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중국 홍위병들의 집단적 광기는 중국 전역을 광란으로 몰고간 전주곡… 중국 사회 집단 최면상태로 빠져들고 속절없이 무너져내려

↑ 홍위병들이 씌운 얼간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모욕을 당하고 있는 관료들

 

by 김지지

 

1966년 8월의 군중대회는 중국 전역을 휩쓸고 갈 광기의 신호탄

1966년 8월 18일 아침, 인민복 차림에 붉은 완장을 찬 늙은 영웅 모택동(1893~1976)이 천안문 누각 위로 올라가는 순간, 천안문광장을 가득 메운 100만 명의 젊은이가 모택동 찬양가 ‘동방홍(東方紅)’을 큰 소리로 부르며 열광했다. 중국 전역을 휩쓸고 갈 광기의 함성이자 신호탄이었다. 그날 하루종일 계속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에서 국방장관 임표는 “자본주의 실권자들을 무력으로 타도하자! 반동적인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자!”고 외쳤다. 다른 연사들은 “낡은 세계를 쳐부수어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을 단호히 수행하자”고 촉구했다. 문화대혁명의 본격적 개막이었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서 베이징 사범대학 부속여자 중학교 학생이 마오쩌둥에게 홍위병 완장을 채워주고 있다.

 

문화대혁명이 있기 전인 1959년,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위기에 몰리자 유소기(1898~1969)에게 국가 주석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당주석 자리만 유지한 채 외형상 권력 핵심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소기 등 실용주의자들이 시장경제를 도입, 망가진 경제를 살리며 당내 입지를 강화했다. 위기감을 느낀 모택동은 “중국이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경향으로 흐른다”며 강한 불만을 터뜨렸다.

모택동은 실용주의자들의 부상을 자신의 몰락으로 받아들였다. 국방장관 임표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든든하게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모택동은 문화, 예술, 학술 전반에 걸친 은밀한 반격을 준비했다. 그의 처 강청이 모택동의 의중을 파악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약진운동에 동원된 장시성 지역 농민들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 논문, 유소기와 주은래 겨냥

1965년 11월 10일 상해 당기관지 문회보에 한 편의 논문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가 실렸다. 모택동과 훗날 문화혁명파로 불린 세력들이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호탄이자 중국을 광란으로 몰아갈 전주곡이었다. 논문은 ‘4인방’의 한 사람인 요문원이 썼다. ‘해서파관(海瑞罷官)’은 ‘해서가 관직을 파면당하다’는 뜻의 경극 대본으로, 북경의 부시장이자 저명한 역사학자인 오함이 1960년 썼다. 명나라 가정제 때 청렴결백한 관리 ‘해서’가 재상들이 백성들로부터 빼앗은 토지를 되돌려 주도록 가정제에게 상소했다가 억울하게 파직된다는 내용을 담은 대본이 5년이 지나 새삼스럽게 비판을 받은 것이다.

문회보에 실린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 제목의 논문

 

요문원은 ‘해서파관’이 모택동을 가정제로, 팽덕회를 해서로 풍자해 팽덕회의 복권을 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팽덕회는 1959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비판하다가 숙청된 혁명 1세대였다. 논문은 또 “‘해서파관’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독초”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당시 학계는 논문을 단순한 학술논쟁 정도로 생각했으나 유소기 국가주석과 주은래 총리는 논문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예상대로 해방군보와 인민일보 등이 논문을 전재하며 ‘해서파관’의 의미를 공론화하자 유소기는 정치투쟁으로 확대하지 말도록 ‘2월 요강’을 작성했다. 그러나 모택동과 추종자들은 ‘2월 요강’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예술과 문학에 대한 군중비판을 요구했다.

