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착수

각종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드는 게 목적

일제가 본격적으로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한 것은 1910년 강제 합병 후였다. 명분은 공평한 지세 부담, 지적 확정과 소유권 보호, 토지 개량과 이용의 자유 보장, 생산력 증진 등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였고 실질적인 목적은 조선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관계를 공고히 함으로써 조선의 사회구조를 식민지형으로 개편하고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조선총독부의 지세 수입을 증대시키는 데 적합한 토지제도를 만드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시행에 앞서 일제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토지소유권의 법적인 보장이었다. 당시 일제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고 토지에 대한 경작 농민의 권리가 강한 조선의 토지제도로 인해 토지 장악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불법이었던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일제는 1910년 1월 토지조사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3월 조선통감부에 토지조사국을 설치해 토지조사 준비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일합방조약 체결 다음날인 8월 23일 ‘토지조사법’을 공포했다. 일제가 얼마나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준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토지 약탈은 국권 강탈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1907년 시작된 국유지 수탈로 1910년 8월 강제합병 당시 일제가 강제 창출한 국유 농경지는 12만 8,000여 정보나 되었다.

일제는 토지조사법 공포 후 조선부동산등기령(1912.3), 토지조사령(1912.8), 지세령(1914.3), 토지대장규칙(1914.4), 조선임야조사령(1918.5) 등을 순차적으로 공포해 토지조사를 구체화했다. 이 가운데 근간은 토지조사사업의 절차와 시행 방법 등을 규정한 토지조사령이었다. 이 조사령에 따라 토지 소유자는 조선 총독이 정한 기간 내에 토지에 관한 모든 것을 신고해야 했다. 토지조사사업은 크게 소유권 조사, 지형지모(地形地貌) 조사, 지가 산정, 토지대장 작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토지조사결과,  총독부 소유지 국내 토지의 50% 넘어

일제가 노린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는 일본 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 소유 증명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등기제도 등 사유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증명제도가 충분치 않고 토지에 도지권(토지를 경작할 권리) 등 소작민의 각종 권리가 부여되어 있어 일본 자본이 토지를 점유하는 데 장애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세 수입 확대였고 셋째는 국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드는 것이었다. 넷째는 무상으로 점유한 미간지(未墾地)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의 식민회사들을 통해 일본 이민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불하하는 것이었고 다섯째는 미곡을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간 소유의 토지조사는 준비조사, 필지조사, 분쟁지조사 단계를 거쳐 토지 소유자 간의 경계를 확정하는 ‘사정(査定)’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정 공시는 1913년 11월 충북 청주에서 처음 시작해 1917년 10월 평북 용천군 신도면의 일부 지방을 끝으로 완료되었다. 1918년 6월에 공식적으로 끝난 토지조사사업 결과, 총 1,910만 필지의 토지소유권이 결정되었다.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 소유 토지, 마을 또는 문중의 공유지, 그리고 황무지들도 모두 총독부 소유로 귀속되었다.

1918년 말을 기준으로 하면 일제가 수탈한 국유 농경지는 13만 정보였다. 무주공산인 산림 등 1,369만 정보까지 합치면 일제의 소유로 넘어간 국유지는 1,382만 정보나 되었다. 120만 정보의 미간지 중 총독부 소유가 된 102만 정보까지 합치면 총독부 소유지는 국내 토지의 50%가 넘었고 지세 수입은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토지소유권을 제외한 권리 일절 인정하지 않아

토지조사 결과, 소유관계에도 대폭적인 변화가 생겼다. 1918년 말 지주는 3.1%, 자작농은 19.7%, 반봉건적 지주에 결박된 자소작농은 39.4%, 순수 소작농은 37.8%로 집계되었다. 결국 총 농가 호수의 77.2%가 반봉건적 지주제도의 착취 하에 들어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선 왕조 말기의 반봉건적 지주-소작제도가 개혁되기는커녕 오히려 소작농과 농민의 각종 권리는 소멸되고 지주의 배타적 사유권만 보장받음으로써 반봉건적 지주 제도를 강화한 결과를 낳았다.

다만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근대적 토지소유제도가 확립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워낙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농민들의 원성이 잦았다. 무엇보다 토지소유권을 제외한 그밖의 권리를 일절 인정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우리나라는 토지 관습상 소유권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소작지를 대대로 경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작민들은 국가나 지주에게 일정한 소작료만 내면 자기 마음대로 소작지를 경작했다. 소작 기간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계속 보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경작권은 재산권으로 간주되어 토지 가격의 3분의 1 가격으로 매매나 양도할 수 있고 세습도 가능했다.

그런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이러한 경작권이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장기적 경작은 물론 경작권의 매매·양도·세습 등이 완전히 부정되고 소멸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이 하루아침에 경작권을 잃고 대대로 농사를 짓던 땅에서 쫓겨났으며 소작을 계속 하더라도 매년 소작 계약을 하고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 했다.

국유지, 미신고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토지 등이 조선총독부의 소유를 거쳐 헐값에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인의 소유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농민의 거센 저항을 불렀다. 그러다 보니 토지조사국 출장원과 경찰관, 면장·지주 등으로 구성된 토지조사 작업반은 한 손에는 권총과 대검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망원경과 측량기를 들고 조사를 다녀야 했다. 이렇게 일어난 토지조사 분쟁이 3만 3,000여 건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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