 왼쪽은 미륵전, 오른쪽은 등산로다. 미륵전 돌계단을 오르면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이 유리문 안에서 객을 맞이한다. 불상이 몸체와 광배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있어 마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도갑사 대웅보전

 

매년 4월 말 만나는 연초록을 볼 때마다 행복하고 황홀

미륵전에서 내려와 오른쪽 등산로로 접어들면 도선국사와 수미대사의 행적을 기록해놓은 거대한 도선수미비(보물 1395호)가 눈길을 끈다. 18년에 걸친 불사 끝에 1655년(조선 효종6년) 건립되었다. 도선수미비 옆 부도전은 월출산 자락에 흩어져 있던 부도 11기를 수습해 안치한 것으로 이곳 부도 대부분은 조선시대 것이지만 일부 부도는 고려말 조선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도갑사 뒤쪽으로 도갑사계곡이 길게 이어지고 등산길은 한동안 계곡 옆으로 이어진다. 온통 연초록 세상이다. 오전에 비가 와서 그렇겠지만 무성한 나뭇잎이 물을 머금고 있어 유난히 싱그럽다. 숲은 시원하고 계곡은 청량하다. 해마다 4월 말이면 느끼지만 연초록을 볼 때마다 행복하고 황홀하다. 고개를 쳐들어도 하늘을 덮고 있는 나뭇잎이 온통 연초록이다. 사이사이 동백나무에선 동백꽃 몇송이가 힘겹게 매달려 있다. 저러다 곧 목이잘리듯 툭 떨어져 바닥에 뒹굴 것이다.

길은 완만하다가 서서히 가팔라진다. 하지만 경사도가 높아지면 데크계단이 경사를 조절하고 작은 계곡을 건너야 할 때는 목조다리가 도와준다. 요즘은 전국 어딜가나 데크 천국이다. 자연 본래 모습이 사라져 싫다는 의견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데크혁명’으로 추켜세운다. 데크가 좋은 점은 많다. 험하고 힘든 코스도 편하게 해주고, 자연을 보호하고 주변 경관을 좋게하기 때문이다.

월출산 오름길. 온통 연초록이다.

 

▲미왕재 억새밭

도갑사에서 1시간(2.7㎞)쯤 걸어올라가면 미왕재(540m) 고개 억새밭에 다다른다. 비로소 월출산의 조망이 터지고 월출산 주능선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왕재 오른쪽은 넓은 바위지대이고 왼쪽 억새밭 끝은 데크 쉼터다. 둘 다 조망이 좋다. 억새밭에서 사방을 조망하고 사진을 찍으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니 희용이 “시간이 많지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채근한다. 우리 산행 속도로 가면 날이 어두워질 것같아 하는 당연한 걱정이다. 그런데도 내가 “자연 감상이 먼저”라며 시간을 지체하니 답답했을 것이다.

미왕재 억새밭

 

4월 말이라 억새보다는 철쭉이 눈에 띈다. 크기도 큰데다 입을 활짝 벌려 피어있다. 그렇게 싱그럽고 신선할 수 없다. 미왕재에서는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월출산은 이런저런 저수지를 품고 있어 강진과 영암의 젓줄 역할을 한다.  미왕재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향로봉(744m)을 맹주로 하는 길다란 암릉이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 성채처럼 우람하고 위압적이다. 구정봉은 향로봉에 가려 미왕재에선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미왕재에서 길이 갈라졌는데 지금은 무위사로 내려가는 길은 막혀있다.

 

▲미왕재에서 구정봉까지

미왕재에서 구정봉까지는 1.5㎞, 천황봉까지는 3.1㎞ 거리다. 그곳으로 가려면 향로봉 옆 고개를 지나야 한다. 나름 중요한 고개이니 이름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름이 없다. 미왕재에서 향로봉까지 길은 숲 사이를 지나는 가파른 길이다. 바위 틈과 등산길마다 반짝반짝 웃는 철쭉이 피곤함을 덜어준다. 고도가 높아지니 왼쪽 뒤 우뚝 솟아있는, 월출산 서쪽에서 맹주로 군림하는 노적봉(586m)이 모습을 드러낸다.

