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조선총독부 설치와 역대 조선 총독

조선인의 생사 여탈권 결정하는 무소불위의 권한 손에 쥐어

조선총독부 설치는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된 1910년 8월 29일,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건’이 칙령 제319호로 공포되면서 구체화되었다. 칙령은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조선총독부에 총독을 두고, 위임의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며, 일체의 정무를 통할한다’고 규정했으나 아직 준비가 덜 된 탓에 한동안 통감부와 그 소속 관서를 존속시키고 총독의 직무 역시 통감이 대행하도록 했다. 종래 대한제국 정부에 속한 관청도 총독부 소관 관청으로 간주해 당분간 존치했으며 관리들도 종전과 똑같은 조건을 유지하도록 했다.

일제는 이런 과도 체제를 거쳐 9월 30일 칙령 제354호로 ‘조선총독부 관제’를 공포하고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조선총독부 관제 내용은 이랬다. ▲총독은 천황의 친임(親任)으로 하고 육해군 대장으로 한다 ▲총독은 천황이 위임하는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고 조선의 방위를 담당하며 입법·사법·행정의 권한을 갖는다 ▲총독은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해 천황에게 상주하고 재가를 받는다 ▲총독은 직권 또는 특별한 위임에 의하여 조선총독부령을 발하고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구류, 200원 이하의 벌금 등의 벌칙을 부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인의 모든 생사 여탈권을 자의로 결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총독 손에 쥐어준 것이다.

입법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령(制令)’의 발동 권한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시행된 법령은 칙령 제324호 ‘조선에 시행해야 할 법령에 관한 건’에 의거해 법률, 칙령, 제령이 근간을 이뤘다. 이 가운데 총독이 제령을 제정할 때는 본토의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의 재가를 받아야 하고, 긴급한 사유가 있을 때만 재가를 받지 않고 먼저 제령을 발한 뒤 나중에 천황의 재가를 받도록 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독의 권한에 속해 식민통치 기간 중 조선을 다스린 법제의 근간 역할을 했다.

사법권 역시 독립하지 못하고 중앙 행정부서의 하나로 전락했다. 총독은 재판소 설립·폐지, 관할 구역과 그에 관한 변경 등을 결정하고 판사의 전관·전소·정직·면직·감봉 등에 관한 권한까지 모두 행사했다. 사실상 제왕적 총독이었던 것이다.

 

5만 7,000여 명이 한반도를 물샐틈없이 감시

총독이 관할하는 행정적 기구는 다음과 같다. 총독의 바로 밑에 정무총감을 두고 총독부 산하 조직은 중앙행정기관을 비롯해 지방행정기관, 사법재판소, 치안기구, 자문조사기관, 교육기관, 경제약탈 기관 등으로 구분했다. 중앙 부서는 총독관방․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상공부․사법부 등 1관방․5부로 나뉘었고, 지방조직은 대한제국의 13도 11부 317군의 체계와 일제 통감부의 이사청·재무서 체제를 통합해 총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식민지 체제로 개편했다. 대한제국 정부 내의 1경 11부는 서울(1경)을 경기도에 편입시켜 12부로 변경했다. 일본인 거류민이 많은 대구·청진·평양은 부로 승격하고 부로 되어 있던 경흥·성진·용천은 군으로 격하했다.

경찰 조직은 1910년 9월 10일 ‘조선주차헌병조례’를 공포해 헌병경찰제도로 만들었다. 이는 헌병이 군사경찰뿐만 아니라 일반의 치안 유지를 위한 경찰행정까지 담당하게 하는 제도였다. 헌병경찰제 조직은 헌병대 사령부와 경무총감부로 형식상으로는 구분했지만 실제로는 헌병대 사령관이 경무총감을, 각 도 헌병대장이 각 도 경무부장을 겸임토록 했다.

1910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하면, 일본 육군 2개 사단과 진해·영흥만에 있는 해군 요새사령부 등 정규군 약 2만 3,000여 명에 헌병경찰 1만 3,400여 명까지 가세해 총칼을 지닌 군인과 경찰이 3만 6,000여 명에 달했다. 총독부 행정관리 2만 1,000여 명을 포함하면 5만 7,000여 명이 한반도를 물샐틈없이 감시했던 것이다.

일제 통치 36년간을 크게 구분하면 제1기는 1910년부터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무단통치기, 제2기는 1919년부터 1930년까지의 문화통치기, 제3기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1945년 일제의 패망까지 소위 조선 민족 말살기로 나뉜다.

조선총독부의 권한과 역할도 통치 목적의 변천에 따라 바뀌었다. 대폭적인 개편은 3·1 운동 후 조선총독부 관제를 획기적으로 개정(칙령 제386호)한 1919년 8월 19일에 이뤄졌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총독을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자격 조항을 폐지한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문관 출신자에게도 총독 임용의 길을 열어놓긴 했으나 실제로 등용된 예가 없어 기만책에 다름 아니었다. 또한 총독의 육해군 통솔권 조항을 삭제하고 유사시 조선에 있는 육해군 사령관에게 병력 사용을 요구하도록 했으며 무단통치를 상징하는 헌병경찰제도는 폐지했다.

