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조지 쇼를 아시나요… 어머니·아내·며느리가 일본인인데도 31년간 조선의 독립운동 지원한 義人이랍니다

↑  조지 루이스 쇼와 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동아일보 기사(1920년 8월 11일)

 

by 김지지

 

국가보훈처가 호주에 사는 조지 루이스 쇼 선생의 외증손녀 레이철 사(51)씨의 자택을 찾아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와 영문으로 된 설명판을 전달할 예정이다. ‘독립유공자의 집 명패 달아드리기’ 사업은 독립유공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예우할 목적으로 보훈처가 작년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이번 명패 전달은 2018년 12월 영국인 베델 선생 유족에 이어 두 번째다.

 

일제의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 지원

1910년대, 압록강 너머 중국 안동(현재의 단동)의 흥륭가에 ‘이륭양행’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홍콩에 본사를 둔 영국계 대형 해운회사의 안동현 대리점이자 무역회사였는데 사장 겸 점장은 조지 루이스 쇼(1880~1943)라는 인물이었다. 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다. 중국 복건성 복주에서 태어나 줄곧 중국에서 성장했다. 그가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00년 한국 금광회사의 회계로 근무하면서였다. 하지만 광맥이 단절되고 채산성이 맞지 않아 1907년 한국을 떠나 중국 안동현에 이륭양행을 설립했다. 1912년에는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둘째 아들도 나중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범일본계 가족을 형성했다.

일본인 아내 사이토 후미

 

쇼가 39살이던 1919년 7월 상해 임시정부가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 연통제를 공표했다. 연통제는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설치한 임시 연통부가 담당했다. 임시정부 법령 등의 국내 전포(傳布), 독립전쟁 개시 때 군인·군속의 징모와 군수품 징발, 재정단원 모집, 정부 발행 공채 발매,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통신 등이 임무였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 전국적으로는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으나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 한반도 북쪽 지방에서는 비교적 순조롭게 조직되었다.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의 초대 사장 민강이 책임자로 임명된 서울연통부도 활동이 활발했다. 민강은 연통부를 통해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국내 연통부는 1921년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고 서울연통부 역시 1922년 적발되어 민강도 갖은 고초를 겪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8월 산하 교통부 안에 임시 교통국을 설치해 국내 각 도·군·면과의 연락망도 구축했다. 교통원을 통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선언문·지령·독립신문 등을 국내에 배포하고 국내 사정을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국내에서 모은 독립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게 임무였다. 상해와 국내를 내왕하는 인사들의 길잡이 역할도 했다. 이 모든 일의 본부 겸 사무국 역할을 한 곳이 이륭양행 2층에 설치한 안동 교통지부였다. 명칭은 10월 17일 안동교통사무국으로 바뀌었다.

 

김구가 상해로 망명할 때도 조지 쇼 도움 받아

사실 조지 쇼는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부터 독립운동가 망명, 독립 자금 모집, 무기 반입 등을 도와주고 있었다. 김구도 3·1 운동 직후에 동지 14명과 함께 이륭양행이 운행하는 계림호를 이용해 상해로 망명했다. 당시 국내에서 상해로 가는 지름길은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서 상해행 배를 타는 것이었다. 안동교통사무국이 설치된 후에는 1919년 10월 조선조 고관 출신의 김가진이 아들 김의환과 함께 이륭양행 배를 이용해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1919년 11월에는 정보가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기는 했지만 의친왕 이강도 이륭양행을 통해 망명을 시도했다.

이륭양행 건물 (출처 KBS)

 

교통국의 통신원이 국내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상해로 수송할 때도 쇼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쇼가 군자금을 이륭양행 명의의 수표로 발행해주면 통신원은 그 수표를 쇼가 거래하는 상해 회풍은행에서 현금과 교환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위장 명칭인 ‘강남공사’ 이름으로 부치는 선전물이 중국 우편으로 안동의 이륭양행에 도착하면 교통국 상주 요원이 마대에 담아 중국인을 시켜 압록강 넘어 의주지국으로 보내 전국으로 배포했다.