월출산 노적봉

 

등산길은 향로봉 암릉을 향해 걷는 길이다. 향로봉으로 다가갈수록 경사가 높아지지만 급경사는 아니다. 날카로운 향로봉 앞 암릉을 넘어서니 마침내 쉼터 고개다. 1.3㎞ 아래 미왕재에서 50분 정도 걸렸다. 쉼터를 지나면 바람재를 지나 천황봉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0.3㎞ 떨어진 왼쪽의 구정봉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10분 정도 살짝 내려갔다가 올라서니 비로소 거대하고 웅장한 천황봉이 저 멀리 앞에서 팔을 벌리고 우리를 맞는다. 실로 장엄한 그 모습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바라보기만 해도 장쾌하다.

구정봉은 왼쪽 100여 미터 지난 곳에 있다. 구정봉~향로봉~미왕재 능선을 경계로 북쪽은 영암군 영암읍이고, 남쪽은 강진군 성전면이다. 구정봉 가까운 송신중계탑 부근에 마래여래좌상 → 0.5㎞, 삼층석탑 → 0.6㎞라고 표시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다녀오는데 왕복 1시간 걸린다. 세 번째 산행인 이번에는 반드시 다녀오리라 작심했으나 이번에도 포기해야 한다. 지금의 산행 속도로는 어두워져야 내려가는데 그곳까지 다녀오면 완전히 깜깜한 밤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정봉 아래 마래여래좌상과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은 구정봉에서 북쪽으로 500m가량 떨어진, 산비탈의 자그마한 평지 뒤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암석에 조각한 높이 8~9m가량의 마애불로 국보 제144호다. 고려시대인 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나라 불상 중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바위 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자리를 만들고 마애불을 새겨놓았다. 바위 결을 따라 조각해서 약간의 불균형이 있지만, 얼굴과 팔, 다리 등 질감이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불상 오른쪽에 높이 90㎝ 높이로 새겨진 선재동자상(善財童子像)이 부처님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동자상을 내려보는 듯한 마애불의 눈길이 자애롭다.

마애불에서 100m 거리를 15분 정도 내려가면 보물 제1283호인 용암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석탑은 부근에 흩어져 있던 부재들을 수습해 1996년 복원한 것이다. 내부 감실에서 사리기와 금동 보살 좌상 등이 출토되었다. 건립과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지 않지만 각 부재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용암사지 삼층석탑은 절터의 중심에서 남동쪽으로 약 20m 떨어져 있는 암반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암반은 일명 ‘탑봉’으로 불리는데, 상면은 5m×5m 크기의 규모로 비교적 평평하고, 암반 남쪽은 절벽이며, 북쪽은 산등성이에 인접하고 있다.

마애불과 용암사지 삼층석탑(출처 문화재청)

 

▲구정봉

구정봉은 월출산에서 천황봉과 향로봉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천황봉 못지않은 규모와 조망을 자랑하므로 꼭 들러야 한다. 향로봉 옆 고개에서 구정봉까지는 15분 거리다. 구정봉에 오르려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굴을 통과해야 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구정봉(九井峰)은 20~30명이 앉을 수 있는 편평한 꼭대기에 늘 물이 담겨있는 웅덩이(井)가 9개다.

구정봉에서 노적봉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들

 

구정봉에서 저 멀리 바라보이는 천황봉과 주변 암릉까지의 능선길은 월출산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천황봉은 마치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위엄이 서려 있다. 이런 암릉 경관은 설악산이나 북한산에서나 볼 수 있는 진귀한 모습이다. 구정봉과 천황봉 사이 움푹 들어간 능선에는 소로(小路)가 능선 위에 길게 이어져있다. 구정봉은 천황봉보다 높이가 100미터나 낮은데도 천황봉한테 겨뤄보자는 기세다. 향로봉보다 33미터 낮은데도 향로봉보다 높은 느낌을 준다. 구정봉에서 향로봉을 바라보면 향로봉도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등산로가 조성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구정봉에서 내려와 천황봉을 향해 5분 정도 진행하면 구정봉 바로 아래에 넓은 항아리 형태의 베틀굴이 숨어있다. 굴의 깊이는 10여 미터쯤 되는데 여성의 은밀한 모습과 너무 흡사해 잠시후 만나게 될 남근바위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며 월출산의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안내판에는 임진왜란 때 여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서 베를 짰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되어있어 음란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고난의 시기를 언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베틀바위(왼쪽)와 남근바위

