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여간첩 김수임 사형 선고

6·25가 발발하자 한 사형수가 예정보다 앞당겨 총살형에 처해졌다. 간첩 이적행위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수임이었다. 이화여전 9년 후배 전숙희에 따르면 “사랑밖에 몰랐던, 그리고 너무 순진했던” 김수임은 경기도 개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11살에 팔려가다시피 민며느리로 갔다가 4년 만에 야반도주해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재원이었다.

탁월한 영어 실력으로 세브란스 병원의 미국인 통역으로 취직한 김수임은 어느날 한 파티장에서 이강국을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강국은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베를린에 유학까지 다녀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지만 그는 열성 공산주의자였다. 이강국이 결혼까지 한 유부남이었음에도 둘의 사랑은 뜨거웠다. 광복 후 이강국이 제 세상을 만난 듯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취직한 김수임은 베어드 미군 대령과 동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1950년 2월의 어느날 합동수사대가 김수임 집에 들이닥쳤다. 1946년에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주고, 미군 철수 사실을 북측에 전달했다는 등 그녀에게 씌어진 혐의는 자그마치 19가지나 됐다. 당대의 세도가 베어드 대령의 동거녀이고 당시 이기붕 서울시장이 수사중단 압력을 넣었어도 군법회의는 6월 15일 김수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김수임에게는 지금까지도 여러 이미지들이 포개져있다. 국제간첩,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순교자, 반공 이데올로기의 희생자 등등. 이처럼 김수임에 대한 정확한 실체는 아직도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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