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1870년 : 정한론(征韓論) 등장과 요시다 쇼인

↑ 정한의논도(征韓議論圖). 왼쪽은 이와쿠라 도모미이고 중앙은 사이고 다카모리다. 1877년 작

 

조선이 일본의 달라진 위상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 조야에서 ‘정한론(征韓論)’ 고개 들어

1868년 1월 쇼군의 막부 세력과 천황을 추종하는 존왕양이 세력 간에 패권을 가리는 ‘보신 전쟁’이 벌어졌다. 1868년 3월 에도(도쿄)의 막부군이 항복하고 메이지 천황의 신정부군이 에도에 무혈입성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는 26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천황의 신정부가 일본 유일의 중앙정부가 되었다.

메이지 신정부는 내정을 안정화하는 한편 주변국들과의 외교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조선의 경우는, 1868년 12월 외교문서를 통해 일본에 정권 교체가 있었음을 통고하면서 종전에 사용해온 쓰시마번 번주의 직인 대신 천황의 옥새를 찍고 “우리 천황(天皇)께옵서”, “조칙(詔勅)을 내리시와” 등의 문구를 사용했다. 하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이런 표현은 종주국인 중국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과 대등한 교린 관계의 일본이 마치 황제국의 위치에서 조선을 제후국 대하듯이 외교문서를 보내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이 보낸 외교문서의 수령을 거부하는 것으로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후 두 나라는 공식 접촉이 단절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당시 조선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등의 영향을 받아 위정척사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대원군 집권기였다. 그동안 친선 관계를 유지해온 도쿠가와 막부를 힘으로 무너뜨린 메이지 신정부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의 달라진 위상을 인정하지 않자 일본 조야에서 교류 재개를 촉구하되 듣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고개를 들었다. ‘정한(征韓)’은 1871년 폐번치현(廢藩置縣), 1873년 징병령으로 하루아침에 실직한 수십만 명 무사 계급의 반발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초기의 정한론은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사이고 다카모리와 참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선봉에 서고 외무성 관리인 사다 하쿠보가 분위기를 띄우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사다 하쿠보는 1870년 3월 부산의 초량 왜관으로 건너가 한 달간 조선의 사정을 살핀 후 귀국해 조선 정벌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정한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신정부는 아직까지 과격 노선보다는 온건 노선을 지지해 외교 관리인 요시오카 고키를 다시 조선에 파견, 정식 국교 수립을 위한 교섭을 진행하도록 했다. 요시오카는 1년 7개월간 부산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뒤 정한을 반대하는 장문의 건백서를 제출했다.

 

정벌 시기는 명분일 뿐 신정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 다툼

이런 상황에서 1873년 부산의 왜관 직원에게서 급보가 전해졌다. 조선의 동래부가 일본의 왜관 정문 앞에 ‘일본은 무법지국’이라는 내용의 반일 전단을 게시했다는 것이다. 일본 내각은 일본을 욕되게 한 조선에 당장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분개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파병을 주장했다. 사이고는 자초지종을 알아보겠다며 자신을 사절로 보내달라고 내각에 청했다. 만일 조선 조정이 자신을 죽이면 그 일을 빌미로 출병하라고도 했다. 그의 비장한 정한론에 감동한 내각은 그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그런데 1873년 9월 이와쿠라 도모미,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치 등 메이지 신정부 수립의 공신들이 견외사절단으로 미국과 유럽을 두루 순방한 뒤 1년 10개월 만에 귀국하면서 정세가 일변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와 함께 ‘메이지 유신 3걸’로 불리는 오쿠보 도시미치는 귀국하자마자 사이고의 정한 시도를 극력 반대했다. 같은 사쓰마번 출신의 동지이자 죽마고우였던 오쿠보가 정적으로 변신하면서 유신 세력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오쿠보는 불확실한 군사행동보다는 일본의 내정 개혁을 통한 선진화가 선결 과제라고 주장했다. 사이고를 사절로 조선에 파견하면 전쟁과 직결될 수 있고, 재정적·대외 정책적 문제를 야기하며, 미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정에 차질이 빚어진다는 등을 이유로 사절 파견 연기를 주장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오쿠보를 두둔했다. 결국 사절 파견을 재촉하는 사이고 다카모리와 사절 파견 연기를 주장하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 정벌 시기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신정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 다툼이었다.

지루한 논쟁이 막을 내린 것은 천황이 오쿠보의 손을 들어준 1874년 10월이었다. 사이고를 비롯한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 5인은 천황의 신임을 잃었다고 생각해 사직 후 낙향했다. 사이고는 고향인 사쓰마번에 ‘사학교’를 설립했는데 사학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쓰마번의 정치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오쿠보가 사학교를 감시하고 이간 공작을 펼치기 위해 고위 경찰을 사쓰마번에 파견했다.