 

“우리는 붉은 정권을 방위하는 위병(衛兵)이다”라는 대자보가 홍위병의 시작

1966년 5월 열린 당 중앙위 정치국 확대회의는 물밑에서 숨가쁘게 진행되어온 문화혁명파의 움직임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자리였다. 회의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지도강령이 채택되었다. 5월 16일에는 모택동의 뜻이 반영된 이른바 ‘5·16 통지’가 참석자들에게 전달되었다. 5·16 통지에는 ‘2월 요강’을 폐기하고 당·정·군 등에 포진하고 있는 반혁명 수정주의 분자에 대한 엄중한 비판과 경고가 담겨 있었다.

5월 25일 충격적인 대자보가 북경대에 등장하고, 6월 1일자 인민일보에 ‘모든 잡귀를 소탕하라’라는 제목의 사설이 게재되면서 중국은 점차 집단 최면상태로 빠져들었다. 6월 초에는 북경의 청화대학 부속중 교내에 “우리는 붉은 정권을 방위하는 위병(衛兵)이다”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문화혁명 기간 악명을 떨친 홍위병이 탄생한 것이다.

1966년 5월 25일 북경대 벽에 나붙은 대자보

 

점차 전국의 학교 담벼락에는 부르주아 사상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넘쳐나고, 온갖 것이 권위주의적, 수정주의적이라며 규탄을 받았다. 학교는 수업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유소기는 문혁 급진파의 과격한 활동을 저지할 공작조를 구성하고 “대자보는 학내에만 붙일 것”, “가두에서의 데모 행진 금지” 등을 지시하는 한편 모택동에게는 사태 수습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대로 놔두면 좋지 않은가”라며 면전에서 거절했다. 모택동은 “무릇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내세워 홍위병과 학생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선동대회에 나선 홍위병 소녀들. 홍위병들 중에는 중학생, 초등학생들도 있었다.

 

8월 1일, 제8기 11중전회 참석자들에게 모택동의 메시지가 배포되었다. “사령부를 포격하라-나의 대자보.” 거명은 하지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사령부는 유소기, 등소평의 실무파였다. 모택동은 8월 4일 열린 정치국 상무위 확대회의에서도 공작조의 파견을 ‘노선의 오류’로 결정해 유소기의 자아비판을 끌어냈다. 유소기는 국가주석직은 그대로 유지했으나 당내 서열 2위에서 8위로 떨어졌고, 서열 6위였던 임표는 2위로 약진했다. 새로 늘어난 상무위원 자리는 극좌파인 중앙문혁소조에게 돌아갔다. 이후 모택동에 대한 신격화는 더욱 강화되었고 문혁파는 광적인 고양기를 맞게 되었다.

마오쩌둥이 대자보를 작성하는 장면을 형상화한 문혁시기의 포스터. ‘사령부를 포격하라’고 씌어있다.
홍위병들, 문화대혁명을 중국 전역으로 파급시키는 전위부대 자임

1966년 8월 18일 천안문광장에서의 100만 명 집회 후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을 중국 전역으로 파급시키는 전위부대를 자임했다. 모택동의 묵인과 호응으로 기세등등해진 홍위병들은 자의적으로 정한 ‘사구(四舊)’ 즉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파괴하는 데만 열심이었을 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파괴는 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부녀자들은 단발머리를 해야 했고 치마를 입으면 곤욕을 치렀다.

외국과 관련 있는 것은 무조건 공격 대상이었다. 인민일보가 1면에 큼지막하게 “실로 훌륭한 일”이라며 옹호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유서깊은 문화재들이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모택동의 초상화가 걸렸다. 불상들도 철거되고, 공자의 초상도 파괴되었다.

홍위병이 공자 사당의 대리석 기둥을 커다란 해머로 부수고 있다.

 

반혁명분자로 몰린 사람들은 삭발을 당하거나 머리에 먹물 글씨가 씌였고 심지어는 인두로도 몸이 지져졌다.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우귀사신’(牛鬼蛇神·요괴가 변한 것), ‘반동분자’라는 팻말을 목에 건 채 거리에서 끌려다녔고, 실각한 당 간부들은 죄상을 적은 삼각모자를 머리에 쓴 채 온갖 육체적·정신적 고문을 당하다 죽어갔다. 8월 24일부터 9월 1일까지 북경에서 학살당한 사람만 1500여 명에 달했다. 홍위병들이 뿜어대는 집단적 광기는 이제껏 경험한 적이 없는 미증유의 대재앙이었다.

