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우리 독립군 수백명이 죽거나 실종된 ‘자유시 사변’ 발발

1921년, 멀리 시베리아 동쪽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수백명의 한인 무장 독립부대원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자유시 사변’ 혹은 ‘흑하 참변’이라 불리는 참사였다. 러시아혁명을 안착시키려는 볼셰비키 적군과 열강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저지하려는 백군 간의 내전이 사실상 적군의 승리로 끝나고, 혁명을 간섭해온 연합국 중 시베리아 동쪽에 눌러앉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러시아를 떠난 뒤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힘이 열세였던 탓에 일본을 쫒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기만을 기다려야했던 소비에트 정부는 이 지역에 ‘극동공화국’을 세워 일본군의 철수를 담당토록 했다.

그 무렵 시베리아 내 ‘흑하 자유시’에서는 수십여개의 크고 작은 한인 무장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볼셰비키와 뜻을 같이하는 독립군도 있었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볼셰비키와 연합한 독립군도 있었다. 1921년 1월에는 간도의 독립군들도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자유시 부근으로 몰려왔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쫓겨 자유시 부근 밀산으로 피신온, 김좌진․홍범도․지청천․안무 등 쟁쟁한 장군들이 지휘하는 최강의 독립군 부대였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계열의 수천명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몰려오자 일본군이 러시아에 이들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주도권을 놓고 갈등한 독립군 내부에도 문제는 있었다. 친 볼셰비키 독립부대와 비 볼셰비키 독립부대가 갈등하는 가운데 극동공화국이 비 볼셰비키 부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면서 무력 충돌의 조짐이 보였다. 김좌진은 사태를 예견하고 부하들과 함께 미리 중국으로 되돌아갔으나, 홍범도와 안무는 친 볼셰비키 독립부대 쪽에 합류해 이들은 이때부터 친공 독립운동가로 분류된다. 일본이 러시아를 점점 강하게 압박하자 1921년 6월 28일, 러시아가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코사크 기병과 친 볼셰비키 독립부대를 동원, 무장을 거부하는 우리 독립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272명이 죽고 250명이 실종됐으며 917명이 포로로 잡혔다. 참변은 독립군의 항일 의지를 무참히 꺾어놓았고 독립을 지원할 구세주로 기대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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