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김민기 작사·작곡 ‘아침이슬’ 발표 50주년… 후배 가수들이 헌정하는 앨범·공연·방송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된다는데

↑ 김민기

 

by 김지지

 

김민기 작사·작곡 노래 ‘아침이슬’이 발표된 게 1971년.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것을 기념해 장르·세대를 망라한 후배 가수들이 김민기에게 헌정하는 앨범·공연·방송 프로젝트가 동시 진행된다. 6월 첫 주부터 김민기 헌정 앨범에 실리는 총 18곡의 음원이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7월중 CD 발매, 8월 이후 LP도 출시된다.

1971년 발매된 김민기 1집에는 ‘아침이슬’과 ‘그날’, ‘친구’ 등이 실렸다. 특히 ‘아침이슬’은 대중가요를 넘어 1970~198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실은 저항 가요로 널리 퍼졌다.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으로 선정되는 등 시련을 겪었지만, 1980년대 전국 대학가 시위와 1987년 6월 항쟁 등 여러 현장에서 대중들에 의해 불리며 저항의 상징곡으로 자리매김했다. 앨범 발표와 더불어 KBS 1TV ‘열린음악회’ 방송과 헌정 공연도 이어진다. 한 사람의 음악으로만 채워지는 김민기 특집편 ‘열린음악회’는 6월 20일 방송된다. 헌정 공연도 9월부터 펼쳐질 예정이다.

김민기

 

‘아침이슬’,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실은 저항 가요로 널리 불려

김민기는 20대이던 1970년대를 모질게 살았다. 구속되거나 형을 살지는 않았지만 수사기관을 들락거리며 때로는 고문도 받았다. 그러던 그가 모든 음악활동을 접고 1970년대 말부터 공장 노동자로, 농사꾼으로, 막장 탄부로 세상 낮은 곳에서 생활인으로 살고 있을 때 그의 노래는 1980년대 대학가 시위의 필수 애창곡으로 불렸다.

경기도 전곡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1983년 겨울, 집 전체가 불에 타 사라지는데도 김민기는 불을 끌 생각은 하지 않고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농사를 포기하고 대학로 좁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연극과 뮤지컬에 매달렸다. 부활의 몸짓이었다.

김민기는 1951년 전북 익산에서 10남매 중 유복자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의사이던 부친은 6·25 전쟁 중 인민군에게 피살되었다. 원산이 고향인 어머니는 연희전문 시절, 조선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며 들고일어났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산파) 자격증을 따서 돌아와, 아이 받는 일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김민기는 12살이던 1963년 서울로 올라와 경기중학을 거쳐 1966년 경기고에 입학했다.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은 그의 청소년기의 모든 것이었다.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미술에 빠져 살았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음대 다닌 셋째 누나한테서 기타를 선물 받고 독학으로 음악을 알아갔다.

김민기는 고3이던 1968년 보이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강원도 북평(지금은 동해)으로 야영을 갔다. 어느날 후배 하나가 죽었고 김민기는 이 사실을 후배 부모한테 알리기 위해 기차를 탔다. 그때 기차 안에서 작사 작곡한 노래가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로 시작하는 불후의 명곡 ‘친구’다.

20대 초반의 김민기

 

김민기는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으나 정형화된 미술이 따분했다. 결국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하자 미대 동기이자 경기고 동창인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 듀엣 ‘도비두’를 결성했다. 노래 무대는 주로 명동의 YWCA ‘청개구리홀’이었다. 노래 잘하는 재수생 양희은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청개구리홀이었다.

1971년 서강대생이 된 양희은이 불쑥 찾아와 김민기가 작곡·작사한 ‘아침이슬’을 음반으로 취입하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을 때 김민기는 기꺼이 기타 반주까지 해주었다. ‘아침이슬’은 1971년 9월 발매된 양희은의 제1집에 수록되었다.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 음반

 

김민기도 한 달 뒤인 1971년 10월 ‘아침이슬’을 비롯해 ‘친구’ ‘아하 누가 그렇게’ ‘저 부는 바람’ ‘꽃피우는 아이’ ‘그날’ 등을 수록한 1집 앨범을 냈다. 그러나 ‘아침이슬’이 1970~198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실은 저항 가요로 널리 불릴 것이라고 예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김민기가 부른 ‘아침이슬’ 음반

 

‘아침이슬’ 음반이 압수․폐기되자 국악 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여

1972년 봄, 김민기는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꽃 피우는 아이’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세 곡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이튿날 새벽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에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 있던 1집 음반은 모두 압수·폐기되었다. 1970년대 내내 수도 없이 되풀이될 ‘연행’ 행로의 시작이었다.

김민기는 노래 부르는 게 죄가 되는 세상에서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았다. 야학을 하고 가톨릭 문화운동과 국악 대중운동, 마당극 등에 관여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 공연에 참가해 주제가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했다. 1974년에는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썼다.

그 무렵 어디를 가나 경찰의 감시를 받는 게 싫어 1974년 10월 카투사 사병으로 입대했다.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1975년 어느 날, 중앙정보부 요원이 찾아와 “노래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동요같은 ‘식구생각’이다. 결국 김민기는 밉보여 군대 영창을 거쳐 최전방으로 배치되었다.

김민기는 1975년 12월 ‘아침이슬’이 송창식의 ‘왜불러’ ‘고래 사냥’ 등과 함께 구체적 사유도 명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 금지곡으로 묶인 사실을 군에서 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김민기의 노래 중 ‘아침이슬’ 한 곡만 방송 금지곡으로 묶였는데도 김민기의 다른 노래들까지 방송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김민기는 군 복무 중에도 노래를 만들었다. 제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1976년 겨울에는 부대 선임하사의 요청으로 ‘늙은 군인의 노래’를 작사·작곡했다.