1877년 1월 사학교 간부들은 정부가 경찰을 파견한 목적이 사이고 암살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이고와 함께 거병했다. 메이지 시대 최대 최후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세이난 전쟁’이었다. 반란군은 1877년 9월까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정부군을 이기진 못했다. 결국 사이고는 9월 24일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오쿠보의 생애도 길지 않았다. 1878년 5월 14일 도쿄 한복판에서 6명의 무사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 설파

정한론의 정신적 연원은 요시다 쇼인(1830~1859)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자신이 운영하는 학당 ‘쇼카손주쿠’(소나무 아래 공부방이라는 뜻)에 모여든 제자들에게 정한론을 주입하고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편으로 극단적인 존왕 사상을 전파한 이론가이자 실천가가 요시다 쇼인이기 때문이다.

요시다 쇼인 초상

 

요시다 쇼인은 혼슈 서남쪽 끝에 위치한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 하기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 전까지는 주로 병학을 배웠으나 병학으로는 일본을 지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1851년 막부의 아성인 에도로 올라가 서양 학문을 배웠다. 그러던 중 페리 함대가 1854년 1월 시모다 앞바다에 나타나 함포를 쏘면서 막부의 회답을 요구했다. 요시다는 페리 제독의 흑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직접 열강의 병법과 기술을 배워 그들과 맞설 생각으로 1854년 3월 페리 함대의 미시시피호에 잠입해 밀항을 요구했다. 하지만 페리 제독은 남루한 행색의 떠돌이 사무라이를 배 밖으로 쫓아버렸다. 요시다는 이런 사실을 스스로 막부의 관청에 고해 에도의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0월 조슈번 감옥으로 넘겨졌다.

요시다는 감옥에서 철학·역사·지리·병학·의학 분야의 서적을 독파하고 동료 죄수들에게 하이쿠, 서도, 맹자 등을 가르쳤다. 감옥에서 ‘유수록’을 집필했는데 내치를 다진 뒤 해외로 진출해 류큐(오키나와)와 조선을 정벌하고 북으로는 만주, 남으로는 대만과 필리핀 루손 일대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55년 11월 감옥에서 풀려났으나 주거는 본가로 제한되었다.

요시다는 다다미 세 장 반짜리 방에서 지인들을 상대로 강의를 재개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늘어나자 1857년 11월 집 마당에 작은 건물을 수리해 제자들을 가르쳤다. 일본 근대화의 산실로 꼽히는 ‘쇼카손주쿠’의 시작이었다. 요시다는 특유의 존왕양이론에 입각해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은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을 설파했다. 막부 체제를 전복하고 서양으로부터 받은 피해를 이웃 나라에서 되찾아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을 정벌해 국체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정한론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다양한 문하생 신분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쇼카손주쿠’에서는 상류계급인 사무라이, 병졸인 아시가루, 평민 등의 차별을 금지해 문하생 신분이 다양했다. 사무라이 우선의 계급사회 시절에 그것은 파격이었고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곳을 거쳐간 제자 90여 명 중 상당수는 요시다의 가르침에 따라 막부와의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불꽃처럼 산화했으나 일부는 살아남아 메이지 유신을 안착시키고 조선을 침략하는 데 공을 들였다.

‘메이지 유신의 3걸’로 이름을 날린 기토 다카요시, 막부 타도의 선봉 다카스키 신사쿠, 군부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하며 2차례나 총리대신을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선 병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민비 암살의 배후 인물인 이노우에 가오루, 민비 시해를 지휘한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 조선총독을 역임한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하세가와 요시미치, 가쓰라 태프트 밀약의 당사자 가쓰라 고로 등이 모두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다. 조슈번은 요시다의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 역대 총리 57명 중 8명이나 배출한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은 1858년 6월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뒤 여러 항구를 개항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막부의 대로(총리) 이이 나오스케가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일본 조야를 시끄럽게 했다. 이런 와중에 그해 11월 막부의 고관인 마나베 아키카쓰가 양이파를 단속한다는 말을 듣고 요시다는 마나베 암살 계획을 세웠다. 이 사실을 알게된 조슈번주는 요시다의 과격한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12월 쇼카손주쿠를 폐쇄하고 요시다를 다시 감옥에 가뒀다. 그런데 한 정치범이 요시다 쇼인이 마나베를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 요시다는 이 사실을 최고재판소 심문에서 당당하게 인정했다. 결국 1859년 10월 27일 사형을 선고받아 그날 29세 나이로 에도 감옥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다.

요시다는 죽기 전 작성한 ‘유혼록’에 ‘몸은 비록 무사시(도쿄 인근 지명)의 들녘에서 썩어지더라도 세상에 남겨지는 야마토 다마시(大和魂·대화혼)’라고 썼다. 이후 이 ‘대화혼’은 태평양전쟁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돌격 구호로 사용되었다. 쇼카손주쿠는 2015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시기의 철강·조선·석탄산업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면서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이유를 들어 산업시설이 아닌데도 쇼카손주쿠를 산업혁명 유산군에 끼워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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