또한 총독부의 중앙행정기구도 종래의 내무․탁지․농상공․사법부를 내무․재무․식산․법무국으로 바꾸고 종전까지 내무부에 속해 있던 학무국을 총독 직속의 국으로 승격시켰으며 독립관청이던 경무총감부 대신에 경무국을 두어 6국으로 개편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후에는 조선이 총동원 체제로 재편됨에 따라 조선총독부의 기구도 이에 맞춰 전면 개편함으로써 패전 때까지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최대한 수탈하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일제하 36년간 조선 총독은 9대에 걸쳐 모두 8명

일제하 36년간 조선 총독은 9대에 걸쳐 모두 8명이었다. 대부분 군 대장 출신에 일본 내각의 육군대신을 거쳤으며 8명 중 4명은 총독 부임을 전후로 내각총리대신까지 역임한 일본의 실세들이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육군대신을 거쳐 1910년 5월 30일 3대 조선 통감으로 임명되어 7월 23일 조선에 도착하고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을 강제로 조인한 뒤 10월 1일 초대 총독 업무를 시작했다. 총독부 청사는 남산 아래 왜성대에 위치한 통감부 건물을 새로 꾸며 간판만 바꿔 달았다.

데라우치는 조선 통치의 중점을 치안 유지에 두었다. 조선인은 억눌러야 한다는 게 기본 생각이다 보니 육군 대장의 제복을 입고 긴 일본도를 차고 출근했다. 그는 언론을 싫어했다. 일본 언론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일보, 조선일일신문, 동양일보, 조선일출신문, 경성신보 등을 모두 폐간하고 일본어의 경성일보와 조선어의 매일신보만을 남겨 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다. 1911년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을 조작해 조선의 지도자를 700여 명이나 투옥하는 등 항일 인사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하다가 1916년 6월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조선을 떠났다.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1916년 12월 10일 부임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조약을 강요했던 조선주차군 사령관으로 4년 동안 근무한 바 있어 조선의 사정에 정통했다. 당시에는 호랑이 장군으로 악명을 떨쳤던 그였지만 1916년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는 돈과 주색을 밝히는 60대 중반의 무능한 노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정무총감에게 모든 정무를 맡기고 총독 관저에 틀어 박혀 골패와 마작놀이로 세월을 보내다가 3·1 운동 후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이례적으로 해군 대장 출신이었다.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를 맞은 것은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이었다. 그러나 부임 당시 그가 부여받은 임무는 문화정치였기 때문에 부임 직후 첫 회의에서 “총칼로 지배하는 것은 그 순간의 효과밖에 없다. 남을 지배하려면 철학과 종교와 교육 그리고 문화를 앞장세워서 정신을 지배해야 한다”고 시정 방침을 밝힘으로써 문화정치를 예고했다. 문화정치 취지에 맞게 그동안 횡포를 부리던 헌병경찰대를 폐지하고 13도 지사 중 일본인 8명을 갈아치웠으며 조선인 지사 5명은 유임시켰다.

 

조선총독부의 권한과 역할, 통치 목적의 변천에 따라 바뀌어

종국적인 시정 목표는 일본인과 조선인을 하나로 엮는 ‘내선동화’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을 성사시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동안 금지해온 조선인의 신문사도 허용, 조선일보·동아일보·시사신문의 발행을 허가했다.

교육면에서는 1922년 2월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조선인 학교도 형식상으로는 일본 학제와 동일하게 만들었으며 1924년에는 경성제국대의 설립을 인가했다. 그렇다 해도 문화정치의 근본은 민족회유 정책과 민족분열 정책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조선 땅을 통치한 8년은 이 나라의 혼을 빼앗은 세뇌정책기이기도 했다. 사이토는 1927년 12월 총독에서 물러났다가 1929년 8월 5대 총독으로 다시 부임하고 1931년 6월 물러났다. 이후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1935년 내대신으로 재임 중 1936년 일본에서 일어난 2·26사건으로 살해되었다.

4대 총독으로 임명되어 1927년 12월 19일 경성역에 내린 4대 총독 야마나시 한조 역시 육군 대장 출신이었다. 돈을 좋아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진 터라 일본인 거류민 사이에서 배척 운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1928년 5월 조명하 의사가 대만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를 독검으로 찌르는 의거를 일으켜 정치적 곤경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여자를 멀리하는 대신 돈을 가까이 했다. 돈은 그에게 유일한 보람이자 재미였다. 결국 ‘독직 사건’에 연루되어 물러났다.

1931년 6월 부임하고 1936년 8월 물러난 6대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는 육군 대장 출신에 1924년부터 5년 동안 5대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한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는 가정적으로는 애처가답게 여색에 대범했고 정치적으로는 이상주의자의 경향을 보였다. 그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이 조선 농어촌의 진흥 운동이었지만 실상은 철두철미 일본 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1936년 8월 부임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는 육군 대장과 육군대신, 관동군 사령관 겸 특명전권대사를 거친 전형적인 군인 출신이었다. 15년 동안 최전선을 누빈 최고 책임자답게 6년간 황민화 정책을 강압적으로 추진하고 한반도를 전시 체제로 개편했다. 신사참배, 황궁 요배, 조선어 과목 폐지 및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강요 등이 모두 그의 재임 때 실시되었다. 1942년 5월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8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는 1942년 6월 15일 부임해 징병과 징용, 학병제를 실시하고 물러났다. 9대이자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육군 대장, 내각총리대신까지 역임한 거물 정객이었다. 하지만 그는 부임 1년 만인 1945년 9월 8일 서울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는 수모를 당한 뒤 이 땅에서 쫓겨났다.

8명의 총독 중 4명은 1945년 이전에 죽고 4명은 1945년 이후에 죽었다. 살아남은 총독 중 7대 미나미 지로와 8대 고이소 구니아키는 종전 후 A급 전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도쿄극동재판의 법정에서 함께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다가 고이소는 구치소에서 생애를 마치고 미나미는 병으로 출소해 집에서 사망했다. 6대 총독 우가키는 전후에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어 1953년 참의원 선거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으나 3년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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