 

▲바람재와 큰바위얼굴

베틀굴에서 5분 거리의 바람재 방향으로 내려가면 천황봉으로 이어진 능선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바람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거대한 구정봉 절벽이 버티고 있다. 근엄한 장군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큰바위얼굴이다. 이마부터 턱까지 높이가 100m나 되어 큰바위얼굴의 원조인 미국 뉴햄프셔 화이트마운틴의 큰바위얼굴(높이 13m)보다 7~8배 크다. 안내문에 따르면 사람이라고 가정했을 때 얼굴 크기로 미뤄 키가 700미터로 추정된다면서 월출산이 몸인 셈이라고 알려준다.

바람재는 영암과 강진을 넘나드는 바람도 쉬어 가는 곳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겨울에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바람이 세다. 바람재에서 천황봉은 1.1㎞, 도갑사는 4.7㎞ 거리다. 남쪽으로 2.2㎞ 내려가면 금릉경포대(金陵鏡布臺)다. 금릉은 강진의 옛 이름이고, 산속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말하는데, 바다가 아름다운 강원도의 경포대(鏡浦臺)와는 한자가 다르다.

바람재에서 천황봉 쪽으로 살짝 올라간 곳에 전망데크가 있다. 그곳에 서면 서쪽으로는 구정봉 큰바위얼굴과 향로봉 쪽 바위능선, 동북쪽으론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뾰족한 암릉이 첩첩이 늘어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안내판 사진상으로는 머리, 이마, 눈, 코, 입, 턱수염 등이 영락없는 큰바위얼굴인데 실물은 큰바위얼굴과는 거리가 멀다. 왜 그럴까.

바람재 데크에서 바라본 향로봉(왼쪽)과 구정봉 큰바위얼굴. 아래가 바람재이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경포대다.

 

큰바위얼굴 잘 찍히는 계절과 시간대 따로 있어

큰바위얼굴은 2009년 1월 영암에서 활동 중인 사진작가 박철씨의 카메라에 처음으로 잡혀 세상에 알려졌다. 그후 많은 산꾼들이 큰바위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박철씨가 촬영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블로그에서 아주 드물게 큰바위얼굴 사진이 보여 확인해보면 바람재 전망데크에서 찍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대부분의 사진은 큰바위얼굴이 아니다.

이유는 큰바위얼굴이 잘 찍히는 계절과 시간대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박철씨가 큰바위얼굴을 촬영한 일자와 시간은 한겨울인 2019년 1월 31일 오후 4~5시 쯤이었다. 큰바위얼굴은 태양의 이동에 따라 얼굴 윤곽이 뚜렷해지거나 그늘로 인해 윤곽이 사라지기도 한다. 내가 두 번이나 바람재 부근에서 큰바위얼굴을 바라봤지만 사진 속 그 모습이 아닌 것은 이 때문이다. 언제쯤 내게 모습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가 크지만 그만큼 월출산을 자주 올라야 하므로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월출산 큰바위얼굴(출처 박철 사진작가)

 

바람재에서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은 1㎞ 정도로 짧지만 고도를 200m나 높여야 하는 제법 난코스다. 초반은 순하고 후반은 가파르다. 구간 안에 남근바위, 돼지바위, 사랑바위 등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이 모여 있어 마치 수석전시장 같다. 합천 가야산의 만물상처럼 바위마다 각각의 이름을 붙여도 될 정도로 생김새가 다양하다. 남근바위는 전국의 산마다 한 두 개씩은 있지만 월출산의 남근바위는 그중 최고로 꼽는 거대한 수직 돌기둥이다.

능선길 어느 지점에선가 데크를 따라 걷다보면 돼지바위 안내판이 서있다. 그런데 실제로 보이는 돼지바위 모습이 안내판 사진 속 그럴듯한 돼지바위와 다르다. 돼지 머리와 많이 흡사한 바위를 보려면 안내판에서 2~3분 정도 올라간 곳의 거대 바위 아래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현장에서는 그곳이 어디인지 안내하지 않으므로 알아서 신경을 쓰고 발품을 팔아야 한다.

