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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과 부부 ⑭]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루스벨트 외도 후 부부관계는 사실상 끝났으나 정치적으로는 협력관계 유지

↑ 1932년 부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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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1905년 결혼한 두 사람은 먼 친척 관계

1933년 3월 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4개월 전인 1932년 11월 8일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와 대결한 대통령선거에서 57.4%의 지지율을 얻어 48개 주 가운데 42개 주에서 승리하고, 선거인단 수에서 472 대 59로 후버를 압도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1933.3.4)

 

루스벨트는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 사립고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했다. 1904년 컬럼비아 로스쿨에 입학하고 1907년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0년 정치에 입문했다. 루스벨트는 23살 때인 1905년 3월 17일 어머니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먼 친척인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와 결혼했다. 엘리너의 삼촌이자 현직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주례를 섰다. 프랭클린 역시 시어도어 대통령의 먼 친척 동생(12촌)이었다.

젊은 시절의 루스벨트(18살)와 엘리너(14살)

 

엘리너 루스벨트는 뉴욕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수줍음을 잘 타고 뻐드렁니 얼굴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자주 경멸 섞인 놀림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더욱이 8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0살 때 알코올 중독자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우울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15살 때인 1899년 영국의 여자기숙학교에 입학, 단호하게 말하고 독립적으로 사는 여성의 생활 방식을 터득했다. 엘리너는 훗날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1902년 뉴욕으로 돌아왔을 때 18살의 엘리너는 3년 전 미국을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외형적으로는 키가 크고 세련된 모습이었으며 성격적으로는 자신감이 넘치고 활동적이었다. 이런 그에게 눈길을 준 뭇 남성 중에는 먼 친척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있었고 두 사람은 1905년 결혼했다.

루스벨트 부부와 다섯 아이들. 오른쪽에서 오른쪽 두번째 여성은 보모로 보인다.

 

엘리너가 루스벨트의 외도를 알게된 1918년부터 두 사람은 껍데기만 부부

두 사람은 성격이 달랐다. 루스벨트가 우회적이고 느긋한 반면 엘리너는 직설적이고 완고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서는 결정적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1918년 루스벨트가 자신의 비서 루시 머서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엘리너가 알게 되면서 부부 사이에 균열과 불화가 생겼다. 남편에 대한 사랑은 싸늘하게 식고 고통은 심해졌다. 그러나 다섯 자녀들과 프랭클린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이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완벽한 아내나 며느리가 되는 것은 포기하고 정신적 독립을 결심했다.

루시 머서

 

이때부터 두 사람은 껍데기만 부부였다. 의례적인 자리 외에는 별거했고 공식 행사가 아니면 식사도 따로 했다. 사랑과 결혼이라는 비현실적인 악몽에서 깨어나는 순간 엘리너에게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이후 엘리너는 홀로서기에 힘쓰고 해방의 날갯짓을 위해 비상을 준비했다.

루스벨트는 28살이던 1910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해군 차관보(1913~1919)와 부통령 후보(1920)를 역임하는 등 초기 정치 역정은 순탄했다. 미래를 꿈꾸던 인생 가도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찾아온 것은 39살 때이던 1921년 8월이었다. 해안가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던 중 감기에 걸린 것이 척수성 소아마비로 발전해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루스벨트에게는 좌절과 낙담의 순간이었으나 엘리너에게는 삶의 전환점이었다. 엘리너는 밤낮으로 남편을 간호했다. 그렇다고 남편의 외도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다. 남편과의 정치적 동반자를 꿈꾸던 엘리너는 정치를 포기하려는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며 정계 복귀를 독려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정치적 목표를 향한 협력관계였다.

루스벨트는 기적적인 투병 끝에 3년 만에 일어나 1924년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1928년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어 재기에 성공했다. 그 무렵 루스벨트 옆에는 마거리트 르핸드라는 새로운 여비서가 자리를 지켰다. 여비서는 루스벨트가 소아마비를 치료하던 초반을 제외하고 1941년까지 20년 이상 비서 역할을 했다. 르핸드는 엘리너가 없을 때는 비서, 친구, 백악관의 안주인 역할을 했다.

