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美 워터게이트 사건 시작

1972년 6월 17일 새벽2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 내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이 체포됐다. 단순 절도죄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이 미 정가를 강타한 사건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한 사내가 워싱턴포스트지 편집국장 브래들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서였다.

취재 지시를 받았으나 막막하기만 했던 입사 9개월차의 신참내기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에게 ‘딥 스로트(Deep Throat·정보제공자)’로부터 결정적인 제보가 왔다. “백악관이 관련됐다”는 제보였다. 닉슨 대통령과 워싱턴포스트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건의 파장이 커져 FBI가 수사에 착수하자 닉슨 대통령은 CIA를 통해 수사를 중단시켰고 사건에 연루된 참모들을 해임시키며 자신은 무관하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해임된 법률 고문이 상원 조사위 공청회에서 “닉슨 대통령도 이 사건의 은폐공작을 알고 있다”고 증언하면서 세인들의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전 백악관 보좌관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모두 녹취된다”고 한 양심선언도 닉슨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특별검사는 테이프를 증거자료로 요청했으나 닉슨은 오히려 법무차관을 통해 특별검사를 해임했다. 닉슨은 빗발치는 여론에 밀려 1973년 12월 자신의 육성이 담긴 테이프와 속기록을 제출했지만 영장에 명시된 9개의 테이프 중 7개만 제출하고 더구나 테이프에서 결정적인 순간의 18분30초가 지워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의혹만 키웠다. 결국 하원 사법위원회가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하자 닉슨은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다. 1974년 8월 8일이었다. 이때부터 미국 역사는 닉슨을 ‘중국을 처음 방문한’이 아니라 ‘재임 중 물러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딥 스로트’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은 ‘딥 스로트’ 자신과 우드워드, 번스타인, 브래들리 편집국장 등 4명뿐이었다. 이들은 발행인인이자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 여사가 물었을 때도 입을 다물 만큼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다. ‘딥 스로트’의 존재는 33년이 지난 2005년 5월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워싱턴포스트지가 “딥 스로트는 당시 FBI 부국장이던 마크 펠트”라는 월간지 ‘배니티 페어’의 보도를 확인하는 기사를 5월 31일자 인터넷판에 띄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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