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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24)-상편] 박정희와 세 여인… 부친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이뤄진 첫 결혼(김호남)은 박정희의 요구로 14년만에 파국 맞고, 동거했던 이화여대생(이현란)은 집을 나가 결별

↑ 왼쪽부터 8개월간(햇수로는 3년) 동거했던 이현란, 박재희(박정희 누나), 박정희. 두 여성이 안고있는 아이들은 모두 박재희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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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육영수 여사는 함께 살았던 세 번째 여자였고 육 여사에게 박 대통령은 생애 첫 남자였다. 박정희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19살에 결혼한 탓에 첫아내 김호남과는 데면데면 살다가 딸 하나만 낳고 헤어졌다. 결혼 기간은 14년이 넘었지만 함께 산 기간은 1년이 채 안되었다. 그 사이 이화여대생 이현란을 만나 1948년부터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현란의 가출로 결혼은 성사되지 않고 2년 반 만에 헤어졌다. 그후 6·25전쟁이 터져 피란지 부산에서 육영수를 만났으니 김일성이 중매 역할을 한 셈이다.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은 충북 옥천의 부잣집 딸과 경북 선산 출신의 가난뱅이 이혼남 군인의 결합이었다. 두 사람은 육 여사가 1974년 8월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할 때까지 23년 8개월을 함께 살았다.

 

■박정희 생애

▲출생과 보통학교 시절

박정희(1917~1979)가 태어난 곳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금오산 자락 끝의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박정희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 가족 구성원은 부모와 5남2녀였다. 어머니가 정희를 임신했을 때 위로 6형제 중 3형제(동희, 무희, 귀희)는 결혼한 상태였다. 정희를 44살에 임신한 어머니는 장녀 귀희와 함께 아기를 밴 것이 창피했다. 집안도 가난해 식구가 하나 더 느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어머니는 정희를 지우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다. 간장을 한 사발 마시거나 밀기울(밀에서 가루를 빼고 남은 찌꺼기)을 끓여서 마셨다가 까무라치기도 했다. 섬돌이나 장작더미 위에서 뛰어내려 보기도 하고, 스스로 방아에 깔려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뱃속 아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자 “아이가 태어나면 솜이불에 싸서 아궁이에 던져버리겠다”고 독한 생각을 하고는 아기 지우는 일을 포기했다. 하지만 막상 정희가 태어나자 그동안 생명을 떼려고 온갖 수를 썼던 게 미안해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흠뻑 쏟아 부었다.

박정희는 9살이던 1926년 4월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시절, 박정희는 체구에 비해 담력이 세고 암기력이 뛰어났다. 덕분에 3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급장(반장)을 했다. 동급생들보다 키가 작았는데도 급장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있으면 체구가 크든 나이가 많든 뺨을 후려 갈겼다. 급우들 가운데 박정희한테 맞아 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다. 자신의 선천적 조건인 가난과 작은 체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든 타고난 기질이 그러하든 박정희는 이렇게 급우들을 무섭게 대했다. 박정희는 성인이 되어도 아버지-형제들과 달리 키가 작았다. 훗날 자신만 작은 이유에 대해 “상모리에서 구미읍의 보통학교 다닐 때 매일 왕복 40리를 걷고 등하교길에 얼어붙은 도시락을 먹고 자주 체하는 바람에 키가 작았다”고 말하곤 했다. 태아 때 어머니에게 맹렬한 공격을 쉴 사이 없이 받았던 것도 작용했을 수 있다.

박정희 생가

 

▲셋째 형 박상희

형제 중 박정희에게 영향을 크게 미친 인물은 11살 많은 셋째 형 박상희였다. 박상희는 형제 중 유일하게 보통학교를 졸업한 데다 인물이 훤칠하고 가슴이 뜨거웠던 인물이었다. 박상희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지방 주재기자로 반일활동을 하면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다. 해방 직후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이끌면서 좌익활동을 주도했다. 동생 정희와 해방정국의 시국을 논할 때면 여운형 노선을 옹호하고 이승만을 비난했다. 반면 박정희는 “이승만 박사도 해외에서 평생 독립운동을 해오신 훌륭한 분”이라며 정색했다. 박상희는 1946년 10월 대구폭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다가 진압 경찰관들의 총에 맞고 세상을 떠났다.

박상희는 1929년 조귀분과 결혼해 훗날 정치인 김종필의 아내가 될 박영옥을 낳았다. 박상희 부부의 오작교 역할을 한 사람은 황태성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이면서 공산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황태성은 해방 후 남로당 경북도당의 조직부장으로 대구폭동을 주도했다가 폭동 실패 후 월북했다. 차관급인 무역부부상으로 활동하다가 5·16 직후인 1961년 8월 쿠데타의 주역이자 친구동생인 박정희를 만나 의중을 떠보기 위해 김일성의 밀사로 잠입했으나 박정희가 만남을 거부해 1963년 사형되었다.