마거리트 루핸드

 

엘리너 역시 르핸드가 루스벨트와 어떤 관계인지를 대충 알고 있었다. 다만 르핸드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엘리너가 르핸드를 비서로 취급해 심각한 불화는 없었다. 루스벨트가 르핸드와 어디까지 갔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과 가족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린다.

 

루스벨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대공황 탈출

1933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에게 주어진 시대적 소명은 대공황 탈출이었다. 당시 미국은 3년 5개월 전에 시작된 역사상 최악의 대공황을 겪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취임식 광장을 가득 메운 군중을 향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라며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곧 대공황 탈출을 위한 ‘100일 작전’에 돌입했다. 작전은 ‘뉴딜’로 불렸다. 1932년 7월 2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미국인을 위한 새로운 정책(New Deal)을 맹세한다”라고 언급한 것에 착안한 명칭이었다.

루스벨트는 3월 6일부터 4일 동안 모든 은행에 휴무령을 내리는 것으로 뉴딜에 시동을 걸었다. 뒤이어 은행과 외환에 대한 광범위한 규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긴급은행구호법을 3월 9일 연방의회에 제출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3월 12일 저녁에는 그 유명한 ‘노변 정담’ 첫 번째 편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공황을 극복할 수 있게 뉴딜 정책에 힘을 실어 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을 침대 밑에 넣어두는 것보다 은행에 넣어두는 편이 안전하다”고 호소했다. 이튿날 사람들은 은행으로 몰려들었고 미국 경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재임 12년 동안 ‘노변 정담’은 39차례 방송되었다.

이후 6월 16일까지 100일 동안 연방의회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아 민간자원보호단법(3.21), 연방긴급구호법(5.12), 테네시 개발공사 설립법(5.18), 글래스-스티걸법(6.16), 국가산업부흥법(6.16) 등 뉴딜 정책의 뼈대가 되는 15개의 혁명적인 법안이 일사천리로 의회를 통과했다.

‘노변정담’ 방송을 하고 있는 루스벨트(1934.9.30)

 

엘리너는 백악관 생활 첫해에만 6,500㎞를 돌아다니며 남편을 보좌했다. 뉴딜 정책의 진척 상황을 남편에게 보고하고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대신해 의회에 나가 정부의 입장을 적극 대변했다. 때로는 정부와 배상 문제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던 미국 참전 용사들을 직접 찾아가 함께 식사하고 설득했다. 전 정권이 참전 용사 시위를 무력 진압한 것과 대비되는 활동이었다. 당시 “(전임자인) 후버 대통령은 군대를 보냈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내를 보냈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국민의 가정 속으로 파고들기 위해 루스벨트가 ‘노변정담’을 활용한 것처럼 엘리너도 ‘나의 나날(My Day)’ 칼럼을 1935년12월 31일부터 몇몇 신문에 연재했다. 칼럼에서 엘리너는 때로는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고 때로는 반대 의사를 표명하며 정치적으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칼럼은 1962년 9월 26일까지 27년 동안 계속되었다.

 

2차대전 발발로 대공황에서 벗어나

뉴딜의 많은 법안이 제정되어 경제 위기 극복에 적용되었지만 1935년에 이르러 뉴딜 정책이 한계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경기는 상당히 회복되었으나 국민총생산은 아직 1929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고 실업자도 여전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1935년 시작된 대법원의 반발이었다. 보수 세력이 우세한 대법원은 뉴딜의 법들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하나하나 무효화했다.

사법부의 반대에 부닥치자, 루스벨트와 뉴딜주의자들은 뉴딜의 국가 통제와 국가 계획의 구상을 포기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제2차 뉴딜’이 시작된 것이다. 국민노동관계법에 이어 사회복지의 초석이 된 ‘사회보장법’(1935)과 ‘공정노동기준법’(1938)을 제정했다. 사회보장법에 따라 노인수당, 실업보상, 노동장애자보험, 미망인 수당 등 복지 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위헌 판결은 멈추지 않았다. 1936년 말까지 대법원은 뉴딜 정책과 관련된 9개의 재판에서 7개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루스벨트는 1936년 11월 재선된 후 대법원을 무력화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 결과 뉴딜 정책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대법관이 다수를 차지했다.

