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퇴위와 합스부르크가(家) 몰락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 부부. 가운데는 마지막 황태자 오토 폰 합스부르크

 

카를 5세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수장

1차대전은 유럽 최고의 명가 합스부르크가에도 치명타를 날렸다.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과 함께 같은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카를 1세가 왕위에서 물러남으로써 제국을 이끌어온 합스부르크가가(家)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합국은 1919년 9월 10일 오스트리아와 체결한 ‘생제르맹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을 불허하고, 제국에 속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유고슬라비아의 독립을 허용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확정지었다. 여기에 새로 수립된 오스트리아 공화국 의회가 1920년 4월 3일 ‘가계(家系)와 절연하고 왕권·재산권을 포기하는 서약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합스부르크 일족의 입국은 허가하지 않는다’는 ‘황제 일족 추방법’(일명 합스부르크법)을 제정함으로써 646년간 유럽을 호령해온 거대 제국의 해체에 쐐기를 박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의 남부 지방에서 시작할 때만 해도 300여 개의 영주 국가들로 이뤄진 신성로마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점점 영향력을 확대해 알자스·북스위스 등지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추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대공위 시대(1254~1273)의 혼란기를 틈타 영토를 확장하고 힘을 길러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첫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바로 루돌프 1세다. 그는 황제로 재위(1273~1291)하면서 오스트리아를 본령으로 삼고 주로 정략결혼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이 정책은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전통이 되었다.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1452~1493)는 145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까지 겸해 스위스에서 북해 연안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우뚝 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래도 합스부르크가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황제는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1493~1519)였다. 그는 전쟁이 아닌 순전히 혼인 정책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혀나갔고 과실은 손자 카를 5세(재위 1519∼1556)에게 넘겨졌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을 둘러싼 유명한 시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전쟁을 하게 만들라.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그대는 결혼을 하라.” 피 흘리는 전쟁 대신 결혼으로 영토를 접수하고 승리의 영광을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77년 부르고뉴 공국(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프랑스 일부)의 상속녀와 결혼해 부르고뉴를 손에 넣었다. 아들 필리프 1세는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에게 1504년 장가보내 스페인과도 인연을 맺었다. 혜안인지 행운인지는 몰라도 후아나 공주의 형제들이 잇따라 죽고 후아나도 정신이 오락가락해 스페인은 졸지에 그녀의 아들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 5세(스페인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손녀의 혼인 관계로 얻은 헝가리와 보헤미아(체코)까지 손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어 카를 5세는 독일영방 외에 스페인, 네덜란드, 덴마크, 체코, 헝가리까지 지배하는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의 수장이 되었다.

 

오스트리아를 본령으로 삼고 주로 정략결혼을 통해 영토 확장해

오스트리아와 항상 경쟁을 벌였던 프랑스에서만 유일하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이 나오지 않았으나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도 합스부르크 왕조의 결혼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프랑수아 1세의 왕비를 비롯해 6명의 왕비가 합스부르크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레옹 황제의 두 번째 황후 마리 루이즈,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오스트리아 계열과 스페인 계열로 나뉘어 유럽을 지배했다. 그러던 중 1700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1661~1700)가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하고 죽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에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14년 전쟁(1701~1714)이 일어났다. 결국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로 대체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등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가문의 쇠락은 불가피했다.

1740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카를 6세가 죽어 그의 유일한 상속녀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계자로 즉위했다. 그러자 테레지아의 즉위를 둘러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패해 독일영방의 주도권을 프로이센에 넘겨줌으로써 영토는 오스트리아·체코·헝가리로 축소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로렌(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주. 독일어로는 로트링겐)의 공작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요셉 2세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해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합스부르크·로렌 왕가로 바뀌어 1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 사건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1806년에는 프란츠 2세가 나폴레옹에게 힘의 열세를 느껴 스스로 신성로마제국 해체를 선언하고 순수 오스트리아 왕국을 선포함으로써 과거의 영광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또다시 패해 독일영방 내 주도권이 완전히 프로이센에 넘어감으로써 이때부터 오스트리아는 독일제국의 비주류로 남게 되었다. 힘이 약화된 틈을 타 헝가리가 독립하려 하자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대신 오스트리아 왕 아래 대외 정책과 전쟁만 공동 대처하고 각각 독립된 헌법과 의회를 두는 절충안을 제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이때부터 이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국’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합스부르크가가 통치하는 다른 소수민족 즉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일부 이탈리아인 등의 반발을 사 오스트리아는 끊임없이 내홍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 소수민족들은 1차대전 후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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