박상희

 

▲대구사범과 초등 교사 시절

박정희는 1932년 4월, 5년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좋지 않았다. 4학년과 5학년 성적은 73명 중 73등, 70명 중 69등이었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군사와 체육과목에서는 뛰어났다.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시도 쓰고 서예에도 능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노래도 작사 작곡했다. 학창 시절 주로 읽었던 책은 온갖 종류의 나폴레옹 전기였다. 학년별 담임들의 품행평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었다. ‘음울하고 빈곤’ ‘활발하지 않고 다소 불성실’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 등이다.

박정희는 1937년 4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그해 4월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대구사범 시절 동급생들에겐 ‘입을 꽉 다물고 골똘한 생각에 빠진 침울한’ 학생이었지만 문경보통학교 학생들에겐 ‘잘 웃기고 잘 놀아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문제는 술이었다. 사범학교의 한 동창은 박정희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했다. 박정희는 평소엔 말이 적었지만 술만 들어가면 말이 많고 오버했다.

 

▲김호남과 결혼

박정희는 대구사범 5학년이던 1936년 4월 1일 고향 선산에서 김호남과 결혼했다. 박정희는 19살, 김호남은 16살이었다. 신부는 무던한 여인이었으나 결혼 전 박정희는 결혼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혼인날짜를 받아왔다. 박정희는 결혼식 날 도망칠 궁리까지 했으나 결국에는 늙고 병든 아버지를 생각해 결혼식을 올리고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결혼 후 김호남은 관습에 따라 1년간 친정집에 머물렀다. 1937년 4월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한 후에는 상모리의 시댁으로 옮겨 살았다. 박정희는 이따금씩 처가나 친가에 내려가도 친구 집을 겉돌다 대구나 문경으로 올라갔다.

박정희 첫 아내 김호남의 60대 모습

 

1937년 11월 김호남이 딸 박재옥을 낳았으나 박정희는 여전히 아내를 냉대했다. 김호남은 박정희가 집에 없는 동안 집안의 막내며느리로 궂은 일을 도맡아 했다. 시어머니는 이런 막내 며느리가 안쓰러워 연민의 정을 쏟았다. 박정희는 중국에서 해방을 맞은 후 해방 이듬해 고향집으로 갔기 때문에 김호남과 4개월 가까이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틈만 나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밖으로 돌다가 1946년 9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올라갔다.

또다시 홀로남은 김호남은 딸 박재옥이 11살이던 1948년 딸을 데리고 시댁을 나와 대구에서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박재옥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선산의 외갓집을 거쳐 사촌오빠 박재석(박정희 둘째형 박무희 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비로소 박재옥은 안정을 찾고 국민학교 5학년부터 학교를 제대로 다녔다. 박재옥이 아버지의 재혼 소식을 들은 것은 1952년 박근혜가 태어난 직후였다. 박재옥은 21살이던 1958년 10월 박정희의 전속부관 한병기 대위와 결혼했다.

1950년대 후반 박정희와 딸 박재옥

 

▲군(軍) 입문

박정희는 1940년 3월 문경보통학교 교사를 사직하고 그해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본떠 설립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제2기생은 만주계와 일본계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조선인 11명은 만주계로 분류되었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육군군관학교 예과를 만주-조선계 중 수석 졸업하고 그해 10월 일본 육사 유학생대(일본 육사 57기와 동기)에 편입했다. 1944년 4월 일본 육사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해 만주군 보병8단에 배속되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일본·만주군 출신 장병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제3지대 주평진대대’에 편성되어 2중대장을 맡았다. 1946년 5월 귀국 후에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보다가 9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육사 전신)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이로써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에 이어 세 번째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만주군, 일본군에 이어 세 번째 군복을 입게 되었다. 박정희는 1946년 12월 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화여대생 이현란과 동거

박정희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1947년 가을, 전에 함께 근무했던 춘천 8연대 경리장교의 춘천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다. 신부는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루시여고를 나와 교사생활을 잠깐 하다가 월남한 여성이었다. 신부는 함북 청진에서 태어난 여고 동창 이현란을 들러리로 세웠다. 이현란은 당시 이화여대 아동교육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고향에서 단신으로 월남한 탓에 경제적으로 쪼들려 가정교사를 하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었다. 날씬한 몸매에 성격도 쾌활한 이현란을 보는 순간 박정희는 연애감정을 느꼈다.

결혼 당일 저녁 이현란도 참석한 피로연에서, 박정희는 조선경비대사관학교 동기생에게 이현란을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이현란은 나중에 명동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키가 작아 볼품은 없었지만 박력과 기품은 있어보였다. 박정희는 일요일만 되면 기숙사로 이현란을 찾아갔다. 이현란은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자신에게 박정희가 잘해주고 학비도 보태주어 조금씩 마음이 끌렸고 1948년 약혼까지 하게 되었다.

