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82년 : 로베르트 코흐, 결핵균 병원체 발견

19세기 세균학의 토대를 닦은 ‘세균학의 개조’

로베르트 코흐(1843~1910)는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와 함께 19세기 세균학의 토대를 닦은 ‘세균학의 개조’다. 세균학은 17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현미경으로 처음 미생물을 관찰한 이래 19세기 말 전성기를 맞았다. 탄저균(1876), 임질균(1879), 장티푸스균(1880), 나병균(1880), 결핵균(1882), 콜레라균(1883), 디프테리아균·파상풍균(1884), 페스트균(1894), 이질균(1898) 등이 모두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코흐는 이 가운데 탄저균이 탄저병의 원인 균임을 입증하고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함으로써 ‘세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전 세계에서 발행된 우표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코흐는 독일 클라우스탈의 탄광촌에서 태어났다. 1866년 괴팅겐대 의과대를 졸업한 후 종합병원의 정신과 의사로 근무했으나 정신과에 흥미를 잃어 시골에서 개업했다. 1870년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 간의 보불전쟁 때 프로이센 군대의 군의관으로 참전한 몇 달을 제외하곤 시골 개업의로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중 탄저병이 크게 유행하던 1873년, 아내가 현미경을 선물했다. 그 무렵 탄저병은 병에 걸린 양이나 소를 얼마 못 가 죽게 했고,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농민들은 공포에 떨었으나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폴란드의 한 수의사가 병사한 동물의 혈액 중에 긴 실 모양의 작은 간상체(막대 모양)가 다수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으나 이것이 병의 원인인지, 병의 결과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코흐가 탄저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을 쥐에게 주사하는 실험을 해보았더니 쥐는 하루 만에 죽었고 죽은 쥐의 혈액에서 간상체가 다수 발견되었다. 코흐가 이 간상체, 즉 탄저균을 배양해 다른 동물에 주입했더니 그 동물에서도 탄저병이 발병했다. 이로써 탄저병은 탄저균이라는 특정한 병원균이 일으킨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코흐가 1876년 발견한 탄저균 연구 결과는 세균병인설 즉 ‘특정 질병은 특정 세균이 일으킨다’는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전염병 치료의 길이 열리고 각각의 질병에 대한 특효 치료법을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코흐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1880년 베를린 국립보건연구소 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 세균학 연구의 제1인자인 프랑스의 파스퇴르는 탄저균을 발견한 코흐에게 선수를 놓치자 1881년 탄저병 백신요법을 개발해 코흐의 명성을 따라잡았다.

 

1882년, 결핵균을 동물에 주사하면 결핵에 걸려 죽는다는 사실 발표

코흐는 세균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코흐의 정리’ 4원칙을 제시한 것으로도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특정 질병에는 그 원인이 되는 하나의 생물체가 있다. ▲그 생물을 순수 배양으로 얻을 수 있다. ▲배양한 세균을 실험동물에 투입했을 때 똑같은 질병을 유발해야 한다. ▲그 병에 걸린 실험동물에서 다시 그 세균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한다 등이다. 물론 ‘코흐의 4원칙’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학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야코프 헨레가 ‘특정 질병에는 기생균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등 3가지 조건을 제시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코흐가 다음 연구 목표로 삼은 것은 결핵균 병원체의 발견이었다. 결핵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인데도 원인균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코흐는 본격적인 연구에 앞서 제자인 파울 에를리히의 도움을 받아 미생물과 세균을 염색한 후 현미경 사진을 찍는 방법을 개발했다. 어느날 코흐는 파란색으로 염색된 죽은 폐 세포 사이로 작고 아주 가는 간균들이 모인 이상한 덩어리를 발견했다. 코흐는 곧 결핵 환자의 가래와 혈액 등에서 이 막대기 모양의 결핵균을 찾아내 배양에 성공했다. 그리고 1882년 3월 24일 열린 베를린 생리학회에서 결핵균을 동물에 주사하면 결핵에 걸려 죽는다는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당시 세계를 휩쓸던 결핵 원인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늘날 세계 결핵의날은 이 3월 24일을 기념하고 있다.

 

코흐의 실험실은 19세기 말 세계 의학의 중심지

1883년 코흐는 새로운 병원체를 탐색하기 위해 콜레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당시 코흐에게 라이벌 의식을 품고 있던 파스퇴르도 제자를 이집트로 파견했으나 제자는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 코흐 역시 콜레라균을 발견하지 못하자 콜레라가 번창하는 인도로 다시 건너가 그곳에서 콜레라균을 찾아내고 순수 배양에 성공했다. 이것을 동물에 주사해 발병을 확인했다. 콜레라균이 물이나 음식 등을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도 밝혀내 콜레라 방역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후 각국의 연구자가 그의 문하로 몰려들었고 코흐의 실험실은 19세기 말 세계 의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살바르산 606호’를 발견해 190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파울 에를리히, 1901년 제1회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밀 베링도 그의 제자였으며 화학물질 발암설을 증명한 일본의 야마기와 가쓰사부로도 코흐의 연구실을 거쳐갔다. 코흐는 1891년 자신을 위해 정부가 설립한 베를린 국립전염병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승진했다.

결핵균과 콜레라균의 잇따른 발견에 고무된 코흐는 1890년 ‘투베르쿨린’이라는 결핵 백신을 발표했다. 여론은 폭발적으로 반응했고 전 세계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막상 약을 접종했을 때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부작용만 심했다. 이 방법은 오늘날 투베르쿨린으로 불리는 결핵 진단법으로 쓰이고 있지만 당시 코흐에 대한 비난은 당초의 열광만큼이나 거셌다. 코흐는 실의에 빠졌고 더 이상 예전의 평판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때 18살의 어린 배우가 나타나 코흐를 위로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무렵 아내와 딸은 너무 바쁘게 사는 그의 곁을 오래전 떠나고 없었다. 코흐는 50세였던 1893년 30살 연하의 이 여배우와 재혼했다. 1901년 제1회 노벨상 수상자의 영광을 디프테리아 치료법을 개발한 제자 베링에게 빼앗긴 것도 결핵 치료약 개발 실패에 따른 불운이었다. 코흐는 좌절하지 않고 1903년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 수면병, 페스트 등을 연구했고 1904년 아프리카 회귀열 등을 연구했다. 이런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 1905년 마침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코흐가 사망하고 2년 뒤인 1912년, 독일 정부가 그를 영구히 기리기 위해 ‘베를린 전염병연구소’를 ‘로베트르 코흐연구소’로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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