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미-아르헨티나 간 ‘포클랜드 전쟁’ 개전

1982년 초 아르헨티나 경제는 위기상황이었다. 3월의 인플레는 46%를 기록했고 실질소득은 1970년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1916년부터 1976년까지 60년 동안 대통령이 22번이나 바뀌고 1976년부터는 아예 쿠데타 세력들이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맡았던 군부 독재의 폐해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길거리는 연일 반정부 시위로 시끄러웠다. 1981년 12월 군 참모총장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레오폴도 갈티에리는 국민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포클랜드 전쟁을 결정했다.

포클랜드는 동·서 포클랜드 2개 섬과 20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군도(群島)로, 1833년부터 149년 간 영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인구는 영국인 1800명이 전부였다. 아르헨티나에서 480㎞밖에 떨어지지 않은 섬을 1만3000㎞나 떨어진 영국이 지배하고 있으니 아르헨티나 국민들로서는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군 2000여 명이 전격적으로 포클랜드 군도를 급습, 3시간만에 80명의 영국군 수비대를 무력화시키고는 그곳에 아르헨티나의 깃발을 꽂았다. 개전 후 반정부파까지 열광적으로 지지한 것을 보면 갈티에리의 작전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는 일단 섬을 점령하기만 하면 만성적인 경기 침체에 허덕이는 영국의 대처 총리가 머나먼 작은 섬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도 중재에 나설 것이고 국제 사회도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오판이었다. 비록 소련이 일부 도움을 주긴 했으나 미국은 영국 함대에 기상정보와 아르헨티나군 배치상황을 알려주었고 유엔과 나토는 영국을 거들었다. 대처는 100척의 함대를 파병, 섬 공략에 나섰다. 아르헨티나는 4월 말 1만 명의 병력을 추가로 섬에 배치하고 영국 군함 4척을 침몰시켜 개전 초기에는 기세를 떨쳤으나 그것도 잠시뿐 전세는 곧 영국으로 기울었다.

결국 6월 14일, 아르헨티나가 개전 74일 만에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영국군 250여 명, 아르헨티나군 650여 명이 전사했으니 규모로는 작은 전쟁이었으나 양국에 미친 전쟁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아르헨티나는 전쟁 패배로 군부독재가 무너지는 계기를 맞았고 국민적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대처는 전쟁을 통해 강력한 리더십을 인정받아 1983년의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 훗날 ‘대처리즘’이라 불리는 강력한 경제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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