박정희 대위는 용산의 관사에서 이현란과 동거했다. 이현란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여름방학 때는 대학 기숙사를 비워주어야 하는데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박정희의 관사에 들어간 게 동거의 시작이었다. 8살 아래 이현란에 대한 박정희의 관심은 집요했다. 이현란이 거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떻게든 찾아내 관사로 데려왔다. 박정희는 이현란에게 본처와 10살이 넘은 딸이 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그즈음 본처 김호남과 이혼을 하려고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속이 탔다.

앞줄 왼쪽부터 동거녀 이현란, 박정희 누나 박재희, 박정희, 뒷줄 가운데는 박정희 조카 박재석, 오른쪽은 불명. 사진 속 세 아이들은 모두 박재희의 자녀들이다.

 

▲ 남로당 주요 군사책임자로 밝혀져 피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14연대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박정희는 좌익 주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토벌군사령부의 작전장교로 광주에 급파되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도 공산주의 정당인 남로당의 주요 군사책임자였다. 그의 남로당 입당은 2년 전 대구 폭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6년 10월 대구 폭동 때 박정희는 평소 믿고 따르던 공산주의자 형 박상희의 죽음에 분노했다. 그때 남로당 간부들이 “남로당에 가입해 형의 원수를 갚으라”고 부추겼다. 이후 남로당에 가입한 박정희는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남로당 조직도에서 상층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반골 기질과 형의 죽음이 작용한 입당이다 보니 공산주의에 중독된 골수분자는 아니었다.

여수14연대 반란을 계기로 숙군(肅軍) 수사가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과장 요원으로 발령받아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와 있던 1948년 11월 11일 숙군 수사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숙군 책임자는 백선엽 국방부 정보국장이었다. 박정희는 조사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이름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덕분에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숙군 수사팀은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도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박정희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운명에 처해 있던 1949년 1월 초 어느날 백선엽을 만나 “살려 달라”고 구명을 요청했다. 백선엽은 박정희를 도와주었다. 박정희가 군대에서 남로당을 조직하고 포섭 활동을 한 정황이 없고,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49년 1월 말 풀려났지만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을 선고받았다. 1949년 4월에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되고 형 집행을 면죄받는 파격적인 특례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백선엽의 도움 덕에 비공식 문관 자격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받는 특전까지 누렸다.

1955년 백선엽 1야전군 사령관(왼쪽 첫째)이 신임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에서 셋째) 등의 신고식을 받고 격려하는 모습이다.

 

▲이현란과 이별

이현란은 박정희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내려왔는데 동거 중인 남자가 빨갱이라는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수사담당자 김창룡이 찾아와 박정희의 메모를 건네주었다.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것 하나만 믿어주라. 체포 사실을 미리 알았지만 달아나지 않은 것은 현란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화는 풀리지 않았다. 박정희가 결혼하고 11살난 딸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도저히 용서가 안되었다. 그렇다고 박정희를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박정희가 자신을 찾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평소 박정희는 어디든 갈 때마다 이현란이 달아날까봐 데리고 갔다. 화장실에 오래 있어도 들여다봤다. 이현란은 2년 반동안 7~8번 가출을 시도했다. 박정희에게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애원도 했다. 그럴때면 박정희도 땅을 치고 울었다.

그렇게 참으며 살다가 언젠가부터 박정희에 대해 절망하기 시작했다. 싸움도 빈번해졌다. 싸움은 박정희가 손찌검을 하는 정도로 발전했다. 결국 이현란은 메모를 남겨둔 채 1950년 2월 6일 밤 관사를 나와 박정희와 영원히 헤어졌다. 메모 내용은 “그동안 고마왔어요.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나를 찾지 마세요. 찾으러 오면 투신자살하겠어요”라는 요지였다. 그동안 박정희와 살기는 햇수로 3년이지만 같이 산 것은 8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현란의 가출에 박정희는 안절부절했다.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그 시절 박정희가 술을 마시면 이현란을 부르며 울었다고 기억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현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박정희가 자신에 대해 교만하다느니 못됐다느니 험담한다는 소문이 들린다면서 “비신사적으로 행동하지말라”고 경고했다. 이현란과 박정희는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도 있었다. 헤어진지 1년 반이 지난 1951년 대구에서였다. 이현란이 재혼해 대구에서 살고 있던 어느날 이현란이 길을 걷고 있는데 지프에서 빵빵 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다보니 박정희가 내리려고 해 마구 뛰어 도망갔다. 마침 트럭이 지나가서 만나지 못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대통령이 된 뒤 박정희는 이현란의 남동생이 모 신문사 정치부 기자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생에게 누나의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누나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만 이현란은 한 번 접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재혼해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을 때였다. 이현란은 1992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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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전10권)에서 주요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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