젊었을 때 김민기

 

1970년대 자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 활동에 한번도 이름 올리지 않아

김민기는 1977년 5월 제대하자마자 경기도 부평의 봉제공장으로 갔다. 그때 함께 생활하던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작곡한 노래가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로 시작하는 ‘상록수’다. 노래극 ‘공장의 불빛’ 앨범 역시 그때의 공장 경험을 토대로 1978년 만들었다. 이 앨범은, 사전 검열을 거부하고 처음부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독자적으로 배급했다는 점과 포크 스타일을 비롯해 구전가요, 찬송가, 국악, 블루스, 로큰롤 등 다양한 형식을 한데 실험한 혁신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공장의 불빛’으로 김민기는 또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김민기가 군대 시절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천리길’ ‘밤뱃놀이’ 등은 1978년 양희은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김민기를 작곡자로 올렸다가는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할 것이 뻔해 작곡자는 ‘김아영’이라는 가명으르 썼다. 그런데도 그 음반마저 판매 금지되었다.

김민기는 이후에도 몇 차례 공연과 관련해 연행, 조사, 석방 등을 되풀이하다가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10·26’ 후 전북 익산으로 낙향, 소작농 생활을 했다. 경찰의 감시망은 그곳에도 뻗쳐 있었다. 이후 탄광에서 일하고 1981년부터는 경기 전곡의 민통선 안에서 소작농으로 5000평 쌀 농사를 지었다. 그는 훗날 한 인터뷰에서 농사를 짓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1983년 겨울, 화재로 전곡의 시골집을 몽땅 잃고 나서야 뮤지컬을 만들자는 한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대학로행은 전설로만 존재하던 김민기의 세상 나들이였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1983년 말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한 연극 ‘멈춰 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를 연출했다.

1984년에는 동요 뮤지컬 ‘개똥벌레 이야기’ 음반을 기획하면서 대학연합노래패인 연합메아리 멤버들을 소집했다. 그때 요절한 가수 김광석도 참여했다. 그러나 ‘개똥벌레 이야기’는 녹음까지 다 해놓고도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동요극인데도 심의에서 탈락한 것이다. 김민기는 연합메아리에 새로운 음반 기획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온 음반이 1984년 12월에 발매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1집이다. 음반이 노래운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김민기에게 일정의 지분이 있었으나 김민기는 노래운동 그룹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1987년에는 탄광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어린이 뮤지컬 ‘아빠 얼굴 예쁘네요’의 대본을 쓰고 음악을 작곡했으나 여전히 돈하고는 인연이 없었다.

1980년대는 많은 문화예술인, 지식인들이 전두환 정권에 대항해서 시국선언이나 서명운동을 맹렬히 벌이던 때였다. 김민기는 1970년대 자신과 함께하던 민중문화운동 그룹들이 그 핵심에 있었는데도 한 번도 그런 활동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유를 김민기는 2015년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분들을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현실 참여의 문법이 달랐다. 살아가는 방법이 달랐다.”

김민기(가운데)가 서울 잠실에서 장일순(왼쪽), 김지하(오른쪽)와 함께 술자리를 하고 있다.(1991년)

 

뮤지컬 ‘지하철1호선’,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 일으켜

그가 제2의 인생의 터전이 된 소극장 ‘학전’을 개관한 것은 1991년 3월이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그토록 앨범을 내지 않던 김민기가 자신이 직접 부른 39곡을 수록한 ‘김민기 전집’ 제목의 앨범 4장을 1993년 한꺼번에 낸 것도 순전히 빚을 갚을 요량이었다. 4장의 앨범은 1971년 그의 첫 음반이 압수된 이후 처음으로 정식 녹음한 음반이었다.

4장으로 된 ‘김민기 전집’ 앨범(1993년 발매)

 

학전이 언론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이었다. 김민기가 번안하고 연출한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994년 5월 14일 처음 무대에 올려지고부터였다. 독일의 폴커 루트비히의 ‘Linie 1’을 원작으로 한 ‘지하철 1호선’을 무대에 올리면서 김민기는 다짐했다. “이번에 망하면 여길 뜨겠다”고. 그런데 2주일이 지나면서 관객이 미어터졌다. 공연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했다. 1986년 초연된 독일 베를린에서는 15년 만인 2001년에야 1,000회를 돌파했지만 서자인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은 6년 만인 2000년에 1,000회를 넘겼다.

19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초연 모습. 왼쪽부터 설경구․나윤선․김효숙․이두일

 

연변 처녀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1980~1990년대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실직 가장, 가출 소녀, 자해 공갈범, 잡상인, 사이비 전도사 등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모습을 풍자와 해학으로 담아냈다.

‘지하철1호선’은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전부이던 한국 공연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원작자인 폴커 루트비히는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깊이로 재해석된 작품”이라고 칭송했다. 소극장 뮤지컬에서 라이브 연주를 도입한 것도, 원작자에게 저작권료를 제대로 지급하고 무대에 올린 것도, 출연진과의 ‘서면계약’이나 ‘러닝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학전이 처음이었다.

서울 대학로에서 ‘지하철 1호선’을 홍보하는 모습

 

‘지하철 1호선’은 초연 후 매년 수정·보완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는 배경을 ‘1998년 11월의 서울’로 고정해 공연했다. 그 사이 황정민, 조승우, 설경구, 방은진 같은 개성파 배우들이 거쳐갔다. 2008년 12월 31일 폐막했을 때, 15년 동안 다녀간 관객은 71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한 작품이 전용극장에서 4000회나 공연된 것은 한국 연극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하철 1호선’은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8년 9~12월 100회 한정으로 재공연되었고 지금도 계속 공연 중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