1966년 9월12일 어린 홍위병이 하얼빈 시장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유소기와 등소평 등은 1966년 10월 열린 홍위병 대회에서 ‘부르주아 반동노선의 두목’으로 비판을 받은 후 곤욕을 치렀다. 강청 등의 중앙문혁소조는 두 사람을 “당 지도부 내에 타도해야 할 적”으로 지목했다. 대중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으나 곧 모택동의 뜻임을 알아채고 유소기·등소평 타도의 물결에 휩쓸렸다.

강청과 임표 등 칼자루를 쥔 문혁 세력은 점차 표적을 유소기로 좁혀나갔다. 1967년 3월 당내에 ‘유소기 특별심사조’가 설치되었고, 4월에는 유소기의 처 왕광미가 홍위병에 의해 청화대학으로 끌려가 집단공격을 받았다. 자택에 사실상 연금되어 있던 유소기도 홍위병들에게 끌려가 온갖 구타를 당했다. 부인과 함께 비판대 위에 세워진 유소기는 양손을 뒤로 뻗고 허리를 굽힌 채 머리를 숙여야 하는 고문을 받았다. 자택 지하실에 감금된 유소기는 국가주석의 사임을 모택동에게 거듭 요청했으나 모택동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인 유소기

 

결국 유소기는 1968년 10월의 8기 12중전회에서 “당내를 어지럽힌 배신자, 적의 첩자, 노동귀족”으로 비판받아 영구 출당되고 일체의 직무에서도 해임되었다. 유소기는 1969년 10월 하남성 개봉으로 옮겨져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다음달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죽음은 공표되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통보되지 않았다.

중국 여성 최초로 원자물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던 유소기의 처 왕광미의 일생도 파란만장했다. 왕광미는 문화혁명 발발과 함께 만인이 우러러보던 영부인에서 졸지에 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몰려 온갖 박해를 받고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2년 동안 감금되었다. 남편이 숨진 것도 몰랐다. 강청은 자기보다 아름다운 외모에 학식이 깊은 왕광미를 시기하고 질투해 혹독한 박해를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위병들에게 집단 모욕을 당하고 있는 왕광미

 

모택동, “흐트러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라” 암묵적 지지 보내

1959년 모택동에게 직간을 했다가 국방부장에서 해임된 팽덕회는 한동안 오지에서 하위직을 전전하다가 문화대혁명 때 다시 불려와 모진 고문을 받았다. 끝까지 반혁명의 누명을 부정하고 자살도 거부하는 바람에 죽을 때까지 10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고 허파에 구멍이 뚫리고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는 1974년 11월 운명했다.

홍위병들이 팽덕회의 등과 팔을 잡고 ‘반혁명수정주의분자’ 팻말을 앞에 세워놓았다.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 길을 걷는 자)로 낙인찍힌 등소평 역시 홍위병들로부터 ‘반모(反毛) 주자파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아 2년간 연금된 데 이어 3년간 지방의 트랙터 수리제조공장으로 유배되어 막노동자 생활을 하다 1973년 복권되었다.

모택동은 “흐트러지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라”며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홍위병과 노동자, 홍위병과 홍위병끼리도 시가전을 벌여 수천 명이 죽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중국 전역이 혼란상태에 빠져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택동은 그제야 큰일나겠다 싶었는지 ‘혁명적 목표’보다 ‘질서 회복’이 급선무임을 강조했다.

주은래 등의 냉정한 당 지도자들에게 다시 일상적인 결정권이 주어지고, 홍위병들이 군대에 의해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서야 중국 전역을 광란과 파국으로 몰고갔던 광기의 시대도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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