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日 황족 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
↑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 당일 모습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나이 많은 형(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제가 된 것은 생모인 엄비 덕분 고종에게는 9남 […]
↑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 당일 모습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이 나이 많은 형(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제가 된 것은 생모인 엄비 덕분 고종에게는 9남 […]
“만지면 만질수록 그 증세가 덧나는 상처와도 같은 존재” 이광수(1892~1950)에게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비난의 키워드는 ‘민족 반역자’요 ‘친일파’다. 하지만 문학계 일부에서는 이광수의 친일 활동은 인정하면서도 “다면성을 […]
근대 잡지를 펴낸 출판인이자 신문화의 선구자 최남선(1890~1957)은 다양한 근대 잡지를 펴내고 우리의 고전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출판인이자 신문화의 선구자였다.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제외하려 한 일본의 […]
고종, 헤이그 평화회의를 일본의 국권 침탈 공론화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 체결이 가시화하자 고종은 미국과 러시아를 향해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은 […]
조선통감부 설치는 대한제국 내정 간섭이 목적 을사조약(1905.11.17)을 ‘늑약’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과 절차에 불과할 뿐 을사조약에 내포된 […]
일본, 러일전쟁 승리 후 대한제국에 대해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지위 확보 러일전쟁을 승리로 장식한 1905년, 일본이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 영국과는 제2차 영일동맹(1905.8)을 체결해 사실상 대한제국에 […]
↑ 정한의논도(征韓議論圖). 왼쪽은 이와쿠라 도모미이고 중앙은 사이고 다카모리다. 1877년 작 조선이 일본의 달라진 위상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 조야에서 ‘정한론(征韓論)’ 고개 들어 1868년 1월 쇼군의 막부 […]
일제가 중점을 둔 것은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사업 일제는 1904년의 러일전쟁 승리 후 농업회사나 조합 등을 통해 조선의 농업경영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흉계를 꾸몄다. 일본인 […]
우리 민족이 36년간 겪어야 할 시련의 전주곡 조선을 병탄하려는 일제의 시나리오는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했다. 일제가 먼저 착수한 것은 대한제국 주변의 외교적 울타리를 모두 걷어내 조선을 […]
조선인의 생사 여탈권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한 손에 쥐어 조선총독부 설치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된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이 칙령 제319호로 공포되면서 구체화되었다. 칙령은 […]
각종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드는 게 목적 일제가 본격적으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한 것은 1910년 강제 합병 후였다. 명분은 공평한 지세 부담, 지적 확정과 소유권 보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