집안의 3대가 일본 여성과 결혼했는데도 쇼가 한국의 독립운동 지원에 그토록 열심이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2가지가 거론된다. 첫째는 일제의 방해로 막대한 피해를 보아 대체로 반일적인 중국 내 다른 영국 상인들처럼 그 역시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축출하려고 공작을 벌이는 일본인에게 강한 거부감을 품었다는 것이다. 쇼는 일본인과 사업상 거래조차 거부할 정도로 일본에 부정적이었다. 둘째는 그가 아일랜드계라는 점이다. 쇼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1916년 4월 아일랜드인들은 부활절 봉기를 일으켜 영국과의 혈전을 감행했고 1919년 1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개시했다. 이런 아일랜드의 피가 동병상련으로 조선을 돕게 했다는 것이다.

조지 쇼

 

자신의 회사 사무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 설치

일제가 이런 쇼를 가만 놔둘 리 없었다. 1920년 7월 11일 쇼가 일본에서 오는 아내를 맞기 위해 안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갔을 때 여권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이 그를 검거한 것이다. 일본이 내란죄로 기소하자 영국 정부와 언론이 극동 지역 거주 영국인의 지위와 위신에 관한 문제라며 무조건 석방을 요구했다. 결국 일본이 11월 19일 보석으로 석방해 쇼는 4개월여 만에 안동으로 돌아갔다.

쇼는 1921년 1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로부터 금색공로장을 받고 안동으로 돌아와서는 겉으로는 한국인과 관계를 끊고 근신하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조선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1921년 3월 안동 해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김문규를 이륭양행의 직원으로 채용해 비밀통신, 정보 수집, 군자금 모집, 무기 보관·전달 업무 등을 맡겨 안동교통사무국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제는 김문규를 조선의 치안을 위협하는 인물로 규정, 1922년 8월 형사를 몰래 안동에 보내 김문규를 체포한 뒤 국내 신의주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후 안동교통사무국은 사실상 해체되어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김문규가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동아일보 기사 (1922년 12월 4일)

 

그래도 쇼의 독립운동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1923년 3월 의열단의 황옥·김시현·황종우 등이 국내 거사를 추진할 때 이륭양행을 이용했고 1923년 12월 임시정부 요원들은 이륭양행의 선박을 이용해 상해와 안동 사이를 왕래하면서 폭탄 등 무기를 운반했다. 임시정부가 통의부·정의부 등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무기와 탄약을 운송할 때도 이륭양행을 거점으로 활용했다. 항일 독립투사 김산은 훗날 미국 작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노래’에서 “쇼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스스로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안동에 있는 그의 집에 숨었다…”고 회고했다.

조지 쇼의 어렸을 적 모습(1890년). 부모 사이에 서있는 아이가 조지 쇼다.

 

국가보훈처 2012년 친손녀에게 건국공로훈장 전달

쇼가 이처럼 계속 반일 운동을 벌이자 일제는 쇼를 안동에서 축출하려는 공작을 벌였다. 1931년 만주 침략 후 압록강의 국경 지대 단속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이륭양행의 기선들을 불법 임검하고 이륭양행이 대대적으로 밀수에 종사하고 있다는 중상을 서슴지 않았다. 반관반민의 어용 기선회사에 거액의 보조금을 주어 이륭양행과 경쟁토록 하고 이륭양행 소속 선박을 압류하는 등 쇼의 사업을 와해시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는 군부까지 나서 쇼의 배에 화물을 싣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쇼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이륭양행의 선박과 압록강 항로권을 매각하고 1938년 4월 안동을 떠나 복건성 복주로 이전했다. 이로써 일제의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31년간 전개했던 쇼의 독립운동 지원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쇼는 복주에서 석유 판매 등 사업을 벌였으나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면서 적지 않은 압박을 받다가 1943년 11월 13일 복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리 정부는 1963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으나 후손을 알지못해 전달하지 못하다가 2012년 49년 만에 친손녀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조지 쇼를 소개한 KBS <역사 한방>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Tr1blMv_9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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