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그를 가리켜 “미국 바로 그 자체”라고 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사나이 중의 사나이” “진정한 영웅”으로 칭송한다. 1928년 존 포드 감독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930년 영화 ‘빅 트레일’에서 첫 주연을 맡았으나 무명기의 연장일 뿐이었다. 이후 10여 년간 8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영화가 B급이어서 배우도 B급 대접을 받았다.
존 포드 감독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193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그가 주연을 맡고 존 포드가 연출한 ‘역마차’가 큰 인기를 끌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영화가 서부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면서 이후 40여 년간 펼쳐질 존 웨인의 시대가 화려하게 개막했다. 이후 웨인은 ‘아파치 요새’ ‘황색 리본’ ‘리오그란데’ 등 존 포드의 영화에 출연하며 포드와 함께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완성했다. 존 웨인은 포드 사후에도 홀로이 그 전통을 이어나갔다.
192cm의 거구로 서부극의 카우보이 기병을 비롯, 각종 영화에 해병대·파일럿·선장 등으로 출연하면 화면은 늘 꽉 차 있었다. 그는 무뚝뚝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의 ‘정의의 투사’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열성적인 공화당원으로도 유명했다. 공화당이 풍기는 ‘보수적 미국’의 색채가 자신의 이미지에 잘 어울려 공화당을 선택한 면도 있지만 그는 기질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1950년대 초에는 노골적으로 매카시를 찬양했고, 1960년대 반전 열풍이 불 때는 베트남전을 미화한 영화(그린 베레)를 만들어 애국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를 정치 이데올로기에 가둬두지 않아 그는 헐리웃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모은 배우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암이 찾아와 15년간에 걸친 암과의 사투 끝에 결국 1979년 6월 11일 72세 나이로 죽었다. LA시는 장례 기간 5일 동안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며 죽음을 애도했다. 미 의회는 죽음이 임박한 5월 건국 이래 83차례만 준 적이 있는 ‘연방의회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사후에도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의 ‘존 웨인 공항’에서 사람들을 맞고 있다. 미국인들은 여론조사를 통해 20세기 최고배우로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