‘사회보장법’에 서명하고 있는 루스벨트(1935.8.14)

 

1936년 다소 회복되는 듯하던 경기는 1937년 중반부터 다시 불경기로 돌아섰다. 1938년에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져 실업자가 전체 노동력의 5분의 1인 1,000만 명에 달했다. 루스벨트에게 비난이 쏟아졌으나 그는 천운을 타고난 듯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해결책을 선물받았다. 1939년 9월 발발한 2차대전은 미국에 전쟁 특수의 단비를 내렸다. 미국의 전쟁 개입으로 군수산업이 급성장하면서 1,000만 명의 실업자가 방위산업 분야에 투입되었다. 미국은 대공황에서 벗어나고 세계 최대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뉴딜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는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서고 국민의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차대전 당시 미국 군수공장

 

1945년 루스벨트의 죽음은 엘리너 인생의 또 다른 시작

엘리너는 뉴딜 정책이 한창일 때 아동노동을 없애고 최저임금제와 노동자 보호권 도입을 주장하는 여성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공적인 활동에 나선 여성들은 모두 피부를 코뿔소의 가죽처럼 튼튼하게 단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파하고 백인 여성 보수 단체의 반대로 음악회가 무산된 흑인 오페라 가수 메리언 앤더슨이 1939년 4월 9일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 야외에서 음악회를 열도록 도와주었다.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엘리너의 이런 활동이 공산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믿고 내밀한 조사를 벌였다. 그렇게 축적된 엘리너에 대한 FBI 파일이 449쪽이나 되었다.

엘리너는 AP통신 여기자 로레나 히콕과 특히 가까웠다. 자신의 어려웠던 어린 시절과 실망스러운 결혼생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남편에 대한 불평과 불만도 모두 털어놓았다. 히콕의 조언을 받아들여 여성 기자만 출입할 수 있는 기자회견을 매주 한 차례씩 연 것은 신문사마다 적어도 한 명의 여기자를 뽑도록 한 조치였다. 엘리너와 히콕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본 지인들은 두 사람이 우정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엘리너의 주변에는 남자도 있었다. 운전사 겸 경호원은 물론 엘리너의 전기를 쓴 사람도 엘리너가 사춘기적 열정으로 좋아했던 남자들이었다.

루스벨트는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미국 역사상 초유의 4선을 기록했으나 재임 중이던 1945년 4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루스벨트의 죽음은 엘리너 인생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남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유엔 미국 대표로 활약하고 유엔 인권위 의장으로 소련을 설득해 1948년 12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세계인권선언을 발의했다. 이후에도 ‘세계의 퍼스트레이디’는 쉬지 않고 세계를 돌아다녔고, 어디서나 환영받는 비공식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루스벨트 장례식

 

엘리너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미국 여성들의 화신

1962년 11월 7일 엘리너가 숨을 거두었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버지니아 무어의 시 ‘프시케’가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믿었던 영혼은 기만당하고 / 잠시 아무 생각도 않는다 / 모든 생각들이 역겹다…’로 시작하는 시 위에는 ‘191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918년은 엘리너가 남편의 외도를 알았던 해였다. 엘리너는 죽는 날까지 강인하고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미국 여성들의 화신이었다. 미 여성들에게 자의식을 부여하고 흑인의 인권을 신장시키고 외교에 큰 업적을 쌓은 미국 최초의 ‘현실참여형 퍼스트레이디’였다.

유엔에서 연설하는 엘리너(1947.7)

 

훗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은 그녀를 가리켜 “나의 이상적인 모델”이라고 하고 제럴드 포드 전 미 대통령의 부인 베티 포드는 “귀감으로 삼았다”고 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8년 넬슨 만델라, 마하트마 간디,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과 함께 그를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20명’으로 선정하고 미국 시에나대는 1982년부터 2014년까지 5차례 역사학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여 ‘역사상 최고의 퍼스트레이디’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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