바람재에서 천황봉 오름길

 

▲천황봉

천황봉 정상에 오르니 오후 5시 30분이다. 도갑사에서 4시간 30분이나 걸렸다. 쉬엄쉬엄 걷긴 했어도 오래 걸렸다. 월출산에서 홀로 우뚝한 천황봉에 서면 마치 등대 꼭대기에 서있는 느낌이 든다. 수십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암반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튼 암릉을 감상할 수 있지만 오늘은 운무에 가려 시야가 막혀있다. 그래도 최근 2년 간 3번이나 올라와 상상은 할 수 있다. 기묘하고 거대한 암릉이 사방에서 솟구치고 굽이치며 산 아래로 내달릴 것이다. 북쪽으로는 산성대 능선이 영암읍을 향해 줄달음칠 것이고 동쪽으로는 사자봉과 매봉, 시루봉이 포효할 것이며 서쪽을 바라보면 구정봉과 향로봉이 월출산의 제왕을 향해 고개를 숙일 것이다.

천황봉 정상

 

■하산로 : 천황봉 → 구름다리 → 천황야영장

 

▲구름다리 지나 천황탐방지원센터까지

천황봉에서 산성대로 내려가든 천황사로 내려가든 바로 아래 통천문은 피해갈 수 없다. 산성대와 구름다리는 천황봉 300미터 아래 통천문삼거리에서 갈라지고, 구름다리와 경포대는 통천문삼거리에서 200미터 아래 경포대능선삼거리에서 또다시 갈라진다. 물론 구름다리는 통천문삼거리에서 산성대 방향으로 1㎞ 정도 내려가다가 광암터에서 바람폭포로 내려가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통천문삼거리~경포대능선삼거리를 거쳐 구름다리로 간다. 경포대능선삼거리와 구름다리 중간에 우뚝 선 사자봉을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이 장군봉을 월출산 최고 볼거리로 꼽는 사람도 있다. 경포대능선삼거리에서 구름다리까지는 1.2㎞이지만 왼쪽 사자봉과 거대 암봉을 옆에 끼고 오르내리는 길고 가파른 구간이어서 결코 쉽지않다. 매봉을 지나 급사면을 따라 커다란 바위 정상에 오르니 협곡 위를 가로지르는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가 내려다 보인다.

구름다리에 발을 디딘 시간은 해가 어느덧 넘어간 오후 7시 20분이다. 구름다리는 계곡 위 120m 허공에 높여있다. 폭은 1m, 길이는 52m이고 해발고도는 510m다. 아찔한 고도감을 경험하며 허공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오르막 없는 하산길이다. 내 경험으로 구름다리는 경북 봉화 청량산 하늘다리와 함께 국내 구름다리와 쌍벽이다. 해발고도는 510미터인 월출산 구름다리보다 800미터인 청량산 하늘다리가 높지만 지상높이는 월출산 구름다리(120m)가 청량산(70미터)도 50미터나 높다.

월출산 구름다리

 

오후 7시 45분 우려했던 어둠이 깔렸다. 헤드랜턴 한 개와 휴대폰 불빛으로 칠흑같은 어둠 속을 지나야 하는데 두 여성이 걱정이다. 구름다리 아래 구간은 온통 거친 바위와 돌길이어서 무릎에 충격이 크고 넘어져 다칠 수도 있다. 서로 의지한 채 50분 동안 느릿느릿 엉금엉금 천황사를 거쳐 천황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5분이다. 도갑사에서 출발할 때 7시쯤 내려오겠다고 약속했지만 1시간 30분이나 더 늦게 내려왔는데도 아무런 불평없이 기다려준 택시기사 너무 고마웠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길을 잃을까봐 천황탐방지원센터에서 한참 올라간 곳에 있는 천황사 부근까지 랜턴을 갖고 올라와 우리를 기다렸다. 이 친절한 택시기사 전화번호는 010-3608-1733이다. 월출산 주변 모든 지역을 커버한다. 택시기사는 우리를 태우고 도갑사 주차장으로 갈 때도 여러 유용한 정보를 방출한다.

천황봉에서 구름다리 방향 하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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